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6 PAX ROMANA
팍스 로마나 (평화의 로마)
B.C.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세력을 제패하고 이집트를 황제 직속령으로 삼는 것으로 일단락을 짓고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자기 자신의 안위나 영토 확장보다도 로마 제국의 평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의 개인적 희망보다는 오랜 기간 내전과 외적을 물리치는데 지친 로마인 가슴에 자리 잡은 희망이기도 하였다.
이런 공감대에 부응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의 정책은 평화의 로마를 지향하여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를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지금도 로마 시대의 표현을 빌려 팍스 아메라카나 (Pax Americana) 라는 말을 가끔 쓰고 있는데 그러고 보면 현재 미국은 전 세계 각국에 행사하는 영향력으로 볼 때 제국임에 틀림이 없고 아메리카를 주축으로한 세계 평화를 부르짖을만 하다.
그러나 실권을 쥐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제일 먼저 원로원을 자극하거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정책을 구사하여 조심스럽게 자기가 뜻 한바를 이루었는데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성격적으로 카이사르와 다르기도 했을 뿐더러 비명 횡사한 자기를 후계자로 선택한 카이사르와 같은 전철을 두 번 다시 밟지 않으려는 강박 관념이 부지 불식간에 자리 잡아 이렇게 치밀하고 조심스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대외 정책에서 영토 확장 보다는 영토 보전으로 정치 체제도 공화정을 따르고 원로원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급격한 변화보다는 완만한 변화를 꾀하여 의심을 사지 않는 처신을 취했으나 내실면에서는 왕정을 향하여 차츰 차츰 나아갔다고 한다.
이 시점에 원로원도 더 이상의 피바람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격한 행동을 삼가하며 로마의 위기 상태에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전권을 주어 신속하고 일치된 힘을 발휘하도록 하였으며 더 이상의 혼란을 원치 않았다.
원래 체질도 강건하지 못하고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일도 없었으며 전략 개념도 부족한 옥타비아누스는 선견 지명이 있는 카이사르가 미리 협조자로 내정한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를 좌우 날개로 삼아 대외 전쟁은 아그리파에게 담당시키고 내치의 보좌역으로는 마이케나스를 축으로 삼아 하나 하나 자기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여기 나타나는 마이케나스는 특히 예술가 집단의 강력한 후원자로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와 같은 이들이 바로 이 시기에 마이케나스의 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여 라틴 문학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현재는 개인이나 기업이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문화 사업으로 라틴 이름인 Maecenase 에서 유래되어 프랑스어로 'Mecenat'가 되었고 우리가 메세나 또는 메세나 운동이라고 용어의 기원이 되었다.
당시 로마의 결혼 제도는 상류층에서 이혼과 재혼 그리고 정략 결혼이 다반사여서 부모의 지시에 의한 아들, 딸들의 이혼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실력자의 강요에 의해서 이혼을 해야만 하는 지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도 당시 독제관 술라의 지시로 이혼을 강요 당하자 로도스 섬으로 도피 한적이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처에서 난 딸 율리아를 자기 누이 옥타비아의 아들인 즉 율리아의 고모 아들이고 이종 사촌에게 시집을 보냈으나 일찍 병사하자 다시 자기 나이 또래인 자기의 오른 팔격인 아그리파를 이혼하게 하고 자기 딸과 결혼 시켰으며 아그리파가 죽자 다시 자기의 둘째 부인이 데리고 온 전 남편 소생인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와 결혼을 시킨다.
그러나 율리아는 세번째 남편인 티베리우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티베리우스는 장인으로 부터 받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로도스 섬에 가버림으로 자연히 율리아와 결별하게 되고 이 사태의 상당부분이 율리아의 성적으로 방종이 동기가 된것이다.
결국 율리아의 탈선을 보다 못한 옥타비아누스는 딸 율리아를 외딴 섬에 종신 유배시키고 율리아는 나이가 들어 이섬 가까운 도시에 나와 있다가 생을 마친다. 이 사건에 관련 된 남자들은 대부분 추방 당하고 한 사람은 사형이 내려지는데 사형 당하기 전에 자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문제의 남자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로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가 한 때 안토니아와 살았는데 안토니우스의 전처 풀비아 소생이므로 옥타비아의 의붓 아들인 셈이고 안토니우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가 데려다 애지 중지하며 키운 조카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율리우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카 사위도 되어 옥타비아누스의 분노는 더 컷으리라 짐작된다.
아무튼 근친혼과 정략 결혼이 성행하다 보니 여러 문제점도 발생하고 로마 사회가 성적 방종의 문제로 시끄러워 지자 일찌기 율리아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옥타비아누스는 2 개의 법을 제정하였는데 그 하나는 "간통및 혼회 정사에 관한 율리우스 법"이고 다른 하나는 "정식 혼인에 관한 율리우스 법"이다.
이 법의 제정으로 이혼은 국가에 신고와 허락을 받아야 성립이 되었고 간통에 대한 처벌도 강화되었다고 하나 예나 지금이나 법으로 모든게 일시에 변하지는 않는 일이어서 이 문제는 후에도 간단히 개선되지 않았다고 한다.
율리아 추문은 바로 이 법 제정 후에 발생하였으나 황제인 옥타비아누스는 일단 법을 떠나 가부장 권한으로 율리아 문제를 처리하였다.
-고대 사회는 동서를 막론하고 가부장 권한이 상당하였던 점을 여기서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옥타비아누스도 과거에 전처를 버리고 아들이 둘이나 되는 리비아라는 유부녀를 사랑하여 남편과 이혼하도록하고 자기와 결혼을 하였는데 이 사건을 제외하고 카이사르와는 달리 별다른 여성 편력이 없이 리비아와 평생을 함께 한점이 특이하다.
사실 옥타이아누스는 선천적으로 약한 몸에도 당시로는 장수에 해당하는 77세까지 수를 누렸으며 죽을 때까지 차근 차근 권력 기반을 확대하여 로마 최초의 황제로 인정되고 있으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원수정에 가까운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가족 내부적으로는 율리아를 비롯하여 불행한 일이 많았던 편이다.
한편 로도스 섬에 자진 은퇴했던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아그리파를 대신하여 갈리아전선에서 게르만 토벌 전쟁에서 탁월한 공적을 쌓아 후계자를 혈족에서 이을 만한 인물이 없는 상태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결국 의붓 아들인 티베리우스를 그의 상속자로 삼는다는 유언장을 남기게 되어 결과적으로 티베리우스는 제 2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때는 예수가 태어난지 14년 즉, 기원후 14년 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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