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7일째, 몬세라트 수도원과 타레가 근처 시골마을 2020. 01. 21.

깃또리 2020. 6. 18. 12:31

7일째, 몬세라트 수도원과 타레가 근처 시골마을 2020. 01. 21.

 

시골 마을이라 아침 일찍 여는 카페도 없어 어제저녁에 준비한 빵과 커피로 아침 요기를 간단히 마치고 몬세라트를 향해 출발 약간 험한 산길을 약 한 시간 걸려 몬세라트 수도원 케이블 카 주차장에 들어섰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바르셀로나에서 1시간 조금 더 걸리는 곳으로 바르셀로나 들리는 사람은 으례 들리는 명소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이른 오전이라고 하지만 주차장엔 차가 한 대도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승차장 로비에 갔더니 문이 잠겨있었고 안내문에 케이블 카 수리 중이라 하였다. 케이블 카가 다니지 않으면 산악열차 일 것 같아 5분쯤 거리에 있는 산악 열차역에 도착하여 티켓을 신용카드로 구입하는 방법 등을 마침 안내 여직원이 친절하게 알려주어 표를 받고 승차장에 올라갔다. 승차장 한쪽은 바르셀로나로 연결되는 기차 승차장이었다. 조금 기다려 산악 열차가 도착하였으며 승객이 많지 않아 전망이 좋은 왼쪽 창가에 앉아 비 온 뒤 맑은 하늘 아래 저 아래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25분쯤 올라가 몬세라트 수도원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수도원은 대성당과 수도원을 비롯하여 박물관, 관광객을 위한 식당, 기념품 가게, 주차장 등이 있고 수도원 위로는 기암절벽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어 서 있었는데 지대가 높아서인지 바람에 빗방울이 섞여 아내는 우산을 펼치기도 했으며 기암절벽으로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짙은 안개인지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하였다. 관광철에는 성당 내부의 검은 성모상에 가까이 바라보기 위해서 긴 줄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데 우리는 겨울이라 관광객이 적어 줄도 서지 않고 바로 성모상에 다가갈 수 있었다. 목재로 다듬어 만든 성모상으로 목재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검은색이 짙어져서 검은 성모상이 되었다 하는데 목재의 종류가 궁금하다. 내가 알기로 티크는 원래부터 검은색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스페인에서 산출되는 나무가 아닌가 한다. 뒤돌아 나오는 길에 소원을 빌며 촛불을 켜는 헌초대가 있어 아내는 초 3개를 켰다. 아마 우리 부부, 아들 부부 그리고 딸 부부를 염두에 두었으리라 짐작하였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기 때문에 수도원 뷔페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기념품 가게를 지나서 산악열차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갔다. 우리들은 조금 서둘러 제일 앞 칸의 첫 줄 오른쪽 제일 전망이 좋은 좌석에 자리 잡았다. 우리 다음에 급히 탑승한 중년 부부들은 우리 옆에 앉았으며 내가 어디서 왔느냐 물었더니 인도 봄베이라 하고 우리는 서울에서 왔다고 서로 간단히 인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열차가 출발하여 차창 밖 경치를 보느라 이야기를 멈추었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워낙 오래되다 보니 소위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며 그중 하나가 검은 성모상으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루카가 만들었고 베드로가 여기로 가져와 어느 동굴에 숨겨 둔 걸 목동들이 발견하여 근처 주교가 아래로 옮기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아 작은 성당을 짓고 모셨다 한다. 그렇다면 성모상이 2000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탄소 방사선 동위원소 측정으로 12세기 제작으로 밝혀졌다 한다. 그래도 800년이 넘었고 1811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여 수도사들을 죽이고 수도원을 파괴했으나 검은 성모상은 손상을 입지 않았다 한다. 몬세라트라는 말이 '칼로 자른 산'이란 말로 눈어림 짐작으로 우리나라 도봉산 높이보다 더 높아 보였다. 수도원 규모로 볼 때 최소한 100명 이상의 인원이 생활해야 하고 가장 필수적인 물공급이 우선 되어야 하는데 기암괴석 아래 어딘가에 물이 흐르는 곳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동차가 없던 시기에 수도원 아래에서 지그재그 산길로 말이나 당나귀를 부려 양식과 필요한 물자를 운반했으리라 추측하였다. 지금은 케이블 카와 산악열차가 다니지만 구불구불하게 자동차 길도 보이고 넓은 주차장에 여려 대의 승용차가 서 있는 걸 보면 옛 길을 넒혀 자동차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수도원은 스페인 국왕들은 물론이고 이웃 프랑스 루이 14세와 오스트리아 페르난도 3세도 다녀갔으며 독일의 괴테, 바그너도 방문했다 한다. 태양왕이라는 루이 14세가 머나먼 파리에서 여기에 행차했다니 그 규모와 이동 방법 등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이 한양에서 수원 화성 아버지 묘소 행차에도 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는데 파리에서 스페인까지 대단한 일이다. 이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바르셀로나가 고향인 안토니오 가우디도 이곳을 돌아보고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건축물 설계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 사실 이곳은 한나절 돌아볼 곳이 아니고 트래킹 코스를 걸어서 올라가거나 내려오고 수도원 윗부분에 있는 천국으로 이르는 계단, Stairway to Heaven도 올라가는 최소한 1박 2일 일정이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아무튼 조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사라고사, Zaragosa에 가기 전에 기왕이면 대도시보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잠을 자려고 이곳저곳을 검색하다 마침 1시간 반 거리에 타레가, Tarega라는 도시가 보이고 근처 시골 마을에 숙소를 찾아 예약을 하고 국도에 들어섰다. 왕복 2차선 국도는 사라고사와 바르셀로나 연결도로인데 반대편 차로 즉 사라고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차량 행렬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왜냐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의 80% 정도가 소위 화물탑차였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제2의 큰 도시인 바르셀로나에 공급하는 많은 화물수송을 감안해도 의외의 광경이었고 스페인 며칠 운전 중에 가장 특이한 경우이기도 했다.

