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조선, 1894년 여름>을 읽고…

깃또리 2020. 9. 30. 15:48

<조선, 1894년 여름>을 읽고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Korea-Eine Sommerreise nach dem Landa der Morgenruhe 1894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지음/정현구 옮김/한철호 감수

2020. 09. 11.

 

  저자는 유럽 오스트리아 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글을 쓰고 세계 여러 나라를 찾아다닌 여행가이다..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튀니지, 북아메리카의 캐나다,나다, 미국과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와 서인도제도 그리고 아시아의 중국, 태국, 인도, 일본과 조선을 여행하였다. 특히 미국에서는 1876년 뉴멕시코와 로키산맥을 거쳐 동부로 갔다 미시시피 강을 탐사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40 1894년 여름 일본에서 독일 선장의 증기선을 타고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대마도에 잠시 기항했다가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에 도착하여 조선 여행을 시작하였다. 1800년 대 말은 조선왕조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지고 특히 1894 나라 안밖으로 큰 사건이 많이 일어난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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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갑오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 시작.

328/ 김옥균 상하이에서 암살당함..

65/ 일본군 선발대 약 500명이 조선 주재 일본공사와 함께 동학군 토벌 구실로 요코스카 항 출발.

612/ 일본군 제물포 도착.

723/ 일본군 경복궁 점령.

725/ 청일전쟁 발발.

81/ 청일 전쟁 공식 선포.

727/ 갑오개혁 단행.

1210/ 동학군 패배로 동학군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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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험난한 시기에 단지 여행을 목적으로 목숨을 걸고 조선 땅을 밟은 바르텍은 타고난 낙천가이자 모험가라는 생각이 든다. 136년이 흐른 지금 빠르고도 편리한 항공기에 자동차, 곳곳에 안락한 호텔 그리고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 무엇이든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를 받는 세상이지만 나는 올 1월과 2월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스페인 자동차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런저런 걱정으로 노심초사하였었다. 바르텍은 당시 비교적 안전하고 안락한 일본에 체류하다 부산에 도착하여 조선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실망과 측은한 생각을 한다. 사실 바르텍의 글을 읽어 보면 그는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동양, 특히 동아시아 관련 책과 자료를 많이 읽고 일본 체류 시에도 조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어로 쓰인 책과 자료를 다수 번역하여 읽었던듯하다.

 

그가 언급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코리아: 은둔의 나라 Corea: The Hermit Nation, 뉴욕 1882>, 달레(Claude Charles Dallet)<조선 천주교회사, Historire de I' Eglies de Corie'e, 파리 1874>가 책에 자주 인용된다. 그 외에도 여러 자료를 섭렵하여 당시 조선의 고대 역사,, 고려왕조, 조선왕조, 조선의 지리, 풍토, 기후, 민속신앙 등 다양한 방면의 지식들을 알고 조선 땅을 밟았다. 그러나 막상 조선에 들어와 직접 보고 놀라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바르텍의 눈에 비친 조선인은 체구가 일본 사람이나 중국인보다 월등히 크고 튼튼하고 식성이 엄청나 종족이 다르다며 타타르족이 아닌가 하였다. 반면 조선사람은 대부분 게으르고, 지저분하며, 특히 남자들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여자들은 존재가 미약하지만 하루 종일 움직이며 부지런히 일한다 하였다. 서민들이 일하지 않는 이유는 어차피 일해서 돈을 벌어도 탐관오리들이 갖은 수단으로 빼앗아 가기 때문이고 산업이 발달하지 않아 할 일도 없다 하였다. 심지어 당시 일부 조선 사람들은 수탈하는 조선 정부보다 일본 사람 밑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였다. 일본은 얼마 전까지 조선으로부터 물질문명을 배워 갔으나 조금 일찍 외국 특히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여 봉건시대를 벗어나 산업화를 시작하고 있지만 조선왕조는 쇄국으로 문을 걸어 잠가 아프리카 오지 부족과 다름없다 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불과 136년 전이며 내가 태어나기 66년 전으로,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종족보다 낙후되고 몽매하였던 처지에서 오늘과 같이 모든 영역에서 세계 10~20위 권을 오르내리는 선진국 대열에 든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고 기쁘다.

