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영문판)

<Who was Sacagawea?>를 읽고...

깃또리 2019. 9. 24. 14:13

<Who was Sacagawea?>를 읽고...

By Judith Bloom Fradin and Dennis Brindell Fradin/ Illustrated by Val Paul Taylor

Grosset & Dunlap New York

2012. 05. 10.

  Who Was Sacagawea?

   

  

이 책 뒤 주인공 Sacagawea를 간단히 소개한 3개의 문장이 나온다.

 

- A sixteen-year-old who made one of the most remarkable journey in America history

- A woman who has mountains in three states named after her

- The face on the new U. S. golden dollar coin

 

Sacagawea는 미국 미시시피 강의 가장 큰 지류인 미주리 Missouri river의 최상류 지역에 해당하는 록키산맥 아래에 사는 소쇼니, Shoshone 인디언 족 출신이다. 10살 때 쯤 600마일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부족이 마을을 급습하여 Sacagawea를 납치하였다 되돌려 보내 준 일도 있다. 15살에는 자신보다 세배쯤 더 나이가 든 인디언 Charbonneau라는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계산하면 그녀의 출생은 1789년 또는 1790년으로 짐작된다고 하며 1789년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해이고 미합중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이 당선된 해이기도 하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Tomas Jefferson은 제2대 대통령인 John Adams의 뒤를 이어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그의 간략한 소개가 이 책에 나와 옮겨보았다.

 

"1747년 버지니아 주 Albemarle County에서 태어났으며 약 20명의 노예와 농장을 소유하였다. 1776년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1784년 미국은 독립되었다. 제퍼슨 이전에 서부(지금의 미국 중부지역을 말함)로 두 번의 탐험대를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1801년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1803년 북부 아메리카를 탐험하도록 의회는 2500불을 승인하여 그해 늦은 여름 St. Louis에서 Lewis(29세)와 Clark(33세) 두 사람을 탐험대장으로 하여 출발하였다. 제퍼슨은 연임하여 1801~1809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하고 퇴임 후에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의 개인 도서관에 소장되었던 6400여권의 책들이 의회도서관의 핵심 소장도서가 되었으며 1826년 7월 4일 미국 독립 50주년이 되는 해에 사망하였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의 정적이었으나 후일 화해하고 지냈던 2대 대통령 존 애담스도 제퍼슨과 같은 날에 사망하여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 너무 신기한 일이라 한다.

 

원래 미국 독립 당시의 미국의 영토 개념의 경계는 대서양 연안에서 미시시피 강까지였으며 1803년 미시시피 강 서쪽부터 록키산맥까지의 광활한 지역은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이 지역을 "Louisiana Purchase"라 불렀으며 영토면적이 거의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후일 이 지역은 15개주로 구획되었다. 이 지역은 탐사되지 않아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어떤 지형인지? 무슨 식물과 동물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통령 제퍼슨은 이 지역을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까지 조사하도록 탐사대를 보냈다. 탐사대장으로 임명된 29살의 Meriwether Lewis(1774~1809, 36)는 제퍼슨의 친구이자 개인비서였으며 그는 예전의 군대 상관이었던 33살의 William Clark(1770~1838, 68)를 공동탐사대장으로 영입하여 43명의 대원을 규합하여 탐사대 이름을 Corps of Discovery라 정했다. 탐사대원 중에는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 인디언 싸인 언어를 아는 사람도 있었고 Clark의 흑인노예도 있었으며 Leiws가 키우던 Newfoundland 종의 개도 끼어 있었다 한다. 탐사대는 준비를 마치고 1804년 미시시피 강 중류지역 도시 St. Louis에서 1804년 5월 14일 대장정에 올랐다. 이들은 Bitterroot산을 넘기 전에는 주로 배를 이용하여 미주리 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나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말을 많이 기르고 잘 다루는 인디언 Shoshone족을 만나야 했으며 그 부족과 거래를 하려면 부족들이 사용하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여 15살로 당시 임신해 있었지만 Sacagawea가 필요하였다. 다행히 Sacagawea의 남편도 동행을 승락하였다 하는데 그 당시 거금에 해당하는 500불을 탐사대가 제시하였기 때문이며 총 탐사비용 2500불 중에 500불은 엄청남 금액이다. 하여튼 도중에 출산도 하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Sacagawea는 수백만 마일 떨어져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던 자신의 부족과 다시 재회하였는데 때는 1805년 8월 13일이었다. 부모는 부족 간 싸움으로 이미 사망하였으나 오빠가 부족장이 되어 있어 탐험대는 말을 빌리기로 하였으나 부족장이 다음날 마음이 변한 것을 Sacagawea가 미리 알아내 위기를 넘기고 말을 빌릴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일로 Sacagawea의 할 일은 끝났으나 호기심 많은 그녀는 넓은 바다인 태평양을 보고 싶어 했고 탐사대도 그녀의 여러 재주와 도움이 필요하여 갓난 아들을 등에 업은 그녀는 많은 고생을 치르며 태평양 연안에 그해 11월 7일 도착하여 그녀는 바다의 고래도 보고 한 겨울을 연안에서 보내고 다시 탐험대를 따라 원래 자신이 살던 곳으로 다음 해인 1806년 3월 22일 돌아왔다.

