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8 CRISIS ET AB EA EXITUS 위기와 극복
제 8권은 책의 부제처럼 로마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위기의 시기로 68 년부터 117년까지 불과 30년 사이에 여섯 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혼란한 시기였고 역사는 반복 된다는 얘기가 있듯이 2 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30년 전 일어났던 정권 교체기와 비슷한 양상을 엿 볼 수 있어 자못 흥미롭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의 혈족으로 이루어진 율리우스 클라디우스 왕조에 속하는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갈바 황제부터 전혀 다른 인물들이 황제에 오르내렸다.
1.갈바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B.C.3~A.D.69 재위 68~68)
먼저 갈바황제는 에스파니야 주둔군 사령관으로 본국 로마에서 네로 황제가 원로원으로 부터 "국가의 적"으로 매도되고 민심에서도 멀어졌으며 가장 측근인 근위병으로부터도 인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자처하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이동한다. 결국 이 소식에 네로가 자결하여 생을 마친다. 이런 소식을 갈바는 로마로 오던 알게 되었다. 로마가 황제가 없는 공백 상태이므로 신속히 돌아와 하루 속히 평정을 되찾는 조치를 했어야했는데 이를 소홀히 하고 로마에 오는 길에 지나치게 시간을 끌었으며 도착한 후에도 원로원의 지지를 얻고 나서도 사후 처리에 미흡하였다. 첫째, 자기의 최측근 협력자인 당시 인기있는 오토를 비롯한 유력한 인물들의 기용을 하지 않는 실수와 당시 명망 있고 유능한 게르마니아 군 사령관 루푸스를 이유없이 해임하여 로마로 소환하고 비텔리우스를 임명하는등의 어처구니 없는 인사를 하였다. 둘째, 원로원과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결국 오토의 지시에 의해 살해 되는 단명한 황제로 끝났다.
2.오토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32~69 재위 69.1.15~4.15)
다음의 오토황제는 귀족 출신에 젊은 나이(37세)에다 능력도 있었으나 갑자기 준비없이 황제에 오르고 대비가 철저하지 못하여 게르마니아 군대의 사령관 비텔리우스가 황제를 자처하고 로마에 쳐들어 오자 대세가 기울어짐을 알고 37세의 짧은 나이에 자결하여 역시 3개월 단명한 황제로 마쳤다.
3.비텔리우스 (15~69 재위 69.4 16~ 12.20)
뒤이은 비텔리우스는 당시 로마에서 가장 강한 게르마니아 군대의 사령관으로 혼란한 로마를 바로 잡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였으나 당초부터 황제의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내란 상태의 뒷처리를 잘 하지 못하고 다뉴브지역의 군대가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게 하는등 잘못을 저지르고 이에 대한 후속 대처도 미흡하였다. 특히 반대파를 숙청으로 일관하여 당시 강력한 군대 세력인 시리아 총독 무니키아누스와 도나우 전선 병력으로 예루살렘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사령관 베시파이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게 되는 전초를 마련하였다. 결국 69년 12월 베시파이아누스를 강력히 지지하는 도나우 군단과 무니키아누스의 연합 군대에 패하여 비텔리우스는 피살되고 원로원은 베시파이아누스를 "제 1인자"로 선언하게 된다.
