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로마인 이야기-7 을 읽고...

깃또리 2004. 8. 15. 15:26

로마인 이야기-7 IMPERATORES MALAE FAMAE

악명 높은 황제들

 

 

중국의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비롯한 갖은 악행을 저질러 동양의 폭군 대명사이고 로마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네로라하면 역시 서양의 폭군으로 알고 있다.

제 7권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뒤를 이어 받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디우스, 네로로 이어지는 2~5 대까지 4 명의 황제들이 대부분 덕행에 비해 악행이 부각되어 "악명높은 황제들"로 불리워 지고 있다.

 

1.티베리우스(티베리우스 클라디우스 네로  B.C.42~A.D.37  재위 14~37 )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혈족 대물림이 여의치 않아 티베리우스가 "제 1인자" 지위를 물려 받았는데 사실 티베리우스는 다른 황제 비해 악덕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으나 성격이 괴팍하여 원로원이나 로마인에게 인기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단지 성격적으로 친화력과 유머 감각이 부족하여 후세사가들이 소위 "테리블 Terible" 이란 수식어를 붙일만한 정도의 인물이나 그러나 그의 로마 제국 운영은 주도 면밀하고 특히 재정 문제는 완벽에 가깝게 관리하였다고 한다.

그의 장점 중에도 인물의 적재 적소 배치와 공명 정대한 인사 원칙을 고수하며 항상 국가 장래와 시민의 입장에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매사에 임했으며 단지 눈 앞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공복의 자세였고 원로원과의 관계도 긴장을 유지하며 대체로 큰 갈등이 없었다.

그리고 치세 자체는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시민이나 원로원 그리고 가족에게는 유쾌함을 주지 못했고 한마디로 인기없는 군주였으며 만년에는 독신으로 지내면서 이딸리아 남부 나폴리를 마주보는 지금은 유명한 휴양지로 알려진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 죽기 전까지 10년 이란 긴 기간을 측근 몇 사람만 데리고 정사를 처리하였다.

이 기간 동안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장례에도 로마로 올라오지 않고 모든 지시와 협조를 서신을 통하여 처리하였으며 죽어서야 로마에 돌아오는 이해하지 못 할 행동을 함으로써 입방아를 찧기 좋아하는 후세 역사 논객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그는 동성애자였다거나 미소년을 데리고 성애를 즐겼다는등 많은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사고 있다.

티베리우스 재위 기간 팔레스타인 지역 이스라엘의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가 A.D.33 년 유대인 제사장으로부터 죽음을 당하게 된다.

작가는 예수에 대해 길게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글을 읽다보면 유일신을 신봉하는 기독교에 대한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하긴 일본인도 다신교를 믿는 민족이고 대부분의 고대사회는 다신교 체제였으며 로마는 유피테르, 헤라, 미네르바, 아폴로, 마르스 같은 주력신을 비롯하여 무려 3 0 만의 다른 신을 모셨으며 신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이해하였으며 심지어 추상적이 개념의 신까지도 인정하였고 황제가 사망하면 별 잘못이 없는 한 신격화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우리 옛 시절에도 부엌신, 뒷간신, 큰 나무인 거수도 신격화 한 것에 비추어 보면 하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로마가 정복한 부족이나 왕국의 신도 존중하였으며 수입 된 외국의 신도 어엿히 로마에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독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은 유일신을 고집하고 선민 의식과 타 민족에 대한 배타심이 강하였다.

예수의 경우에도 유대 제사장들 입장에선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목수 출신의 젊은이가 유대 율법과 다른 방식으로 젊은이들과 군중을 선동하여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하여 죽이기로 결정하고 당시 로마의 장관인 빌라도에게 허락을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로마는 모든 일을 유대 제사장에게 일임하였으나 사형에 대한 경우에는 로마의 장관에게 승인을 받도록 하였는데 이는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빌라도는 가까운 시리아 총독의 지시를 받는 2 급수준의 총독이었고 다시 말해 예수의 죽음은 단지 유대인들 끼리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사실 예수와 관계가 없는 다른 일로 빌라도는  로마의 소환을 받아 유대를 떠났다.

 

 당시 로마인은 수염을 기르지 않고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수염을 길렀는데 예수의 조각이나 그림을 보면 수염을 기르고 그가 끼친 영향이 막강하여 상당한 기간 포교 활동을 하고 나이도 지긋한 것으로 나는 한 동안 알았었다.

본인이 카이로 근무 할 당시 이집트인 직원이 보고 있던 책을 빌려보았다.-The Background of America History

미국의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였고 예수의 내용이 두 페이지 정도 기술 되었는데 활동 기간은 30세 부터 시작하여 33세에 생을 마쳐 불과 3 년이란 짧은 기간이고 나이도 생각보다 적어서 상당히 놀랐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이 건국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실을 객관화 하여 예수를 Good Teacher로 표현한 부분을 읽고 퍽 감명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석가나 공자에 대한 기술도 거의 같은 분량으로 대등한 수준의 비중으로 다룬 것을 보고 적절한 균형 감각에 부러움을  가졌다.

