로마인 이야기-9 SAECULUM AUREUM
현제의 세기
트라야누스 황제 (마루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53~117 재위 98 ~117)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로마 출생 황제의 전통을 깬 사람이라면 트라야누스황제는 더 나아가 에스파냐 남부 베티가 속주의 이탈리카 도시 출신으로 속주 출신 첫 황제로 기록된다.
전임 황제 네르바는 고령에 소생이 없어 후계자 문제로 불안을 느껴 당대의 인기 있고 강력한 군단 영향력을 가진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과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선포하였다.
트라야누스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밑에서 군단장 노릇을 했으며 유대 전쟁시에는 티투스 아래에서 전투에 참가하는등 많은 전쟁 수행 경험으로 베시파시아누스의 천거로 원로원 귀족이 되기도 한 인물이다.
아버지 덕에 휼륭한 교육과 출세 길에 무난히 올라 엘리트 코스인 회계감사관-대대장-법무관-군단장-집정관-게르마니아 사령관을 거치는 순탄한 과정을 거치고 특히 군단에서 인기있는 인물이 되어 98년 1 월 네르바의 후계자로 있다가 사망과 동시에 황제 자리를 받았지만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에겐 좀 생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된 뒤에도 바로 로마로 가지 않고 고지 게르만 사령관으로 머물면서 로마에 있는 반대파로 지목되는 근위 대장과 그 일행 몇을 자기 소속 군단으로 불러 살해해 버리고 게르만 지역을 확고히 한 후 다음해 99년 여름에야 로마에 입성하였다.
로마 입성시 환영나온 인파에 답례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 갔다는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당히 재치있는 사람이였다고 본다.
로마 황제의 주 임무는 첫째, 외치-안전 보장 둘째, 내치 문제인 빵과 서커스로 대변 되는 식량 문제와 복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 간접자본 또는 사회 기반시설의 확충인데 트라야누스는 이 세가지에 탁월한 공적을 남겼으며 부유층들이 당시에 로마를 떠나 발생하는 로마 공동화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는 정책인 원로원을 비롯한 부유층의 로마 투자를 법령화 하였다.
먼저 국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인 도나우강 북쪽의 강력한 다키아 지역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직접 출정하여 궤멸시켜 속주로 편입하고 5 만명의 포로를 노예로 삼았다.
1,2차의 다키아 전투 상황은 트라야누스 원형 개선 기둥 기념물에 석조 부조로 남겨 중세 시대 유실된 기록을 대신하여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물살이 세고 폭이 넓은 도나우 강에 길이 1135 미터 폭 12 미터 교각 20 개의 트라야누스 다리를 단기간인 1년만에 세운 것을 비롯하여 기원전 312년 부터 시작한 가장 처음 만들어지고 "가도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아피아 가도를 복선화 한 일, 로마에서 20 킬로 떨어진 테베레 강 하구의 오스티아 항구 증설, 대형 대중 목욕장, 도서관, 신전, 병원, 대규모 포름 건축등 이루 셀수 없는 많은 공공 시설을 건립하기 시작하고 4년 전에 시작했던 새로운 콜로세움도 완공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공공 사업은 주로 황제의 개인 비용으로 치러지는데 황제는 자기의 속주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이를 메웠다 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지금은 유럽에서 귀족의 군대 참전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로마에서 경제적 영향력 있는 인사가 자기 수입이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서 나왔다고 한다.
즉, 귀족이 아닌 해방 노예가 유언으로 자기 재산을 사회 사업이나 가난한 인재 앞으로 남기는 것도 여기에 포함하였다 한다.
여기서 한가지 의아스런 사실은 로마엔 학교 시설과 관청 건물이 변변히 없다는 것인데 이는 재력가나 귀족 집안은 개인 교사를 채용하는데 아테네, 로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순서로 높은 대접을 하고 다음으로는 갈리아나 스페인 출신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교사였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경우는 귀족층이었으나 재력이 여의치 않아 갈리아 태생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한 사람을 개인 교사로 삼았다고 한다.
또 대규모 관청 건물이 없었던 점은 로마 제국이 지방 자치를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방대한 조직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다.