 

이런 관점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독재자라 폄하하고 역사에서 지우려 하지만 대한민국을 부곡의 길로 이끌고 지금 우리의 자유경제기반을 구축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 이 혼돈스럽고 허위의 시대가 언젠가 지나가면 불편부당한 역사가들의 엄정하고 객관적인 평가와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지금 위정자들은 눈 앞의 잔꾀에서 벗어나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두려워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쓰다 보니 옆길로 한 참 벗어났는데 당시 이 비참한 나라의 실상을 바라보면서도 저자는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좋은 나라가 될듯하다는 의견과 앞 날의 발전을 예견하는 대목은 과연 그의 혜안에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하고 싶다. 책은 머리말과 총 31장으로 나뉘었으며 간추려 보기로 한다.

 

* 머리말

 

원래 조선여행 계획은 북에서 남쪽으로 종단하려 했으나 남부지방 봉기(갑오농민항쟁)로 차질이 생겨 부산을 거쳐 제물포, 서울로 한정되었다 한다. "조선은 중국의 축소판이 아니라 17세기 명나라 시절에 갇혀 있다"라 하였다. 예리한 관찰과 판단이라는 생각이다.

 

1. 조선으로

 

증기선에서 바라본 조선을 "황량하다 못해 슬픈 느낌이 드는 해안을 따라 수 킬로미터를 올라가는 동안 작은 마을은 물론 오두막 잔해도 보이지 않았다. 낙원과 같은 일본과 비교할 때 너무나 대조적인 풍경이다!"라 하며, 부산에 들어오면서,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다섯 개의 바위를 가리키는 선장의 몸짓" 글이 나온다. 부산 앞바다의 오륙도 이야기이다.

 

2. 부산

 

"조선의 왕은 부산을 일본에 양도하였다."라는 문구는 부산 일부 지역을 일본에 조차한 일을 말하는 것이고 일본 증기선이 한 달에 두 번,, 러시아 증기선은 한 달에 한 번 부산에 들어온다 하였다. 부산엔 쓰시마와 규슈에서 건너온 약 5천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다 하였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이다.

 

3. 지방도시

 

증기선이 부산에 며칠 머무는 동안에 조랑말을 타고 동래와 낙동강가를 가면서 "거리는 좁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지저분하다."라 하며 이 책에 "도둑이나 다름없는 관료 일당", "합법적인 도둑 소굴", "도처의 탐관오리들"란 말이 수 없이 나온다. 하기야 그래서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조선이 망했을 것이다.

 

4. 황해를 지나

 

증기선을 타고 낙동강 하구를 지나면서 우리나라의 수많은 배를 보았다 하며 이를'정크선'이라 불렀다. 제주도는 켈파트(네덜란드 항해사 이름)라 부르고 영국인들은 오클랜드로 지도에 표시했다 하였다. 제주도의 수려한 풍광과 지리, 기후, 탐라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조선 사람들이 많이 쓰는 기이한 모자인 갓을 만드는 말총이 많이 생산된다는 내용조차 적었다. 다도해 남해를 지나면서 일본 해군 함대와 청어 떼를 만난 일도 기록하였다.

 

5. 제물포

 

'고요한 아침의 나라', '고려', '코리아'로 부르는 유래를 적고 원래 서울의 외항은 은 4.8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하였다. 제물포를 일본이 개발했으나 모든 건물과 시설이 유럽의 근대 항구 도시여서 저자는 깜짝 놀랐다 한다. 제물포의 인구는 약 1만 명으로 중국, 일본, 조선인 사이에 영국, 독일, 미국, 러시아, 프랑스, 덴마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포르투갈인 모두 32명의 서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하였다. 강화라는 섬은 '강의 꽃'이라는 의미라 했으나 이는 강화(江華)의 발음이 강화(江花)와 같아서 잘못 알고 적은듯하다. 영국인들은 Rose island로 표기한다 했다는데 이래저래 꽃으로 알려진듯하다.

