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10 OMNIAE VIAE AD ROMAM DUXERUNT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All roads lead to Rome. "모든 길은 로마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는 위의 말을 바꿔 로마 제국의 최대 번영기에 32개 속주에서" 모든 길은 로마를 향해 뻗어 나갔다" 라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말은 다시 "목적을 이루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는 의미로도 차용되었다.
하여튼 저자는 로마 제국의 국가 기반시설인 S.O.C. 즉, 건설 Infrastructure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규모와 시행에 찬탄해 마지 않고 있다.
제 10권은 바로 이 로마 제국의 기반 시설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다.
첫째, 대표적인 로마 가도는 기원전 312년에 원로원 신분이면서 재무관의 위치에 있던 클라디우스 아피우스가 후에 "가도의 여왕" (내가 이딸리아 갔을 땐 태양의 가도라고 하기도)이라고 불렀던 "아피아 가도"를 건설로 시작하였다.
그 전에 라티나 가도가 같은 방향으로 나 있었으나 새로운 차원의 가도를 신설하였고 이를 시발로 로마를 기점으로 하는 7개의 주요 가도가 방사선처럼 이딸리아 각지를 향해 뻗어 나갔는데 이 길은 결국 로마 제국의 각 속주까지 연장되었다.
아피아 가도는 아피우스가 처음 카푸아까지 연결하였으나 나중에 베네벤토-베노사-타란토- 아드리아 해의 항구 브린디시까지 최종 연장되었다.
로마 가도는 폭 4미터에 양측 보행로 3 미터를 더하여 총 10 미터 였으며 1미터 깊이로 땅을 파내 잡석과 자갈을 깔아 배수를 철저히 하여 물 고임이 없게 하고 표면은 한 변이 40 센티미터 크기의 납작한 돌을 틈이 없도록 고르게 포장하여 쇠로된 마차 바퀴가 구르는데 용이하게 하였다.
폭 4미터는 마차 두대가 교행하도록 한 요즘의 2차선 개념의 넓이였고 마차가 달릴 때 보행자에게 불편이 없도록 어김없이 보행자 보도를 양측에 설치하였으며 약 1.4 킬로미터인 로만마일 마다 원통형의 이정표석을 세워 길 가는 사람들에게 현재 위치와 앞으로 갈 길을 알려주었다.
또 주변 나무의 뿌리가 가도를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양측 나무를 잘라 내고 죽은 사람들을 그 곳에 매장하도록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묘비명을 읽는 즐거움도 주었다고 한다.
번성기의 로마 제국 시절에 로마 황제가 건설한 가도는 속주를 포함해서 약 80.000킬로미터였다고 한다. 이는 독일의 학자 몇 사람이 다년간의 연구와 직접 답사에 의해 알아 낸 수치이다.
현재 로마 시내 근처에 예전 가도가 일부 남아있지만 특히 폼페이시에서 화산재를 걷어내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2천년 전의 도시 모습에서 가도의 생생한 형태를 볼 수 있다.
가도 건설에 부수되는 강위의 교량 설치도 뛰어난 기술을 발휘하여 가도와 같은 재료로 포장하였고 수평으로 만들어 마차가 달리는데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깊은 강의 교각은 나무 말뚝으로 우물통을 만들어 물을 퍼내고 강 바닥에 기초를 조성하여 튼튼한 교각으로 구축하였으며 지금도 당시 건설했던 다리가 로마의 경우 테베레 강에 기원전 109년에 건설한 밀리오 와 기원전 43년의 체스티오 다리가 지금도 일반인이 사용하고 있을 정도인데 학자들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약 300개의 다리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설하였다고 한다.
가도와 다리는 황제가 입안하고 작업은 군단 병사들이 하였는데 이는 지금과 달리 군 병사들이 군인이자 건설 기술자로 병사는 곧 기술자로 통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명한 장군 코르블로는 "로마군은 곡괭이로 승리한다." 라는 말을 남겼으며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여 가도 건설로 빠른 이동과 병참 보급이 전쟁 수행에 중요한 승리요인으로 보았다.
아그리파는 전쟁이 끝나 평화가 시작되자 이젠 활과 칼 대신 군단을 이끌고 가도및 수로 공사에 매진했다는데 핵심적인 기술자 집단이 2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사실 아그리파라고 하면 로마 시대 장군으로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데셍을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그리는 인물이며 황제를 위해 사랑하는 부인과 이혼을 강요 당해도 묵묵히 따르고 전쟁이 없을 때는 건설 공사에 열정을 쏟은 그야말고 자신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살다간 인물이다.