다키아 전쟁 개선 기념으로 1천명의 검투사가 동원 되어 며칠간 계속해서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벌렸는데 검투사는 수입이 좋아서 직업 검투사도 있고 노예를 이용하기도 하고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사람도 등장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때로는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맹수를 풀어 포로와 대결 시키는 야만적인 경기였으나 당시 풍습으로는 포로 처리의 한 방법으로 일반화 된 일이었다고 한다.
속주화가 오래 되어 안정된 지역은 원로원에서 선출한 총독이 배치되었는데 주로 전직 집정관 출신(프로 콘술)이고 군단도 배치하지 않거나 있어도 숫자가 적었으며 외적과 대치 지역이거나 군사적 시위가 필요한 속주 지역은 황제 속주로 구분하여 황제가 임명하는 군단 사령관(레가투스 임페리알레)이 총독을 역임하는데 당시 속주는 32 개로 되어있었고 28개 군단이 배치되었다.
지금의 터어키 지역인 소아시아의 바타비아 속주 총독을 황제 속주로 바꾸고 문필가이기도 한 황제와 사이가 좋은 플리니우스를 총독으로 배치하였는데 플리니우스는 황제에게 자기가 처리 곤란한 점을 일일이 자문 받거나 지시 받았다 하는데 그 서신이 지금 134통이나 남아있어 그 당시 상황을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록이라고 한다.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트라야누스의 행적을 상당히 잘 파악 할 수 있으며 얼마나 치세가 휼륭했는지 알 수가 있다.
이 황제의 치세 기간에 영토 확장이 절정을 이루어 가장 로마 제국의 영역이 넓어졌다.
당시 일반 사람들은 황제를 카이사르, 프린켑스 즉 제 1인자라는 의미로 불렀고 군대 계통에서는 임페라토르라 불렀는데 이는 처음에 단지 사령관이란 뜻인데 후에 황제로 의미가 바뀌었다고 한다.
트라야누스의 선정으로 시민들은 그를 옵티머스 임페라토르(지고의 황제)로 별칭을 하였으며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즉,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다 병을 얻어 117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76~138 재위 117~138)
트라야누스와 같은 지역 사람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대부로 외삼춘이 되는 트라야누스와 후에 실력자가 된 이킬리우스 아티아누스의 보호 아래 성장하였다.
머리가 총명하였으며 그리스 학문에 관심과 재능이 있어 트라야누스는 "그리스 아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 대부의 기대에 부응하였고 네르바가 사망하고 대부 트라야누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하드리아누스가 한시라도 빨리 알리려고 말을 타고 달려 로마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독일 남부 퀼른에 있는 트라야누스에게 알렸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외모도 뛰어나 많은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있었는데 특히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리나와 트라야누스의 누나에게 귀여움을 받아 누나의 손녀 사비나를 아내로 맞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 32세에 이미 집정관을 역임하고 트라야누스의 후계자가 되어 다음의 황제가 되었는데 역사가들은 과연 트라야누스가 직접 하드리아누스를 지명하여 후계자로 하였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
왜냐면 트라야누스가 후계자를 선포한 기록이 없고 또한 트라야누스가 여행 중에 사망하였으며 당시 주변에 하드리아누스의 지지자들인 황제 아내인 플로리나, 황제 누이, 하드리아누스의 아내 사비나 그리고 시의 밖에 없었고 시의도 곧 의문사하여 이런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 남녀 관계가 요즘 말로 하면 상당히 문란하였기 때문에 인물이 출중한 하드리아누스여서 이 세 여인들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억측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하드리아누스는 외지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다른 사람을 옹립하는 기운이 감돈다는 근위 대장이었던 또 한명의 대부 아티우스의 연락을 받은 하드리아누스는 잘 대처하라는 지시를 내리는데 아티우스는 의심만 있는 상태에서 명망있고 나이가 많은 장군 네 사람을 즉시 처단해 버려 하드리아누스가 집권을 시작하기도 전에 원로원과 로마의 공기는 살벌하였다고 한다.
사실 하드리아누스도 살해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으나 일이 커지자 아티우스를 질책하였다고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입장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이런 초기의 불미스런 사태도 잘 수습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일년 만에 로마를 평화가 감도는 분위기로 바꾸고 뒤이어 자기 의지대로 황제의 임무를 다하였는데 다른 황제와는 판이하게 새로운 통치 방식을 선택하였다.
즉, 재위 21년 동안 단지 통산 7년 정도를 로마에 머물고 세번에 걸쳐 총14년간을 로마 제국 전역 순방 통치로 시간을 보냈다.
