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영문판)

<Who was Amelia Earhart?>를 읽고...

깃또리 2019. 9. 27. 16:00

<Who was Amelia Earhart?>를 읽고...

By Kate Boehem Jerome/ Illustrated by David Cain

Grosset & Dunlap New York

201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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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뒤표지에 Amelia Earhart를 소개한 세 줄의 글이 나온다.

 

- The first woman to fly across the Atlantic Ocean.

- The first woman to fly across the Pacific Ocean.

- A courageous pilot who disappeared mysteriously during an around-the-world flight in 1937.

 

Amelia Mary Earhart는 1897년 7월 24일 미국 중부에 위치한 Kansas 주 Atchison에서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Amelia가 일곱 살 때인 1904년 바로 이웃 주 Missouri주 St. Louis에서 세계 박람회가 열려 부모님을 따라 구경을 하였다.

 

Amelia가 태어난 1904년은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41년으로 을사늑약이 이루어졌던 1905년 바로 1년 전이지만 미국에서는 전 세계 45개국이 참가하여 2000만 명이 다녀가고 에스키모 마을과 일본식 정원이 꾸며진 화려하고 성대한 세계박람회가 열렸고 뉴욕에서는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한다. 당시 우리나라와 미국의 처지가 쉽게 구별된다. 또한 17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필라델피아에서 1876년 개최된 Centennial Exposition에는 새롭게 선보인 제품이 타자기였으며 1893년에는 시카고에서 World's Columbian Exposition이 열려 이 당시에 2000명이 한꺼번에 탑승할 수 있는 거대한 Ferris Wheel이 선보여 수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며, 1936년에는 뉴욕시에서 'Building the World of Tomorrow'라는 표어를 내걸고 세계건물박람회가 열렸고 이때 나타난 새로운 발명품 중 하나가 텔레비전이었다 한다.

 

1909년 Amelia가 7학년일 때 Iowa주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갔을 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보았다. 이때는 Wright 형제가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던 1903년에서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로 비행기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사실 우리들은 라이트형제가 최초로 비행에 성공하였다고만 알고 있지 형제 중에 누가 먼저 타고 날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물론 두 형제가 함께 탓을 리 없었을 것이므로 형인 Wilbur 또는 동생 Orville일 텐데 실은 둘이 동전 던지기를 하여 동생이 먼저 탔다고 한다. 나는 서로 먼저 타려고 동전을 던진 줄로 알았는데 사실은 위험하기 때문에 진 사람이 먼저 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러나 첫 비행은 불과 30m 높이에 약 12초였다고 한다.

다시 Amelia 이야기로 돌아가서, 물론 이 때 Amelia가 처음 비행기가 나르는 모습을 본 일이 Amelia에게 일생의 운명과 같은 만남일 줄 몰랐다 한다. 몇 년이 지난 19살 때인 1916년 시카고에서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니어 Ogontz School에 입학하여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당시는 세계 1차 대전(1914~1918)기간이었다. 1917년 크리스마스 휴일을 맞아 캐나다 토론토에서 학교 다니던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전쟁 부상병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학교에 돌아오는 것을 미루고 간호사 교육을 받은 다음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을 하였는데 그녀는 자신이 믿는 일에는 항상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이라 주변 다른 사람 누구도 이런 Amelia의 행동에 전혀 남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다.

 

1920년 미국 수정헌법 19조에 따라 모든 주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으며 23살이 되는 Amelia에게도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즉, 그 해 크리스마스에 L. A. Long beach 에서 에어쇼가 열려 그녀는 비행기와 하늘을 나는 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얼마 후 아버지를 설득하여 비행기를 타보고 언젠가는 비행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때 Sam Chapman이란 청년이 청혼을 하였으나 결혼하게 되면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다음 해 Neta Snock라는 한 살 위의 비행사로부터 비행훈련을 받으며 둘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 Amelia는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비행복과 부츠를 신고 비행기 수리작업도 기꺼이 한 다음 어머니를 졸라 작은 비행기 한대를 구입하여 Canary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물론 이 당시의 비행기는 쌍엽기에 두 명이 겨우 탈수 있는 지금으로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비행기였다 한다.

