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깃또리 2020. 6. 1. 11:14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제임스 조이스/ 이상옥 옮김

민음사

2019. 06. 03.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던 소설가와 소설 작품이 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잊히기도 하지만 오직 독특하고 인류 보편성을 지닌 작품만이 생명력을 유지하여 소위 명작으로 클래식,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뛰어넘어 읽히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ng Man>도 1914년 영국의 <에고이스트>지에 연재된 다음 1916년 출간되어 이제 10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혹평을 받고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작가 제임스는 물론 작가의 고국 아일랜드의 문학적 지위까지도 드높이고 있다. 사실 아일랜드는 국토 면적, 인구, 국력이 유럽 국가들 중에서 쉽게 말하여 10위 권에도 미치지 못하고 역사적으로도 스웨덴과 영국의 지배 아래 수백 년 핍박을 받고 잦은 흉년으로 수십만 명의 기아 사망자를 내기도 한 슬픈 역사를 지닌 나라이며 1919년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오랜 투쟁으로 1948년 비로소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나라이다. 인접 강대국에 끼어 고난의 세월을 보낸 우리니라와 같이 약소국가의 서러움을 겪은 나라이다. 그러나 문학 부분을 한정하면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네 명이나 배출했으며 만일 국력이 뒷받침되었더라면 더 많은 수상자도 가능했다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시인, 소설가를 배출한 독특한 나라이다.

 

나는 어느날 그동안 내가 쓴 독서후기 목록을 훌어보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의 후기는 있으나 이 책의 후기는 없어서 별생각 없이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기를 시작하였는데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 이름과 소설의 내용이 내가 처음 읽는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어떻게 끝 마무리되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문열 씨의 <젊은 날의 초상> 후기를 다시 읽어보니 내가 이 조이스의 소설을 읽다가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 중간 부분에서 그만두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처음부터 다시 읽었는데 역시 중간 부분인 제3장에서 시작하는 설교자의 강설과 스티븐이 낯선 성당을 찾아가 처음 보는 늙은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고백성사 부분까지 너무 길게 이어지고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특히 이 부분은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 요한 묵시록, 이사야, 요한복음, 고린도 전서, 창세기, 베드로 전서, 출애굽기, 시편 등 성경의 모든 문서의 구절이 인용되어 가톨릭 종교의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이 책을 계속 들고 있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읽다마다를 거듭하긴 했어도 끝까지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덥었다.

 

전체적인 대강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디덜러스는 수도 더블린에서 가까운 예수회에 속한 클롱고우스 우드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감수성이 섬세하고 자아가 강하여 주변 친구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여 학교를 쉬고 집에서 지내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가족과 친척들이 모인 저녁 식사자리에서 아일랜드의 정치문제로 친척들 사이에서 심한 논쟁과 불화를 목격하지만 자신은 아직 또렷한 생각이 없고 나이도 어려 관망만 한다. 부모님들의 주선으로 다시 더블린의 벨비디어 학교로 옮겨 많은 책을 읽고 특히 영국 시인 바이런에 매료되었다. 당시 바이런은 이단아로 여겨진 탓에 학교 친구들로부터 뭇매를 맞기도 했으나 학교 성적은 우수하여 글을 써서 막대한 상금을 받았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거금을 받았기 때문에 우쭐하여 가족을 위해 상금을 흥청망청 쓰기도 하고 육체적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더블린의 뒷골목 사창가를 몇 번 찾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지만 곧바로 후회한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아일랜드는 가톨릭 종교의 역사와 전통이 뿌리 깊고 강한 나라인데 이런 환경에서 자란 스티븐은 육욕을 이기지 못한 자신을 심히 자책하여 평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여 학생 신심회 회장직을 두 번이나 맡게 되어 더욱 자신의 한 때 일탈에 대하여 고뇌에 빠진다. 앞에서 말한 신부의 강론으로 큰 충격을 받아 멀리 떨어져 아는 사람이 없는 작은 교회를 찾아서 고해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고해성사 후 참회를 위해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여 교장선생의 눈에 들어 성직자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자신은 내면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고 인간세계는 감각과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임을 자각하고 거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을 혼자 걷다 우연히 치마를 한껏 걷어 올리고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한 소녀의 아름다움에 이 세상의 또 다른 아름다운 세계를 인식하고 그동안 경험한 교회 사제들의 위선에 대한 실망 그리고 소명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종교의 사제가 아닌 미를 추구하는 사제 즉, 예술가가 되기를 결심한다. 대학에 진학한 스티븐은 조국 아일랜드에 대한 애정, 신의 세계인 종교 가톨릭 그리고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까지도 자신을 묶어 매는 족쇄라 생각하여 모두를 버리고 진정한 예술가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으로 자기 유배의 길로 나선다.

 

* 제임스 조이스 (Jame Augustine Aloysius Joyse 1882~1941, 59 )

 

188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세금 징수원이며 다소 성격이 예민하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며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과잉보호 성향이나 10명의 아들, 딸들을 무척 사랑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6 살 때 가톨릭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다방면에 좋은 성적을 나타냈으나 아버지의 알콜 중독, 경제적 파탄 등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약 2년 동안 집에서 지내며 우울한 소년기를 보냈다. 1893년 11살 되던 해 예수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그래머 스쿨인 벨버디어 칼리지에 수업료 면제를 받고 입학하여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였으나 로마 가톨릭 신앙을 잃었다는 의심을 받고 학교를 떠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신학이나 철학은 공부하지 않고 외국어와 광범위한 학문에 관한 책을 읽고 특히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에 심취하여 노르웨이 표준어를 공부하기도 하며 자신이 발표하는 글이 많은 사람에게 호평을 받자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1902년 졸업시험에서 라틴어 2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졸업 후 런던에도 방문하고 여러 글을 발표하다가 1904년 그의 나이 22살 때 어느 호텔에서 일하고 있던 노라 바나클에 이끌려 동거를 하다가 더블린을 함께 떠났는데 처음에 파리를 시작으로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에서 거주하였고 1915년 세계1차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 취히히로 옮겨 지내다 다시 몇 나라를 거쳐 마지막엔 취리히에서 정주하였으며 1941년 그의 나이 60세에 십이지장 수술 후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은 자전적 요소가 짙고 후세의 평자들은 청소년의 성장과정을 그린 성장소설 또는 교양소설(Bilungsroman)로 부르고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iouness)에 따라 쓴 글이라고도 한다. 작가는 치밀한 사전 구상에 따라 예수 시대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스테판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아버지인 다이달로스에서 차용하여 주인공을 현 사회에 대한 순교자이자 장인 다이달로스로 유추되는 예술가의 표상으로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를 내세우고 있다. 조이스는 미술에서 피카소, 시에서 T. S. 엘리옷에 비교되는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새롭게하여 20세기 모더니스트 작가로 일컬어지며 의식의 흐름 기법은 인간 내면이 미묘한 심리 갈등을 잘 묘사하여 심리소설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유럽의 굳건한 기독교 신앙은 찰스 다윈(1731~1802)의 진화론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신념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약해지고 100년이 흐르자 제이스 조이스와 같은 인물이 신을 부정하는 이런 소설을 쓰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아직도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톨릭에서 불가지론으로 그리고 차차 무신론에 이르렀다. 그렇다하여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배타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