 

6. 한강에서

 

제물포에서 서울이 불과 30 마일이지만 아직 도로다운 길이 없고 '도로가 생기려고 한다.'라 했다. 아마 일본 사람들이 경인국도를 계획하고 있던 사실을 이야기하는듯하다.. 그래서 그는 "멕시코에서도 이보다 더 나쁜 도로를 보지 못했다."라 적었다. 중국의 인력거나 일본의 '리키샤'가 조선의 조랑말, 가마보다 더 좋은 사람 운송수단이라 하였다. 조랑말 하루 빌리는데 2만 량(3,5 달러), 말 몰이꾼에게 5~6천 량을 주어야 한다 했다. 당시 조선의 인플레이션을 짐작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조랑말 옆구리에 엽전을 담은 커다란 자루를 매달았다 한다. 저자는 빈약한 조랑말을 보고 차라리 증기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러나 증기선 운행도 쉽지 않아 도중에 모래톱에 걸려 하룻밤을 움직이지 못하다 운행하였고 이 시기에 일본 해군 증기선 여러 척이 한강을 오르내리는 걸 보았다 한다.

 

7. 강화에서 서울로

 

제물포에서 출발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오면서 당시 섬이던 월미도와 강화도를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이야기를 적었다. 특히 강화도가 고려시대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피난지라던가 외국 함대를 물리치기 위한 해안 진지, 즉 초지진, 덕진진 등 명칭은 밝히지 않았지만 당시는 무용지물로 버려진 진지 모습을 증기선 갑판에서 바라보며 글을 적었다.

 

8. 서울 수도

 

증기선은 '용산' 부두에 닿아 얼마를 지나 '중국식 이층 지붕이 높이 달린 커다란 석조문'을 지나 서울에 들어왔다 했다. 남대문(숭례문)을 말한 것이며 친분이 있는 외교관 집에 머물렀다 한다. '서울은 아마도 호텔이나 찻집, 그 밖의 유럽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를 볼 수 없는 지구 상에서 유일한 수도이자 왕이 거주지일 것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당시 일본과 비교하여 너무나 초라한 서울을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또한 서울 성곽 안을 잠시 둘러보고 독일 슈투트가르트와 가장 비슷한 지형이지만 '서울의 집들은 단순하고 황량한 황무지와 다름없다.' 하였다. 남산에 올라 당시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명동 성당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25만 명가량의 도시 인구가 사는 곳에서 5만 여채의 초가집과 대비되어 최신식 아름다운 건물이 대비되어 기묘한 느낌이다.' 당시 불과 10년 전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했으나 명동성당이 6년 전인 1898년 준공된 일은 저자에게도 격세지감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보고 적은 내용들은 무척 흥미롭지만 한편 불과 136년 전 우리들의 이야기로 슬프기도 하다.

 

9. 왕과 조정

 

당시 고종(재위 1863~1907)을 비교적 현명한 군주로 기술하였으나 민씨 외척과 대원군 그리고 부패한 대신들과 관리의 잘못으로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다 보았다. 더욱 궁중 고급 관리부터 시골 하급관리들 모두 부패하여 손을 쓸 수 없다 하였다. '넓은 지구 상에서 조선의 백성이 가난하고 불행한 반면, 지배층은 거짓되고 범죄적인 집단으로 아마도 이 세상에 다른 곳은 없다.'란 통렬한 문장이 나오기도 한다.

 

10. 왕비와 황실

 

유럽의 독일 궁정 달력에 일반인의 상식과 흥미를 높이기 위해 세계 이곳저곳 풍습이나 역사 등을 덧붙였다 한다. 독일 고타 궁정 달력에 '조선의 왕 이희(1851~1864)는 철종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양반가인 민씨 가문에서 1850929일 태어난 딸과 결혼했다.'란 내용이 있다 했다. 비교적 정확하고 상세한 조선의 역사기록이 머나먼 유럽의 작은 도시 달력에 나왔던 셈이다.

 

11. 조선 왕의 장례식

 

왕과 왕족 그리고 일반 서민들의 장례식 모습을 유럽인 시각에서 기술하였다.

 

12. 중국 황제의 사신단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라 하였으나 중국은 자신들의 봉신국이라 하였는데 저자는 여러 정황으로 200년 이상 중국에 공물을 바쳤으니 봉신국이라 하였다. 아울러 조선 궁정에서 일어나는 조금이라도 큰 일은 언제나 중국에 알리고 허락을 받은 사실을 길게 적고 중국 사신단이 조선에 들어올 때 머물 때, 그리고 떠날 때 조선 궁정에서 어떻게 하였는가를 역시 세세하게 적었다. 18세기 후반에 터키가 유럽 비엔나에 사신단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하며 조선이 이와 비슷하다 했다.