4.베시파이아누스 (9~79 재위 69~79) 이런 로마의 혼란기에 베시파이아누스는 당시 동방에 있었으나 용의 주도하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건너가 아들 티투스를 유대 전쟁에 투입하여 후계자 경력을 쌓도록 하는등의 치밀한 준비까지 하였다. 황제로 추대 되었으나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대신 충실한 무니키아누스가 일년 가까이 내전 으로 불탄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 재건을 비롯하여 로마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힘을 썻으며 밖으로는 갈리아 반군 세력의 공략도 하는등 훌륭한 뒷처리를 하였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판단한 베시파시아누스는 로마에 돌아와 경쟁자 없는 명실 상부한 제 1인자 자리에 앉아 뒤이어 유대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 장군 아들 티투스를 공동 통치자에 임명하여 사후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도록 하였다. 로마에 가면 당시 티투스의 유대 전쟁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상당히 잘 보존되어 서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여기서 유대인들이 모여 행사를 한다고 하는데 아마 2천년 자기들의 본향인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티투스였으나 아직도 유대인은 끈질김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과시가 아닌가 하다고 작가는 꼬집고 있다. 하여튼 지금까지의 황제들과는 달리 베시파시아누스는 로마 출신이 아닌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갈리아, 게르만, 동방, 알렉산드리아등을 누비며 전투를 치룬 전형적인 군인이었으나 비교적 원만한 성격으로 후세 사가들이 "건전한 상식인"이란 별명을 붙일 정도의 인물로 원로원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반대파들의 처리도 적절히 하였다. 나는 여기서 언젠가 들어 알고 있는 "견유학파 犬儒學派" 란말을 상당히 정확하게 알게 되었는데 바로 이 베시파시아누스황제 시기에 당시 철학자들이 공화정치를 설파하면서 약간 귀찮게 굴었는데 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황제가 "죽고 싶어 개가 짖어대지만...나는 결코 짖는 개는 죽이지 않는다" 라고 대꾸하여 유머로 상대방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는데 그 이후로 견유학파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이를 보면 참을성과 유머 감각도 상당한 인물로 이라고 작가는 지적하였다. 아무튼 비교적 휼륭한 정치를 하였으며 일찍기 사망한 아내 이외에는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70세가 되어 아들 티투스에게 재위를 순조롭게 이어주며 죽을 때까지 애인 관계인 몇 여성을 제외하고 별다른 여성 편력도 없었다고 한다. 생전에 주변에서 아부를 좋아하는 인물들이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처럼 신격으로 대우 하겠다고 하자 사람은 죽어야 신이 되는데 무슨 신격이냐고 웃어 넘기며 사양하고 죽기 전에 "이제 비로소 신이 되는구나"하는 말을 남겨 죽음 조차도 초연했던 일면목을 보여주기도 한다.
로마에 가게 되면 누구나 가 보게 되는 유적이 베스파시우누스가 건립을 시작한 콜로세움이다. 우리나라 남대문이 국보 1호로 가장 사람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있듯이 콜로세움은 시내에 있는 가장 큰 고대 로마 유적이기 때문에 바티칸궁과 함께 꼭 들르게 된다. 정식 명칭은 암피테아트륨 플라비윰 인데 뒤에 플라비윰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가문 이름으로 베시파시아누스가 세운 반원형이 두개 붙은 즉 원형 경기장 이란 의미이다. 왜 콜로세움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냐면 네로가 그 근처에 거대한 자기 석상을 세우다가 실각되어서 없어졌는데 거대한 상이 옆에 있던 장소라 하여 이렇게 부르다 이런 별명이 붙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정식 명칭보다 별명이 통용되는 상태이다. 3층으로 된 구조물에 1층 기둥은 도릭형식 2층은 이오니아형식 3층은 코린트형식을 이용하여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전형적인 그리스 건축의 기둥 발전 형태를 한눈에 보여 주는 양식인데 최초에는 대리석으로 겉면을 장식하였다 하며 후세에 모두 뜯어가 다른 곳에 사용하여 지금은 그 웅장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또 그 넓은 천정을 당시 해군들이 동원되어 돛을 만드는 천으로 지붕으로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지금 과학자들도 어떻게 덮었을까 상상할 수 도 없다고 한다.