먼저 1.2 차 순방은 게르마니아-브리타니아-지중해-오스티아-안티오카-소아시아(터어키)-로도스(장미의 섬)-도나우 지역-아테네(48세)-시칠리아-로마 귀환 -아프리카 북부등 방대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직접 지시하고 통치하였다.
먼저 브리타니아에 도착하여 칼레도니아 (현.스코틀렌드 ) 남부 지역에 동서로 성벽을 쌓도록 지시하였는데 지금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라고 부르며 영국인들은 헤이드리안 성벽이라고 하여 일부 남은 유적을 잘 보호 하여 관광 자원화 하고 있다.
어린 시절 그리스에 대한 동경이 깊었던 황제였으나 네로황제가 그리스 사랑을 표면에 나타내 원로원의 미움을 받은 것을 고려하여 충분히 자기의 치세를 확고히 굳힌 뒤에 아테네를 방문하여 비로소 자기가 고대하던 오랜 숙원을 풀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리스가 전통적으로 강한 비밀 종교 행사인 동굴에서 실시하는 비밀 제의에도 참가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아테네 재건을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자금을 지원하고 신전이나 공공 시설 건립을 지시 하였다고 한다.
트라야누스황제의 경우는 소아시아의 뛰어난 건축가 아폴로도로스를 직접 대동하여 일을 맡겼으며 트라야누스 다리도 역시 그의 설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이 예술에 대한 안목도 대단하여 직접 설계에 참가하고 공사 감독을 하기도 하였으며 로마 동쪽 20킬로 떨어진 티볼리에 직접 자리를 골라 잡아 하드리아누스 별궁을 건립하기도 하였는데 그 크기는 전무 후무하였고 모든 조각 선정과 배치도 직접 구상하였다고 한다.
3차 순방은 다시 아테네-소아시아-아르메니아-흑해연안-시리아 속주-유대 정벌-이집트 지역
다시 아테네에 들려 그간 지시했던 시설의 준공을 지켜보고 이제는 남의 눈치를 볼 입장이 아닌 하드리아누스는 아예 그리스 식으로 수염도 길렀다고 한다.
원래 로마인은 실용성을 중시 수염을 안 길렀고 그래서 로마를 존경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로마식으로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스를 흠모한 하드리아누스는 후에 수염까지 기르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고 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등이 가졌던 미소년 애호 취미도 살려 소아시아 출신 안티오라는 소년을 곁에 두고 순방길을 다녔는데 이집트에 도착해서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프톨레미우스 왕조시대부터 유명한 새로 문을 연 "무세이온(공공 도서관)"에 들려 많은 서적을 구경하고 학자들과 심포지움도 열어 격론도 벌이기도 했다.
영어로는 심포지엄, 라틴어는 심포시움, 그리스어로는 심포시언이라하여 일종의 연구 발표회 성격이었는데 참가한 일행은 제국의 황제와 논전을 벌이면서 어떻게 감히 공격할 수가 없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황제와 열띤 실력 대결까지 벌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황제는 평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아내 사비나까지 초청하여 나일강 뱃놀이를 같이 하다가 안티오가 나일강 악어에 물려 죽자 황제의 체면도 잊고 엉엉 울었으며 그를 신으로 추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로마에서는 30만개의 신을 인정하였던 다신교 국가여서 특히 죽은 자에 대한 신격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주변 여성들의 질시의 대상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고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 오기 전에 유대에 반란이 일어나 하드리아누스는 지금의 예루살렘 가까운 지중해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에 주제하며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철저하게 유대인을 각지로 내쫒는 디아스포라(Diaspora 원래는 씨뿌리기였으나 후에 "이산"의미 정착)를 선포하여 이 선포 이후 1800년 동안 유대인을 유랑 민족으로 만드는 단초가 되게 했으며 지명도 유대를 팔레스타인으로 예루살렘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어 버리는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2천년 전의 유대의 이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극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국제적인 분쟁지가 되고 있는것을 볼 때 역사의 유구성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장기간 직접 제국을 순방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였어도 그 기간에 로마에 휼륭한 협조자를 배치하여 큰 문제가 없도록 함은 물론 화재로 불탄 아그리파가 세웠던 판테온(만신전) 건립을 다시 착수하고 테베레 강 건너에 황제묘를 건립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는등 여러가지 용도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바티간에서 사용하는 산타 체칠리아가 바로 그 당시 하드리아누스의 지시에 의한 황제묘이다.