 

1921년 10월 테스트에 통과하여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으며 비행기술을 쌓아 공중회전과 안개와 구름을 뚫고 2.5마일 높이까지 오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Canary를 팔아 덮개가 없는 자동차를 구입하여 어머니를 태우고 서부에서 동부까지 대륙을 횡단하고 New York에 있는 Columbia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졸업은 하지 않았다 한다. 동부까지 따라온 Chapman이 재차 청혼을 하여 이제 28살이 된 Amelia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자신의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아무래도 방해가 될듯하여 다시 청혼을 거절하였다. 이러는 사이 1927년 Charles Lindberge가 ‘Sprite of St. Louis’호로 33시간을 단독 비행하여 미국 New York Long Island에서 출발하여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럽 파리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편 George Putman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사람이 Amelia에게 Wilman Stultz라는 비행사와 함께 대서양 횡단비행을 제안하여 이를 승낙하였다. 사실 린드버그가 대서양 단독비행에 성공하였지만 이후에도 14명이 도전하다가 사망하였으며 이 중에는 여성이 두 사람이나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그래도 여전히 횡단비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다. Amelia는 1928년 6월 3일 Friendship호로 보스턴을 출발하였으나 기상악화로 캐나다에 기착하여 며칠을 보낸 다음 6월 17일 Newfoundland에서 이륙하여 18일 영국 South Wales의 Burry Port에 기착하여 대서양을 최초로 비행한 여성이 되었지만 조종사 자격이 아닌 승객이었다. 그래도 런던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와 역시 대단한 환대를 받고 인기인이 되었다. 키도 크고 날씬하였으며 좋은 학교도 다녀 당시 영웅대접을 받던 린드버그와 비교하여 Amelia 는 'Lady Lindy'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이곳저곳에서 연설 요청이 쇄도하여 바쁘게 보내며 잡지의 편집자가 되어 글을 쓰기도 하였다. 1929년에는 Amelia가 주축이 되어 여성비행사 26명으로 구성된 그룹을 결성하였으며 명칭은 가입회원 숫자에 따라 변화하다가 최종으로 99명일 때 'Ninety- Nine'으로 확정하였고 Amelia가 초대회장이 되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알고 넘어 갈 이야기로, 린드버그가 최초의 대서양 횡단을 한 것은 맞지만 사실 그 전에 다른 사람들이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기록은 66번이나 된다. 단지 단독비행이 아니고 비행사와 항법사 또는 조력자와 함께 하였을 뿐이고 린드버그는 대서양을 그야말로 최초로 단독 비행한 것만 다를 뿐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조금 허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면 우리들은 단지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독 비행과 여러 명이 횡단 비행하는 일이 왜 중요하가 조금 이상하다. 이 시기에 세계경제를 후퇴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힘겹게 했던 세계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이 1929년 10월 29일부터 시작되었다. Amelia는 민간항공회사 설립에 참여도 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얼마 후 결혼했으나 이혼하여 다시 두 자녀를 둔 열 살 많은 예전에 두 번이나 청혼했던 Putman과 결혼식을 올리며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계속하기로 약속을 받아내고 남편은 이를 수용하고 적극 도와주었다.

 