우리의 눈에 비친 로마는 요즘 말로 하면 개방화와 국제화 체제로 제국을 통치하였으며 반대로 유대인은 폐쇄적이고 지나친 특권 의식에 사로 잡힌 민족으로 비쳐지는데 2 천년이 지난 지금도 역시 이스라엘은 별로 달라짐이 없음을 볼 때 작가의 시선이 그리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당시 서방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가 로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카인데 모두 백만 인구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의 마케토니아 황제 알렉산드로스가 제패한 후에 그의 휘하 장군에 의해 창건된 프톨레미오스 왕조의 수도였으나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직할 통치되는 지역으로 그리스나 유대인의 활발한 교역항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30만 이상되는 유대인은 금융, 수공업, 무역업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그리스인과 치열한 상권 경쟁을 벌였는데 역시 종교적인 폐쇄성으로 그리스인과 사사건건 충돌하여 로마가 나서서 중재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의 기본 정신은 인간이 법을 만들고 법에 의한 통치로 만인이 법에 의해 제재를 받는 입장이었으나 유대인은 기본적으로 신이 만든 율법에 의해 제사장에 의해 인간을 다룬다는 정신이었고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은 새로운 도시를 개척하여 번성시키는데 반해 유대인은 사람이 모인 곳을 찾아가 장사를 벌이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로마나 그리스인의 시각에서는 아니꼬운 상대임이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2. 칼리굴라 : (줄리어스 카리사르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A.D.12~41, 재위 37~41)

 

티베리우스는 자식이 없었고 혈통으로도 기반이 약해 옥타비아누스가 두 번째로 상속인으로 정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칼리굴라를 상속인으로 지정하였는데 당시 칼리굴라는 24세의 나이로 황제에 오를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성품도 이에 걸 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와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두었기 때문에 혈통적으로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게르만 전투의 영웅이고 동방에서 급사한 게르마니쿠스는 시민들에게 대단한 우상이었기 때문에 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처음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칼리굴라라는 이름은 처음에 애칭으로 불렸는데 재미 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가정적이어서 아내 아그리피나를 비롯 아들들을 데리고 임지에 부임하였는데 당시 칼리굴라는 세발바기 어린이로 군단병들의 마스코트 였고 병사들이 작은 군화를 만들어 신겼기 때문에 "작은 군화"라는 라틴어 칼리굴라가 그이 애칭이 되었다.

전 황제 티베리우스의 엄숙주의에 불평을 가진 원로원이나 시민들의 호응을 한 때 받았으나 짧은 기간에 로마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대규모 인기 사업을 벌였다.

예를 들면 지금 위치한 바티칸 궁전자리에 대규모 개인 경기장을 만들고 이집트에서 25 미터나 되는 오벨리스크를 통채로 가져오기 위해 운반선을 별도로 만들기도 하였다.

지금 바티칸 궁정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가 바로 칼리굴라가 가져다 세운 것으로 당시는 칼리쿨라의 개인 경기장 자리에 바티칸 궁전이 있는 셈이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데 2천년이 지났지만 로마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자기의 공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전승 노획물을 가져오는 관습이 남아 있어 파리의 개선문에서 상젤리제 거리로 일직선으로 연결된 콩코드 광장 중심에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있고 런던에도 마찬가지로 오벨리스크(일명 Elezabath Needle)가 있으며 미국의 워싱턴엔 링컨 기념관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모조 오벨리스크가 서있으며 터어키 이스탄불에도 로마 시대 가져다 놓은 오벨리스크가 있다.

또 황제 칼리쿨라는 직접 나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까지 건너가 직접 리라를 켜고 노래를 부르는 요즘으로 보면 가수 활동을 하여 원로원을 당혹하게 하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인기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갈수록 재정은 악화되고 자금 마련에 몇 가지 무리한 징세 제도를 창안하여 시행하자 시민들도 눈에 띄게 등을 돌리고 지금까지 걱정의 눈으로 보고있던 당시의 군사력을 가지고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던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코르넬리우스 사비우스 두 사람은 칼리굴라를 살해하고 로마를 제 자리에 돌려 놓기로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긴 후 칼리굴라의 작은 아버지이고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당시에 역사 정리에 매달려 있던 클리디우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한 가지 기억 할 일은 거사를 성공시킨 두 근위대장은 자신들의 사심은 전혀 없어 오로지 국가에 대한 우려로 이 암살을 실행하였으며 거사를 마친 후에는 황제 살해범이란 국사범으로 한 사람은 사형을 받고 한 사람은 자결하는 것으로 생을 마친다.

어쩌면 목숨을 바쳐 국가에 대한 최후의 충성심을 보인 경우라 하겠다.

똑 같은 경우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박정희를 시해하고 사형을 받은 김재규와 어쩌면 비슷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육군대학의 교장으로 재임했던 김재규씨가 시간이 많았을테니 로마사를 읽고 자기도 육신을 바쳐 나라를 위해 거사를 도모해야 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아닌 추측을 해보기도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알아 볼 수는 없지만...