 

13. 규율 없는 군대

 

세계의 아주 이상한 군대를 다 알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조선의 군대는 가장 기이하다 했다. 말로만 군대라 했다.

 

14. 정치 사회적 상황

 

후궁과 내시들을 '기생충'으로 묘사하였고 망국의 길로 치닫는 조선과 한 페이지 반 정도 되는'동학혁명 선언서'를 입수하여 게재하였다. 나는 두 번 읽었다. 임금에 대한 불만은 없고 단지 신하들과 탐관오리에 대한 분노 내용이다.

 

"우리들은 그대들을 위해 싸울 것이며 그대들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대들의 행운을 빈다. 임금께서 만수무강하시길!" 선언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대들'이란 조정 대신을 말할 것이다. 조선말로 된 선언문이라 하니 옛 한글 문장을 독일말로, 영어로 다시 최근 우리말로 고쳐 적은 것 같다.

 

15. 조선의 오락

 

음악과 카드놀이, 야외놀이, 권투, 씨름, 연날리기, 활쏘기를 들었고 조선사람들은 직접 하지는 않지만 춤을 매우 좋아한다 하였다.

 

16. 조선의 경축일

 

일요일 개념은 없으나 다양한 국가 경축일과 종교적 경축일로 대체한다고 적었다. 이 장에서 1880년 출판된 조선에 관한 유일한 책으로 미국인 퍼시벨 로웰이 쓴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사람들 The Chosun, The Land of Morning Calm,1885>을 몇 번 언급하였다.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역시 가난하고 폐쇄된 조선을 외국인이 보았으 로웰은 조금 안타깝고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으나 독일인 저자 바르텍은 남루하고 한심한 나라로 조선을 기술하였다. 조금 너그럽고 관대한 미국인과 차갑고 실용적인 독일인에서 나타난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17. 서울 산책

 

서울은 프랑스 파리와 같이 조선의 모든 중심지이지만 거리다운 곳도 없고 무질서한 초가집이 모인 곳이라 하였다. 단 두 곳이 활기찬 곳인데 종이 매달린 곳이라 했으니 종로를 말하며 다른 한 곳은 경복궁 앞 거리인듯하다. 우편제도가 갑신정변으로 며칠 만에 중단된 일을 포함하여 우표 발행에 대하여 정확하고 세세한 내용으로 많은 분량으로 기술하였다. , "조선의 우표는 1882년 나온 것으로 당시 개화당이 유럽식 모델을 본떠 우편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했을 때였다. 당시 정부는 아름다운 우표를 인쇄하도록 했고 첫 이틀 동안 47통의 편지가 조선의 우체국을 통해 배달되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연회 자리에서 암살당하면서 우편제도는 종말을 맞았다.(갑신정변) 그러나 남은 우표는 제물포에 있던 어떤 투기적인 유럽 회사에 몽땅 팔렸고 비싼 금액에 우표수집가에게 넘겨졌으니 대단히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앨범에 들어간 두 종류 우표 외에 다른 세 종류 우표도 완성되었지만 실제로 사용된 적은 없다. 빨간색과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보라색 등 아름다운 색으로 화려하게 인쇄된 이 우표는 중앙에 조선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한 동안 우표수집을 하여 저자가 말한 구한국 우표 다섯 장도 가지고 있다. 기술 내용은 사실에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자세하여 저자도 우표수집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18. 여성들의 삶

 

조선의 여성들은 이슬람교도 여성과 마찬가지라 하였으며 어릴 때 이름도 어른이 되면 쓰지 않고 누구 어머니, 누구의 처 또는 어느 지역의 여자라 불린다 하였다. 그러나 항상 부지런하고 바르텍의 기준에서 몸매와 얼굴이 균형 잡히고 하얀 피부에 날씬하다고 칭찬하였다. 중국, 일본 여성보다 아름답다 하였다. 바르텍의 눈이 무척 예리하다 생각한다.