점점 항법장치의 발전과 항공기의 구조가 목재에서 철제로 바뀐 비행기는 성능도 향상되어 1932년 린드버그의 대서양 단독횡단 5주년이 되는 날 Amelia는 캐나다의 Newfoundland의 Harbour Grace를 출발하여 Ireland에 기착하여 최초의 대서양 단독 비행한 여성이 되었다. 이 당시의 Amelia의 나이는 34세였다. 미국에 돌아와 대중들의 환호를 받고 당시 미국 대통령인 Herbert Hoover의 초대를 받는 기회도 주어졌다. 이제 Amelia는 미국의 Best Dressed Woman이 되어 유명잡지인 Vogue의 표지모델로도 나왔으며 그녀의 이름으로 패션 상품이 발매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불가능에 도전하는 새로운 비행계획을 꿈꾸었다. 즉, 그간 몇 사람이 세계일주비행을 하였지만 가장 먼 거리인 적도를 따라 비행하는 세계일주가 바로 그녀의 꿈이었다. 1937년 5월 21일 Lockheed사의 Electra호에 탑승하여 캘리포니아 Oakland를 떠나 Florida Miami를 거쳐 PuertorRico-Venezuala-Surinam-Brazil-Atlantic Ocean-Africa-Asia-New Guinea에 도착하여 7월 2일 여기서 이륙하여 태평양상의 작은 섬 Howland에 기착하여 급유하기로 예정되었다. 조종사 Amelia와 함께 탑승한 Fred Noonan이 기착 예정지를 찾기로 되어 있었으며 미국 해안 경비대 소속 경비선이 Amelia의 Electra호를 기다리며 몇 차례 교신도 주고받았으나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고 교신마저 끊겨 아마 이 작은 섬을 발견하지 못하여 헤매다 연료가 떨어져 추락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으며 그녀의 40회 생일을 며칠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Howland 섬에서 급유하고 Hawai를 거쳐 처음 출발했던 Oakland로 귀환하기로 되어 있어 대부분의 일정을 마치고 단지 태평양만 건너면 마칠 수 있던 세계일주비행계획이 무산되었으며 Amelia의 실종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았다 한다. 그 뒤 불쑥불쑥 그녀가 전쟁포로로 살아 있다든가 외진 섬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등의 믿기 어려운 소문이 스쳐 지나갈 뿐 아직도 그녀의 실종에 대한 확실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한다. 아무튼 끊임없는 도전으로 일생을 보내다 홀연히 사라진 Amelia Earhart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그녀가 남긴 도전정신을 되새기게 한다고 한다.

 

 

 

 

 

 

 

 

 

* 이 책을 읽고 독서후기를 쓴 꼭 한 달 후인 2012년 6월 12일 조선일보 국제 면에 아래와 같은 아멜리아 이어하트에 관한 글이 실려 여기에 추가한다.

 

 

'하늘의 여제' 흔적 찾기, 태평양에서 재개하기로 여성 첫 세계일주 비행 도전 이어하트 실종 75주년 맞아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 비행에 도전했다가 태평양에서 행방불명된 '하늘의 여제(女帝)' 아멜리아 이어하트(1897~ 1937·사진)의 흔적을 찾기 위한 탐사작업이 그의 실종 75주년을 맞아 다시 시작된다.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역사적 항공기 회수를 위한 국제그룹'(TIGHAR)은 10일(현지시각) "이어하트가 당시 태평양 상의 한 무인도에 불시착, 얼마 동안 생존하다 사망했다는 가정하에 7월 2일부터 이 무인도를 중심으로 탐사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7월 2일은 이어하트가 실종된 날이다.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조종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미국 여권(女權)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어하트는 40세가 되던 1937년 쌍발기로 세계일주를 시도하다 남태평양 키리바시 인근 하울랜드섬 해상에서 교신이 두절됐다. 미 정부는 사고 직후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이어하트와 항법사 프레드 누넌의 유해는 물론 비행기 파편이나 유류품 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민간단체들이 주도한 별도의 탐사작업에서도 성과를 내지 못해 이어하트의 최후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어하트의 흔적을 예수의 성배(聖杯), 칭기즈칸의 무덤 등과 함께 '아직도 찾고 있는 보물'로 선정하기도 했다.이어하트 흔적 찾기를 지난 20여 년 간 진행해온 TIGHAR의 릭 길레스피 사무국장은 "이어하트는 조난 후 하울랜드 섬에서 남쪽으로 500여km 떨어진 '니쿠마로로'라는 무인도에서 얼마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탐사전문가와 과학자 등 20여명으로 구성된 팀이 이 섬 일대는 물론 멀티빔 소나, 원격 해양탐사 장치 등을 동원해 인근 해역까지 샅샅이 뒤질 것"이라고 했다.지금까지 이어하트의 최후와 관련해선 50여권의 책에서 '미군 스파이로 활동하다 일본군에 체포됐다' '평범한 삶을 위해 죽음을 가장하고 미국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