그러나 가도는 단지 군사 목적에 부응한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실생활에도 막대한 기여를 하여 물자의 원할한 소통이 로마 제국의 발전에 기여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의 역참 제도인 파발마와 같이 일정한 거리 마다 말 교체 시설을 마련하였는데 이를 라틴어로 스타티오네스 stationes (영어의 station 기원)라 하였고 60 킬로미터마다 역에는 숙박시설을 마련하였는데 이를 만시오네스 mansones 영어의 맨션 manson 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저택을 맨션이라 하고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자랑스러워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로마 시대의 말 보관을 위한 건축 시설 정도이니 그리 자랑할 일이 아니다.
이런 로마 제국의 가도는 지금의 독일 남부, 프랑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이스라엘, 시리아, 루마니아, 이집트,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서 지금 사용하는 도로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미 2세기에 로마 제국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지리 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작한 지도는 동으로는 인도부터 서쪽으로는 북유럽까지 방대한 지역을 보여주는 상당히 정교한 지도를 만들었고 여행자를 위한 안내 지도까지도 만들었을 정도였다.
두번째로 황제들이 관심을 기울인 시설은 수도시설인데 가도를 처음 시작한 아피우스가 이 수도도 역시 처음 건설하였는고 즉 기원전 312년 부터 기원후 109 년까지 10개 수로시설을 완성하였는데 그 한개의 수로가 수십에서 수백킬로에 달하였다. 그런데 이 수로의 특징은 대부분 지하 수로였으며 일부 구간은 수도교 형태였으므로 사람이나 자연에 의한 오염이 최소화 되는 장점이 있었겠지만 그 수로 건설 당시의 어려움을 상상하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방식이다. 더구나 이딸리아 지질은 석회석 성분이 많아 상당 기간이 지나면 수로에 석회질층이 두껍게 적층하였기 때문에 지하 수로를 관리하기 위해서 일정 거리마다 지표에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까지 만들었다니 지금보다 열악한 장비로 장거리의 수로를 만든 일에 감탄할 뿐이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가 정복하여 속주화한 카르타고는 워낙 수원지가 멀어서 무려 131킬로미터 의 수로를 건설하였다니 입이 벌어질 지경이다.
책에는 로마시에 공급되는 수로의 길이와 특색 그리고 물의 질까지도 자세히 언급 되어 있다.
로마 제국 시절의 수로를 말하게 되면 로마하면 떠오르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트레비 분수에 지금도 물을 공급하고 당시의 공중 목욕장에 필요한 많은 양의 물을 댔다고 한다.
또한 수로에서 일반 가정까지는 납으로 만든 수도관을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였는데 어떤 학자는 이 납관이 로마의 흥망을 갈라 놓았다고하는 학설을 발표하기도 했다한다.
세번째 공공 시설로는 목욕장인데 이는 대규모 인원이 한 꺼번에 이용하도록 했으며 각종 부대 시설을 함께하여 요즘으로 치면 대형 헬스크럽을 연상하게 한다.
로마 제국이 여러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을 바탕으로 풍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목욕장을 호화롭게 장식하여 가장 휼륭한 미술 작품은 모두 대중을 위한 목욕장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두리아누스황제는 미술품에 각별한 관심과 심미안이 있어 어느 목욕장에 있는 조각 작품이 탐이 나서 아래 사람을 시켜 슬며서 자기 별장에 가져오도록 했다가 나중에 시민들에게 알려저 욕을 먹고 사과 후 다시 제자리에 옮겨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처음에 대중 목욕장은 남녀 혼욕장이었는데 워낙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이 발생하자 바로 하드라누스황제의 지시로 시간을 따로 하여 낮에는 여성, 저녁과 밤에는 남성이 사용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고대로 갈 수록 남녀의 성적 관념이 자유스러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시대엔 여성의 가슴 노출이 크게 흉이 되지 않았으며 가까운 일본도 최근까지 남녀 혼욕이 남아있었던 것을 보면 이런 사실에 수긍이 간다.
속주에도 로마와 규모만 다른 뿐 똑 같은 공공시설을 조성하였으나 아무래도 로마는 모든 것의 본보기가 되었고 로마에 목욕장도 8개나 있었는데 모두 황제의 이름을 따랐으나 단 하나만 황제가 아닌 장군 아그리파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즉, 아그리파, 네로, 티투스, 트라야누스, 카라칼라, 데키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목욕장이다.
이 8개의 목욕장에 엄청난 조각 작품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로마의 주신에 해당하는 유피테르(제우스), 유노(헤라), 미네르바(아테네) 마르스(마스) 아폴로( )같은 신이나 황제, 장군의 조각이 즐비하였는데 기독교 시대에 들어서 우상으로 간주 되어 대리석 조각은 모두 폐기되고 청동 제품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녹여져 실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데 그래도 몇 점이 겨우 남아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다소 나마 짐작하게 한다.