 

19. 교육제도와 지리인식

 

중국이 아닌 다른 민족을 이웃으로 두었다면 조선인의 기본 교양과 교육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개인적 의견을 피력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문물을 전해 받았으나 일찍 중국과 결별하고 외국에 개방하여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하였다.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는 세계지도를 한 페이지에 소개하였다. 둥근 원 안에 95개의 나라를 그리고 번호를 매기는 방법이다. 예를 들자면,33. 일본/ 74. 숙신(만주)/ 80. 중화(중국)/ 81. 안남/ 82. 점증하는 야만(인도)/ 83. 요정의 나라(규슈)/ 84. 서쪽 지방(아프리카) 등 비교적 가까운 나라는 어느 정도 면적을 가진 규모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나라들은 대부분 직사각형으로 표시하고 일부는 원형이다. 영어를 모르는 일반인에게 영어로 표기할 수도 없고 아직 한글로 표기할 나라 이름도 정해지지 않다 보니 퍽 우스꽝스러운 호칭을 붙. 예를 들자면, 2. 하얀민족(영국)/ 7. 미술가(프랑스)/ 38. 검은 발(북 아메리카 인디언?)/ 68. 경멸스러운 민족(캘리포니아 지역 해당)/)/ 72. 내장이 없는(아메리카?)/ 78. 커다란 민족(러시아) 그리고 조선은 79번이다. 아마 당시 유럽의 세계지도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만들었던 지도 생각이 든다. 몇 년 전부터 유럽인 교사들로 구성된 영어학교가 설립되고 영어로 수업하고 교장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육군 대령인 닌스텐이며 55년 제로 학생 수가 해마다 늘고 있다 하였다. 저자는 직접 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가능성이 많다 하며 바릍택이 만났던 한 번도 조선을 떠나지 않은 조선인이 영어를 잘 구사하고 특히 영어 RL 발음을 구별할 줄 알아서 놀랐다는 말도 덧붙였다. 극동의 세나라 사람 중에 한국 사람의 영어 발음이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당시에도 입증한 셈이다.

 

20. 종교관

 

조선의 종교는 대중의 종교라 할 수 있는 불교, 유교 그리고 이교도적인 귀신에 대한 공포로 기묘하게 뒤섞여 있다 하였다. 궁중 왕조 수호신에 해당하는 사직과 조상신을 받드는 종묘 제례, 민간인의 장례절차, 제사, 기우제 등을 직접 보고 적었으며 불교 사찰,, 승려 등도 기술하였다. 그러나 당시 비구니 사찰은 난잡 과 품행이 음란한 소굴의 온상인 경우가 많다 했는데 어느 나라라도 쇠퇴기에는 종교도 제 역할을 못하고 부패하여 몰락 과정을 밟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21. 조선의 치료약과 병자 간호

 

이 부분에서도 백성들이 무지하고, 게으르고, 미신을 신봉하고 이방인을 꺼리는 것은 조정 대신과 관료들 탓이라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비참한 조선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인들의 내면에는 아주 훌륭한 본성이 들어있다. 진정성이 있고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이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만한 것을 이루어 낼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이웃인 잽싸고 기민한 일본인들처럼 빠르게 진행되지 않더라도 한때 이들의 군주국이었던 중국보다는 훨씬 빠를 것이다."

세계 살기 좋은 나라 17위에 오른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136년 전 바르텍의 눈과 예견은 탁월을 넘어 전율을 느낄 정도이다. (물론 세계 행복 지수는 아직도 중간 정도밖에 안 되는 61위 이지만,)

최초의 외국인 의사는 미국인 알렌 박사로 미국 공사관 일원이었으며 직접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특히 갑신정변 당시 중상을 입은 대신(민영익)을 치료하여 건강을 되찾은 일도 적었다. 명의로 소문이 나자 어떤 조선인이 시계를 가지고 와서 고쳐 달라는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알렌의 명성이 높아져 한국 최초 서양 병원인광혜원 설립이 이루어졌는데 이 책에는 나오지 않았다. 서양의사가 조선 전국에 여섯 명 정도라 하였다.

 

22. 장례의식과 조상숭배

 

장례의식과 조상숭배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기묘하고 미신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다.

 

23. 재판절차, 감옥 그리고 고문

 

허술하고 비합리적인 재판절차와 감옥 그리고 대역죄인 처벌을 설명하며 개혁파 주모자 김옥균이 일본에 피신했다가 상하이로 도망갔으나 이를 추적 살해하여 그 시신을 서울에서 여섯 토막으로 잘라 각 지방으로 보냈다는 내용을 적었다.