 

목적지 마을, La Figuerosa는 국도에서 5분쯤 들어가는 넓은 평야지대 한가운데 약간 솟은 지형 아래 약 50호쯤 되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서 받은 인상은 이런 곳에 외지인을 위한 호텔 숙박시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적하고 가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농촌 가난한 시골 마을로 어느 면에서는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빈집만 있는듯한 분위기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소위 스페인의 시에스타 시간이라 동네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고 스페인도 농촌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 한다. 지금 생각하면 동네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 스페인 개들도 시에스타를 즐기는 것 아닌 가 한다. 내비게이션 위치에 숙소가 나타나지 않아 동네 작은 마당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이곳저곳을 헤매기를 30분가량하던 중 마침 봉고 트럭 크기의 화물차가 나타나 나는 염치 불고하고 앞을 가로막고 세웠다. 운전석엔 남편으로 보이는 농부, 옆에는 아내가 타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차 앞을 낯 모르는 동양인이 가로막자 퍽 당황한 눈치였다. 물론 영어가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으로 이곳에 있는 호텔을 찾는다 했더니 처음엔 그런 곳이 없다 하다가 호텔 이름과 주소를 번역기를 이용하여 들려주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대략 20분 정도를 함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빈 끝에 구부러진 막다른 골목 끝에 어떤 제법 큰 대문 앞에 넷이서 문을 두드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현관문 옆 위에 초인종이 있었으나 당시엔 그걸 몰랐었다. 잠시 후 40대 중반 남자가 나타나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맞다고 확인되어 좁아서 겨우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을 조심조심 운전하여 동네 마당에서 차를 가져왔다. 물론 우리를 도와준 부부에게 거듭거듭 그라시 에스를 연발하고 가방을 숙소에 들여놓자 마자 몇 골목을 돌아다녀 그 트럭을 찾아 문을 두드렸더니 친구 집을 방문하여 부부와 친구가 테이블에 함께 앉아 뭔가 마시고 있어서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아마 이 부부가 없었다면 숙소를 찾지 못하고 타레가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스페인 부부였다. 사실 그 부부는 그 동네 사람이 아니고 다른 동네에서 친구를 만나러 온 부부였다. 익스피디아에는 호텔로 나와 있지만 실재는 Pension, 펜션이나 민박집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시골 대문 같은 목재 현관문을 열면 일종의 현관 용도의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1층으로 실내도 아니고 실외도 아닌 한쪽 바닥은 단단한 바위가 그대로 노출되어 보이며 아마 집을 지을 때 바위 위에 지은 것 같으며 이곳에서 반층 정도 계단을 오르면 주인집 출입구가 있고 한층 오르면 객실 출입문이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넓은 부엌과 식당 테이블이 딸린 거실이 있다. 거실 옆엔 화장실과 침실이 있는데 침실의 천장은 경사면이다. 거실 옆 베란다로 나오면 옆집 지붕이 눈 아래에 있어 전망이 트여 넓은 들판에 지평선이 가물가물하였다. 다시 거실 한쪽에 난 문을 열고 나가면 긴 복도에 침실이 3개가 연달아 이어져 있다. 이런 숙소는 두 세 가족이나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며칠 머물면서 지내는 대가족에게 적당한 숙박시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이 높고 방들이 커서 난방시설이 약해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동네를 돌아보기 위해 숙소에서 나왔다. 약 한 시간 정도를 마을 이곳저곳 돌아다녔으나 역시 동네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고 승용차 몇 대만 들어오고 나가는 형편이었고 반은 버려진 마을 같았다. 숙소에 돌아오니 주인이 뭐 불편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하여 왜 동네에 사람이 없느냐 했더니 1/3은 빈집이고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나갔다 한다. 올라오는 계단인가 출입문 어디가에 다윗의 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주인은 유대인 후예인듯하였다. 가장 가까운 타레가도 10분쯤 걸리기 때문에 서울에서 가져온 라면에 달걀로 저녁을 대신하고 일찍 잠을 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