하드리아누스 성격을 평하길 어떤 사람은 변덕쟁이로 어떤 사람은 설명이 곤란한 복잡한 성격 소유자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 자기에 충실한 인물이라고도 하는데 예술을 사랑하는 인물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그런 복잡한 기질의 소유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겐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나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로써는 큰 문제 없이 자기의 열과 성의를 다하여 통치 하였다고 한다.
한편, 황제가 로마에 체류 할 때 자주 대중 목욕탕에 갔는데 어느 날 한 노인이 등을 벽에 문지르는 걸 보고 왜 그러냐고 물으니 전에 수 많은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던 군인이었는나 지금은 재산이 없어 노예를 부리지 못해 떼를 밀기 위해 할 수 없이 이렇게 한다고 하니까 황제가 노예 살 돈을 주었고 이 소문이 퍼지자 황제가 나타나기만 하면 목욕탕에 수 많은 노인들이 나타나 벽에 등을 문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일화를 남길 정도로 소탈하고 제국 다스리기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황제도 나이가 들자 건강도 나빠지고 성격도 더 고약해져서 원로원의 미움을 사게 되고 외부와 단절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소생이 없자 자기보다 나이가 열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안토니우스를 후계자로 선정하고 공동 통치에 들어 갔는데 말년의 많은 성격적 문제점을 후계자 안토니우스의 덕분에 그런데로 잘 넘겼다고 한다.
만일 안토니우스가 없었더라면 초중반부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드리아누스의 치세는 나쁜 평가를 받고 탄핵을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를 반증하는 예를 들면 사후 대부분 큰 잘못이 없으면 당연시 인정되던 신격이 원로원에서 거절되기까지 했는데 안토니우스의 간곡한 부탁과 호소로 신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재위 138~161)
조상은 남 프랑스 네마우수스(현, 프랑스의 님)이고 본인은 로마 근처 출생이었으나 재산가인 부모 덕분에 휼륭한 교육과 많은 유산을 상속 받았으며 고매한 성격으로 신망을 받아 문민 출신이었으나 전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결국 열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드리아누스와 양자로 결연을 맺어 황제에 올랐다.
양자 결연시 아들이 없던 안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요청으로 두 사람의 양자를 받아들였고 이들을 잘 성장시켜 그 중 한 사람으로 로마사에 이름을 남긴 휼륭한 황제인 명상록의 저자이기도 한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성격은 온화하고 제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제국의 황제는 자기가 가졌던 이전의 재산까지도 자기 주장을 하면 안되고, 국가 소유로 할 재산을 필요치 않는 곳에 사용하는 것은 비열한 행위"라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한다.
전 황제들의 부지런한 공공 시설 건립으로 별로 새로운 사업을 벌일 필요가 없었으며 군대를 이용하여 변경에 나가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로마에 머물면서 안정된 제국을 다스릴 수 있는 행운도 가졌으며 이름 뒤에 별칭으로 피우스는 자비롭다는 의미여서 즉 " 안토니우스 피우스:자비로운 황제"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받은 황제이다.
이런 사정으로 역사가나 가십을 좋아하는 작가들에겐 황제를 소재로 쓸만한 사건도 만들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태평한 치세를 마치고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 속에 행복한 죽음 맞이하였다.
그의 조상의 고향인 님에는 로마 수도 시설의 대표적인 유물로 여러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고대 로마 유적 "르 퐁트 위 가르 수도교"(로마제국 수도교로 항상 등장)가 완벽한 보존 상태로 남아 있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수도교는 황제가 자기 고향이라고 해서 건설하였던 것이 아니고 아그리파가 이전에 만들었고 황제는 자기 고향에 특별 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많은 속주 출신 황제가 탄생했지만 북아프리카 출신 셉티우스 세베루스황제를 제외하고는 자기 고향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은 사실도 로마 황제들의 선정으로 꼽힌다.
가르라는 작은 강을 건너 지르는 수도물을 공급하는 조적식 다리인데 이층으로 되어 사람도 다니도록 하고 수도물길도 만든 대표적인 로마 유적으로 사진에 많이 등장하며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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