 

24. 조선의 독특한 전통

 

조선인의 본관, 성씨, 이름, 호 등 복잡한 호칭과 장유유서를 비롯한 삼강오륜 그리고 조선사람의 시간 단위, 도량형 등을 소개하였다.

 

25. 조선의 유럽인

 

당시 10년 전 부산, 제물포, 원산 33개 항을 개방하여 당시 조선에 영국인 24, 독일 19, 미국 13, 러시아 7, 프랑스 4, 네덜란드 3, 이탈리아 2, 포르투갈 1명으로 모두 83명이 있고 외교단과 영사단 모두 14명이 서울에 주거하고 있다 하였다. 당시의 국제 질서와 조선에 대한 각국의 영향력을 가늠해 볼 내용이다. 특히 영국인과 독일인이 가장 많은 게 의외이다. 당시 영국과 독일이 조선이나 중국 등에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

 

26. 제물포 나들이

 

나들이는 아니고 일본으로 가기 위해 다시 증기선을 타려고 제물포에 들린 이야기이다. 원래 북에서 남, 서울에서 여러 지방을 여행하려던 계획 대신 일찍 마치게 되어 아쉽다 하였다. 만일 원래 계획대로 여행을 했더라면 훨씬 더 자세하고 당시 조선의 곳곳을 외국인의 시각으로 관찰하고 판단한 내용을 오늘날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제물포에서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의 시모노세키로 간다 하였다. 서울서 제물포로 가는 길은 증기선 대신 여윈 말을 타고 갔으며 도중에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부평에서 잠시 휴식하였다. 조선에 자동차가 없고 조랑말, 노새, 당나귀, 가마가 유일한 사람 운송수단이고 그러나 서울에서 평양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하는데 아마 아마 일본인은 가능성이 희박하고 외국인일 텐데 유럽인보다 탐험정신이 강한 어느 미국인이 아닐까 한다.

 

27. 조선 팔도

 

조선 팔도의 가옥수, 잠정 인구수, 관할 도시 수, 수도 등을 표시한 도표가 나오는데 다른 곳은 지금과 같으나 충정도는 대전이 아니고 공주, 전라도도 나주가 아닌 전주가 수도로 나온.

 

28. 산업

 

조선인은 한때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지고 있어 이웃나라 사람보다 훨씬 앞에 있었다 말하며 12세기 서적 인쇄본을 가지고 있어 유럽의 인쇄 발명보다100년이나 앞서 있었다 했다. 또한 종이 생산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고 직접 한지 제조과정을 지켜보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업다운 산업은 전무하다 하였다.

 

29. 토산품

 

"동아시아에 자연산물이 조선보다 풍부하고 비옥한 나라는 없다."란 문장이 나오며 풍부한 광물자원을 열거하고 스페인 북부와 비슷한 기후 그리고 목화 이야기를 하며 심지어 문익점 선생 이름은 나오자 않지만 어느 조선의 중국 사신이 몰래 붓대에 씨앗을 숨겨 온 이야기도 적었다.

 

30. 러시아의 관심과 원산

 

부동항을 얻기 위해 조선의 원산항에 대한 러시아의 욕심을 길게 적었다.

 

31. 조선의 대외 교역

 

조선의 세관 관리는 중국이 맡고 있으나 책임자는 유럽인으로 탁월한 능력이 있다 하였다. 교역량은 멕시코 달러로 표시되었다는 내용에 왜 미국 달러나 다른 나라 화폐가 아닌가 궁금하다. 1884~1893년 즉 10년 간의 수입, 수출, 대비율이 나오는 표를 게재하고 수송은 정크선, 증기선, 이양선으로 구분까지 하였다. 끝으로 바르텍은 이런 귀중하고 탁월한 의견을 덧붙였다.

 

"동아시아 열강들 사이의 경쟁심이 이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가 앞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작고 힘없는 조선에 서방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자기들의 욕심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동정하는 고맙고 아름다운 글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책 첫 부분에 대부분 조선의 비참한 모습과 낙후된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았으나 후반 들어 동정과 희망으로 이야기하여 과연 식견이 높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처럼 즐겁고 유익한 책 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