 

3. 클라디우스: (티베리우스 클라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

                       개인 이름    가문이름         황제 호칭                   별칭

                       (B.C.10~ A.D.54   재위 41~54)

갑자기 추대 된 클라디우스는 당시 50세의 나이로 소아마비로 다리도 절고 인물도 별로였으며 로마를 통틀어 유명한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B.C.59~A.D.16)의 문하에서 역사를 공부를하고 역사서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단지 다른 인물과 다르다면 로마인의 가슴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인기있는 장군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란게 어쩌면 그에게 황제 길을 열었다고 한다. 

리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출생과 사망이 비슷한 동시대의 인물로 무려 142권의 방대한 "고대로마 건국역사서"를 썼는데 지금의 로마사 기술에 그의 역서가 대단한 기여를 하고 있으며 작가도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을 티투스에 도움을 받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남다른 역사관을 가진 클라디우스는 4 년간의 흐트러진 로마를 추스려 재정을 바로잡고 공공시설 사업에 힘을 써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항에 새로운 신항을 건설하기고 하였는데 그 때 칼리굴라가 만든 길이가 100 미터에 6층이 되는 초호화선을 방파제 물막이 공사에 사용하기 위해 가라앉혀 작업하였다고 한다.

이는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아산 방조제 공사인가에서 방파제 공사 마지막 단계에 큰 고물배를 가라 앉힌 것과 똑 같은 방법이라서 혹시 정주영씨가 로마사를 읽었는지 궁금해 살아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 심정인데 설마하니 바쁘게 산 정주영씨가 로마사를 읽었을리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2 천년 전에 지금 대단한 발상이라고 생각되는 기발한 착상을 한 당시의 로마인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황제였지만 대규모 사업장에 직접 진두지휘하고 주제하였다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 세번째 아내 메살리나는 당시 60세 클라디우스에 비해 나이도 젊어 23세로 자유분망하여 결국 실권이 있던 노예 출신 비서관 나르키소스가 이를 보다 못해 살해하게 되는데도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도 태연히 공사장에서 자기 할 일만 했다고 한다.

네번째 아내는 게르마니쿠스의 딸 즉 자기 조카인 34세인 아그리피나와 결혼 했는데 아그리피나는 결국 자기 아들 네로를 하루 빨리 황제로 내세우기고 싶어 황제를 독버섯 음식으로 독살하게 되는데 그 때 클라디우스의 나이는  63세였다.

클리디우스의 정치 형태는 비서관을 철저히 이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폐단도 심하였고 원로원과도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23년간의 치적으로는 42년 플리디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앞장 삼아 카이사르 이루었던 브리타니아 지금의 영국에 도버해협을 다시 건너가 론도니움(런던)을 로마의 군단 주둔지로 세우고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불과 16일간의 짧은 체류였지만 학자 출신으로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3. 네로 (네로 클라디우스 카이사르 어거스투스 게르마니쿠스 37~68  재위 54~68)

 

 23세에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음모에 따라 황제가 된 네로는 에스파니야 출신 철학가이자 비극작가이며 변호사 직업을 가진 세네카의 가정교사 교육을 받아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쌓았으며 초기 정치는 주변 휼륭한 인물들의 조언을 받아 대체로 무리 없이 수행하였다.

그러나 세네카가 고령으로 은퇴하고 네로가 점점 포악해지는 시기부터 그의 악정과 황금궁전을 짓는등 사치가 심해졌는데 특히 사사건건 간섭하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권력 다툼을 벌려 결국 아그리피나를 죽이고 아내 옥타비아도 이혼한 후 살해하기도 하는 만행을 저지렀다.

로마시내의 반 이상이 화재로 불타게 되는데 후세의 사가들 중에는 네로의 소행으로 보는 사람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고 네로는 이를 기독교도들의 소행이라고 몰아 대학살을 감행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몇 가지 호칭으로 불리워 졌는데 그 중하나 임페라토르는 지금의 Emperior 인데 처음 부터 지금 우리가 말하는황제의 의미가 아니고 단지 군대에서 "최고사령관" 이란 의미이고 ...

프린켑스는 "제 1인자"로 원로원에서 가장 우두머리 라는 의미이니 의장 정도 되는 직위이고집정관 자리를 겸하는데 콘술이라 하는데 지금은 영사로 불리워지지만 임기 1년의 원로원 대표이며...

종신직인 최고 제사장 자리도 겸하는게 보통이었다고 한다.

 원로원이나 시민, 근위병들에게 점점 멀어지게 되고 에스파니아 군단병들이 움직이고 갈바가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음을 알고 로마 근교 농가에 피신해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국 시체도 누가 수습하지 않아 그를 키웠던 유모가 거두어 묻었기 때문에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들은 사후 황제묘에 매장되고 악정이나 내란에 의해 피살 된  황제의 시신은 경우에 따라 테베레 강에 버려지기도 했는데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암살의 소용돌이 속에 부랴부랴 화장하였는데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재를 수습할 겨를이 없이 빗물에 흘러가 테베레 강으로 갔을거라고 한다.

결국 카이사르의 묘도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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