 

이 대장정에서 탐험대는 수많은 기록을 남기며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귀환하여 많은 환대를 받았는데 사실은 Sacagawea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 이유 중 몇 가지만 추려보면 탐험대의 식량이 바닥이 났을 때 Sacagawea는 야생에서 자라는 각종 먹을거리를 구하였고 탐험대원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백인들은 전혀 모르는 희귀한 약초를 찾아내 치료를 하였으며 항해 중에 그간에 정리하였던 기록물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막기도 하고 특히 자신의 오빠인 부족장이 마음을 바꿔 말 거래를 하지 않으려는 것을 미리 알아 대처하여 말을 얻을 수 있었던 일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탐험기간 동안 태어난 아들 Pomp를 대원들은 무척 귀여워했는데 특히 탐험대장 Clark는 애지중지하며 "My little dancing boy"라 불렀다.

 

탐험대가 귀환한 다음 Leiws는 Louisiana Territory의 주지사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사랑했던 여성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좌절감으로 과음으로 세월을 보내며 몇 명의 친구에게 빚을 져 고민하다 36살의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사람 Clark는 탐험 이후 St. Louis에 거처를 정하고 인디언 업무 국가 감독관이 되었다.

 

그는 Sacagawea의 아들 Jean Baptiste(Pomp)와 딸 Lisette를 데려다 키우고 교육시켰다. Sacagawea는 남편과 함께 옛 거주지로 돌아 왔으나 지급받은 돈은 남편이 차지하여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Clark가 가족 모두를 St. Louis로 초청하여 근처 농장에서 약 5개월 살다가 이곳 생활이 너무 답답하다고 느껴 6살이 된 아들만 남기고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갔다. 남편의 원래직업이 피혁행상이었기 때문에 Sacagawea는 남편을 따라 돌아다니다 1812년 12월 20일 South Dakota에서 25살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고 한다. 아들 Pomp는 성장하여 서부지역 안내인이자 상인이 되었으며 후일 캘리포니아 어느 스페인 도시의 시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다.

 

Sacagawea의 의미는 인디언 Shoshone 족어로 'Bird woman'이며 Shoshone는 'Snake'라는 의미라서 Bird woman, 또는 Snake Woman이라 부르기도 했다는데 1800년대는 인디언과 백인이 치열하게 싸워 한 동안 인디언에 대한 관심이나 존경심을 나타내지 않다가 탐험 100주년을 기념하는 과정에서 Clark가 꼼꼼하게 남긴 기록으로 Sacagawea를 재발견하여 Idaho, Montana, Oregon 그리고 Wyoming 주에서 산 이름을 그녀의 이름으로 하였고, Washington 주와 North Dakota 주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딴 호수 그리고 Bismark, North Dakota 주에는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Washington D. C.의 미국 의사당 앞에는 Sacagawea와 Pomp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2000년에는 미 조폐국에서 Sacagawea가 아들을 등에 업고 있는 모습의 금화를 발행하여 그녀의 공적에 경의를 나타냈다 한다.

 

미국 초기 역사와 미국 건국 역사에서 인디언 아니, Native American -사실 이 말도 적절치 않다. 왜냐면 American이란 말보다는 여기에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이 쓰는 말을 사용해야 하기에...- 지금의 백인, 기독교 미국인들에게 부끄러운 부분이 수도 없다. 수천 년 동안 평화롭게 살던 원래 주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기만하여 급기야 몇몇 종족은 멸족을 하였으며 겨우 살아남은 종족들은 소위 '인디언 보호구역, Indian Reservation'이라는 척박하고 쓸모없는 지역으로 내 몰려 있다. 더구나 이들이 술과 마약에 찌들게 하여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생존도 비참한 상황이라 한다. 이 모두가 유일신을 믿는다는 기독교, 가톨릭교도들이며 소위 자칭 문명인이고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고 보면 과연 그들이 말하는 신이 존재하는가 하는 깊은 의문이 든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이 피폐한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로 하여 산과 호수에 그들의 이름을 붙이고 거리 곳곳에 동상을 세우며 금화 앞면에 장식을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한가롭고 심심풀이 복고취향을 살리는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한 참을 생각해 보았다.

 

-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적은 인디언 보호구역에 대한 짧은 글을 옮겨 보았다.

 

*인디언 보호구역은 미국전역에 310개소이며 보호구역 면적은 한반도면적보다 넓은 225,410 평방킬로미터입니다. 대부분이 보호구역시설 내에서 정부의 혜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학교는 전부 장학금으로 무료 이며 나이든 계층은 사냥 등으로 시간을 보내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약이나 알콜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일정한 일이 없이 간단한 소일거리로 지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주정부가 이들에게 다른 혜택도 없이 시설 내에서 무료하게 지내도록 직업 알선 등은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일종에 고사작전인데 규모가 큰 보호구역은 관광 상품화 하여 그 수입으로 연명하는 곳도 있습니다. 또한 인디언 보호구역은 미국 전역에 약 310 곳이 있으며 Arizona, Oklahoma, New Mexico, Alaska, California 주 등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 찾아 본 단어들...

 

porcupine 호저

quill 큰 깃, 찌, 깃촉 펜, 이쑤시개, 호저가시

juggle 요술부리다. 사기하다, 속이다

pirogues (스)너벅선, 두대박이

artichoke 흰 꽃 엉컹퀴

currant

gooseberry 서양까치밥나무의 열매

squall 돌풍, 소동, 싸움

juniper 노간주나무 속, 곱향나무

diarrh(o)ea 설사

portaging 연수육로, 배로 거슬러 올라가다 폭포를 육로로 통과하여 다시 배로

가는 일

grizzle 회색

grizzly 회색곰= grizzly bear 록키산맥의 곰

ravine 협곡

 

waist

bluff 절벽의, 험한, 깍아지른 듯한, 퉁명스러운, 솔직한

token

camas root 백합과의 식물

puke 토하다= vomit 토한 것

blubber 여분의 지방, 고래 기름/ 엉엉 울기, 엉엉 울다. 울면서 말하다.

fennel 회향의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