로마 제국에서 의외의 사실은 교육 시설에 대한 투자가 다소 소홀하였는데 이는 로마 황제들이 기존 설립된 그리스 아테네와 로도스섬이나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교육 시설이 있는 것이 이 지역이 똑 같은 자기 나라로 보았기 때문에 필요하면 재정적 지원을 하여 그대로 두고 이용한 셈이며 특히 하드리아누스 같은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역할을 하는 "무세이온" (그리스어로 영어의 museum의 기원)의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순방시에는 직접 방문하여 학자들과 열띤 논쟁도 벌렸다고 한다.
사실 무세이온은 학술 연구소에 해당하는 대학원 같은 기능을 하였다고 한다.
옛 로마시대의 유적 발굴을 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문제가 되는 사항이 로마제국 당시의 도시들이 바로 지금의 도시들이기 때문에 현재의 시설을 손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즉,독일의 마인츠, 스트라스 부르그, 항가리의 부다페스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이 그 대표적인 도시이다.
로마인들이 이런 공공시설에 열성을 보인 것은 "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즉 키빌리타스 (civilitas 문명으로 번역되는 라틴어로 영어의 civilization 의 기원)을 위한 것이었으며 더하여 찬탄 할 점은 이 혜택을 로마 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에 골고루 주려는 위대한 정신이었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정신은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하였으며 티베리우스가 정착하였다고 보고있다.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엿 볼수 있는 글로써 "로마에 바치는 송가"로 알려진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그리스 출신으로 로마 원로원 앞에서 연설한 다음의 아리스티데스의 글을 한 번 읽어 볼 필요가 있다.
- "이제는 나 같은 그리스인도 아니 다른 어느 민족도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신분 증명서를 신청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안전하게 원하는 곳으로 여행할 수 있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라는 것만으로 충분해졌다. 아니 구태여 로마 시민일 필요도 없다. 로마의 패권 아래서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자유와 안전이 보장된다.
일찌기 호메로스는 노래했다. 지상은 만인의 것이라고 로마는 시인의 이 꿈을 구현했다. 당신들 로마인은 산하에 들어온 땅은 측량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후에도 하천에는 다리를 놓고 평지는 물론 산지에도 가도를 건설하여 제국의 어느 지방에 살든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정비했다. 게다가 제국 전역의 안전을 위한 방위 체제를 확립하고 인종과 민족이 달라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법률을 정비했다. 이런 모든 일을 통하여 당신들 로마인은 로마 시민이 아닌 자에게도 질서있고 안정된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
제국을 구성하는 각 속주에서도 속주 통치의 책임자인 총독은 정책을 결정하면 속주민의 청원을 받을 경우 조금이라도 의문을 느끼면 당장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지침을 청하게 되었다. 총독은 황제의 지시가 내릴 때까지 기다린다. 마치 지휘자가 신호를 기다리는 합창단처럼.
정보 전달만 보장되면 황제는 어디에 있어도 통치할 수 있다. 제국의 변경에 있어도 훈령서만 보내면 통치할 수 있다. 황제의 서한은 작성되지마자 날개 달린 헤르메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전령, 로마 신화의 메르쿠리우스)가 나르기라도 하듯이 신속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로마 세계는 마침내 광대한 지역에서 민주적인 통치체제를 실현했다. 그것은 과거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확대한 것이라 해도 좋다. 지도층은 시민들 가운데 재능이 풍부한 사라들도 구성되어 있고 그들의 출신지는 모든 속주에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제국 전역에서 모인 인재들이 제국 전역을 통치하는 셈이다.
그들은 모두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태어났거나 나중에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인데 광대한 로마 제국이 순조롭게 통치된 것은 그들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났고 행정과 군사가 완전히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제국을 대표하는 인물과 조직이 서로 원활하게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제국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전쟁은 이제 국경에서만 벌어질 뿐이고 제국 내부의 분쟁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제국 안에는 평화와 번영과 행복이 구석구석 침투해 있었다. 제국 바깥에 살면서 자나깨나 부족 싸움에 여념이 없는 족속이 불쌍해 보일 정도다.
로마는 만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래서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가 공생하는 로마 세계는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각 분야에서 제가기 맡은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공통된 축제일에는 황제가 주최하는 제의가 거행되고 있었다. 이는 각자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성과 정의를 유지하고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로마는 누구한테나 통하는 법률을 마련하여 인종과 민족이 다르고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지 않아도 법을 중심으로 공존공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방식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패배자한테도 많은 권리를 보장해주었다.
이 로마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로마 제국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날마다 깨우쳐주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다."-
참으로 로마를 잘 나타낸 귀중한 연설문이며 고대 로마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글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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