5.티투스 (40~81 재위 79~81)
티투스황제는 아버지 베시파이아누스 로부터 많은 후계자 수업을 받았고 실력도 갖추어 모처럼 로마를 잘 이끌 수 있는 황제로 기대되었으나 연이은 천재 지변으로 2년 남짓한 재위 기간에 고생만 하다 죽은 황제로 기록된다. 처음의 재앙은 남부 지방 베수비오화산의 분화(69년)로 말미암아 폼페이가 화산재로 매몰되었고 뒤 이어 로마의 대화재, 이딸리아 전국의 전염병 창궐등으로 동분 서주하다 아마 과로사가 겹쳐 40세라는 한창 나이게 과로가 겹쳐 사망하게 된다. 베수비오화산 분출은 당시 근처 폼페이 시민들이 적극적인 대피를 하지 않았고 바람의 방향이 화산 분출구에서 시내로 불어 화산재가 시내로 날아와 약 4미터 높이로 쌓였고 다음 날 비가 내려 굳어져 손 쓸 시간도 없이 시 전체가 묻히는 참극으로 이어졌다. 그 동안 지하에서 잠자고 있던 폼페이는 발굴이 진척되어 2천년 전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로마 시대 역사 전시장이 되었는데 워낙 넓은 지역이라 부분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지역은 관광객을 위해 공개되는데 심지어 당시 어린이들이 벽에 낙서한 글 조차도 다시 읽을 수 있었고 내가 두번째 이딸리아에 갔을 때에 들른 폼페이시는 당시의 골목을 그대로 보여주어 퍽 흥미로웠다. 티투스황제는 이런 국가 재난 해결을 위한 분주한 기간에도 아버지가 시작한 콜로세움을 완성하여 많은 시민을 모아 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또 하나 티투스와 관련 된 이야기는 오랜 기간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던 관계로 딸 하나를 두고 아내와 이혼을 했는데 특히 유대 지역에 있던 관계로 유대 왕녀 베레니케를 사랑하여 로마에까지 데리고 와 한 동안 같이 지냈으나 시민들이 유대인이라고 반대하며 비난하자 결혼을 단념하고 황제가 되고 나서도 독신으로 지내다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여성 문제에 순진파에 속하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티투스 황제는 유대 지역에 오래 지냈기 때문에 자연히 유대와 관련된 일이 많은데 당시 알렉산드리아 장관은 친 로마파 인물인 유대인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로를 기용하였다. 이 인물은 로마에 적극 협조하였으며 나중에 로마 수도 경찰청장직에 까지 올랐다. 또 유대 전쟁 초기 적장이었던 젊은 장수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도 티투스와 친구처럼 지내게 되고 로마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이들 모두 티투스 부자가 황제가 되는데 일조를 했다고 하는데 이를 보아도 그들의 성격이 원만했음을 보여준다.
5.도미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도미티아누스 51~96 재위 81~96)
도미티아누스는 티누스의 10세 아래 동생으로 갑자기 형의 죽음으로 황제에 오른 셈인데 비교적 내.외치를 잘하였으며 도나우 북쪽 야만족을 무찌르고 게르마니아 사령관의 반란도 진압하는등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잘 처신하였으나 단지 원로원에 너무 강압적인 관계를 보였다고 한다. 또한 직접 사망의 원인은 미모와 혈통이 출중하고 신망이 높던 시리아 총독이었던 코르불로의 딸 도미티아를 사랑하여 그녀의 남편의 원성을 사면서까지 결혼을 하였으나 전쟁으로 로마에 비운 사이 황후의 부정 행위를 의심하여 한 때 유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도미티아누스의 조카 되는 율리아와 너무 친하게 같이 지내므로 다른 사람들이 내연 관계로 의심을 할 정도였고 역시 황후의 질투를 유발하였는데 자세한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내 도미티아의 노예가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잠든 사이 살해하여 짧은 생애를 마쳤다. 원로원은 황제와 평소 나쁜 감정을 나타내어 사후에 "기록 말살형" 이란 불명예스런 판결을 내려 많은 기록을 파기하여 도미티아누스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졌는데 작가는 과연 원로원의 결정이 타당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고 있다. 아무튼 황제로써 악행이나 문제가 별로 없었으나 그의 죽음은 비극으로 끝난 셈이다. 도미티아누스의 업적으로는 공공 시설을 확충하고 사회 간접자본시설 복구에 힘을 썼으며 게르마니아 지역의 방어를 위해 게르마니아 방벽 구축 작업 시작이다. 이로써 베스파이아누스가 이룬 3대어 걸친 "플라비우스 왕조"는 27년으로 마감 되고 이후부터 로마인이 아닌 지방이나 속주 출신의 황제가 태어나는 시기가 된다.
6.네르바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26~98 재위 96~98)
네르바 황제는 갑자기 발생한 황제의 암살로 70세의 나이로 본의 아니게 제 1인자의 자리에 앉았으며 성격은 원만하고 학식도 풍부하고 신사적인 인물이었으나 고령으로 불과 1년 3 개월이란 짧은 기간 재위에 있었다. 네르바황제의 치세는 워낙 짧아서 별로 언급할 일이 없고 단지 후계자를 파격적으로 예상을 뛰어 넘는 인물인 에스파니아 의 이딸리아카 지방 출신 트라야누스를 선택한 점인데 이는 후세의 사가들이 이 적절한 선택 하나만 가지고도 현명한 황제로 간주하고 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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