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酩酊四十年>을 다시 읽고...

깃또리 2020. 8. 28. 16:29

<酩酊四十年>을 다시 읽고...

변영로 지음

범우문고

 

 

 

  지난 70, 80년대 문고본이라 하여 여러 출판사에서 소책자를 발행하여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학생이나 직장 초년생들이 쉽게 구입하여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서가를 몇 차례 정리하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폐지로 내다 버리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주어 버린 상황을 용케도 모면하고 아직 몇 권의 문고본이 서가에서 이젠 제법 연조를 자랑하며 귀한 대접을 받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책 수주 변영로의 <酩酊 四十 年>이다. 뒷장을 열어보니 1977년 초판, 19862, 19881127. 群山에서 東旭 이라고 적힌걸 보니 어언 세월이 22년이 흐르고 다시 읽은 셈이다. 이제 기억도 희미하여 140여 페이지 중에서 오직 북한산 기슭에서 변영로 선생이 친구들과 대낮에 술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었을 즈음 비가 내리자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입었던 옷을 다 벗어 버리고 옆에 매어둔 남의 소의 등에 올라 시내로 내려오다 경관에 붙잡힌 일만 기억에 남았다.

 

  수주 변영로의 약력을 살펴보면 그는 1898년 현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수주(樹州). 아버지 정상(鼎相)과 어머니 강재경(姜在卿)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재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 졸업을 앞두고 퇴학당했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을 6개월 만에 수료하고 1918년 모교인 중앙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며, 이때 명예졸업생으로 졸업했다. 1919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맡았고, 1920년에는 폐허의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으며 1920년대 감상적이며 병적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에 중점을 두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영문학과 조선 문학을 강의했으며,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했다.

 

1933년 귀국해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주간, 〈신동아편집장 등을 역임했으며, 문우 회관(文友會館)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했다가 1955불감(不感)과 부동심(不動心)〉이 '선성모독이라는 필화사건으로 사직했다.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1953년에 이 책 <酩酊 四十 年>을 출간하였으며 1961년 인후암으로 63세의 나이에 타계하였다. 그의 형은 한학자이며 법률가인 변영만이고 둘째 형은 변영태로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로 그에 대한 일화가 두 가지 생각난다. 첫째는 그의 청렴성에 대한 이야기로 외무부 장관 시절 외국 출장 후에 얼마 되지 않은 남은 출장비를 반납하여 그 당시 어려운 나라 살림에 공직자로써 수범을 보인 일과 아령을 좋아하여 어디를 가나 출장길에 가방에 아령을 넣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오래되었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수주 변영로선생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가 쓴 시 <논개>이다.

아 강낭콩으로 시작하는 이 시가 중학교 시절인가 교과서에 실려 아마 내게는 퍽 강한 인상을 심었던 같아 지금도 애송하며 특히 시에 나오는 아리따운 그 아미에서 아름다운 눈썹이라는 시인이 만든 조어는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로 기억된다. 나는 이 책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을 숨길 수 없다. 첫째가 변영로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술을 마셨으며 그 사실이 책에 여러 번 나오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술을 마시는 시간과 술에 취한 무수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언제 공부하여 어려운 시기에 영문학과 많은 지식을 쌓아 교수가 되고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까지 할 수 있었는지? 둘째로는 물론 책을 읽다 보면 술값이 없어 별 수를 다 쓰기도 하고 봉변도 수없이 당했다고 하지만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였는지? 셋째로는 아무리 천부적으로 강건한 체력을 타고났다고 해도 주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음을 하고 어떻게 건강을 유지했는지? 불가사의하고 불가해하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은 내가 천학비재하다고 하나 그래도 일반인 중에서 중간쯤 수준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20년 전 학식 있는 사람의 글이라고 하나 소제목 4040여 개 중에서 네다섯 개만 순 한글이고 나머지는 한문 성어인데 소제목 몇 개는 모르는 한자로 구성되어 옥편을 찾아야 했으며 더욱 가관인 것은 본문 중에도 한글 성어에 괄호 속에 한문을 병기하였어도 한글과 한문을 읽어도 모르겠고 앞 뒤 문장을 읽고 유추하려고 해도 대충의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두 세 페이지마다 나타났다. 예전 같으면 옥편을 뒤져 뜻을 알고 넘어갔겠지만 이제 읽을거리도 태산이고 사어에 가까운 이런 한문투 성어를 굳이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건너뛰고 말았다. 새삼 느끼지만 말과 글은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아서 매우 빠르게 새로운 단어가 생성되고 변한다는 것을 실감하며 앞으로 이런 현상이 더욱 빠르게 진전되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시대를 거슬러 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로 짜여진 이 책을 누구에게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