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영문판)

<Who was Queen Elizabeth?>를 읽고...

깃또리 2019. 8. 26. 11:25

<Who was Queen Elizabeth?>를 읽고...

By June Eding

Illustrated by Nancy Harision

Grosset & Dunlap

2012.04.15.

   

    Who Was Queen Elizabeth?

 

책, 이 세상에 수천수만 권의 책이 독자들의 손을 기다리고, 책의 종류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도록 다양하다. 왜 갑자기 이런 진부한 이야기를 꺼내느냐 하면 도서관 신간코너를 기웃거리다 영문판 초급학생용 작은 서적들이 꽂힌 곳에서 이 책 <Who was Queen Elizabeth?>을 뽑아 읽고 나서 새삼 책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이유는 그 동안 세계역사 특히 영국 역사에 수 없이 등장하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이름은 수 없이 보고 들었지만 사실 아는 게 별로 없었으나 앞부분 몇 장 읽어 보고 퍽 재미있어 대출하여 읽은 다음 많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시대,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거나, 어떤 인물이 활동했다든가, 여왕치세 중에 어떤 사회변화가 있었다는 내용은 대강 알고 있지만 정작 여왕 자신에 대한 책을 읽거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오는 그 흔한 영화조차도 본 일이 없었다. 100여 페이지에 중간 중간 삽화까지 곁들여져 내용은 간략하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 적은 노력으로 여왕에 대하여 지식을 쌓는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두 번을 연속하여 읽었지만 읽을수록 재미가 있어 이래서 책이란 게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그러나 언제나 아쉬운 생각으로 시간이 흐르면 읽었던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게 된다. 하기야 우리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여왕에 대하여 알았던 작은 지식들을 잊는다고 뭐 살아가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흥미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기왕이면 오래 기억하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 없다. 생각 같아서는 우리말로 옮겨볼까, 아니면 여왕에 대한 다른 책을 구입하여 읽어 볼까 저울질 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 상태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몇 페이지로 요약해 두는 방법이 가장 좋을듯하여 적어 보았다. 책의 시작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스페인 필립 왕의 해군함대, Armada 소속의 군함 130척이 1588년 8월 잉글랜드 상륙을 목표로 다가오고 있었으나 갑자기 나타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소형 해군선박들의 화공에 우왕좌왕하다 때마침 불어오는 폭풍우로 영국해안 인근 암초에 부딪쳐 큰 피해를 입고 이로 인해 세계 해상세력권의 판도가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해상 전투는 규모나 실력보다 기상의 작용이 더 중요한 듯하다. 몽고와 고려의 여몽연합군이 1274년, 다시 원나라와 고려의 1281년 2차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두 번 모두 태풍으로 실패하여 일본에서는 이 바람을 신이 도와 준 바람이라하여 신풍(神豐, 가미가제 かみかぜ)이라 불렀고 세계 제 2차 대전 자살 특공대 이름을 신풍이라 하였다.

1588년이라면 우리나라 역사에 대비하면 조선 선조 임금시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이다. 즉,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71세)와 선조임금(1567~1608, 42세), 영국이 자랑하는 드레이크 제독(1540~1596, 57세) 그리고 우리의 성웅 이순신장군(1545~1598, 54세)이 거의 같은 동시대의 인물인 셈이다. 즉, 이순신 장군을 기준으로 하면 드레이크는 5살 위 형 쯤 되고 엘리자베스는 12살 위이니 조금 나이 많은 누나쯤 된다. 물론 선조는 나이로 보면 이순신 장군의 나이 어린 동생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1533년 9월 7일 Greenwich의 궁전에서 Henry 8세(1491~1547, 57세)와 Anne Boleyn 사이에서 태어났다. Henrry 8세는 사냥, 미식, 여자에 탐닉했던 군주로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에 대항하여 영국국교, English Church를 세운 인물이다. 첫째 부인 Catherine으로부터 공주 Mary를 얻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자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고 궁녀 출신으로 젊고 아름다운 두 번째 부인 Anne Boleyn과 결혼하여 엘리자베스를 낳았으며 당시 큰딸 Mary는 17살이었다. 그러나 Anne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엘리자베스가 3살 되던 해 역시 죄를 씌워 죽이고 2주일 만에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여 아들을 얻어 후일 Edward 6세가 된다. 아무튼 Henry 8세는 여섯 명의 부인을 차례로 거느렸던 인물이다. 이렇듯 아들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버지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일찍이 아버지 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나 다행히 Catherine이란 훌륭한 여자 가정교사와 Roger Ascham이란 학자의 가르침으로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들 선호사상은 동양인 중국이나 우리나라보다 서양이 훨씬 더 심했던 것 같다. 왜냐면 우리나라에서도 아들을 못 낳았다하여 왕비를 폐하긴 했어도 죽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에서도 여성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으나 엘리자베스는 위 두 사람의 도움으로 수학, 역사, 문학, 천문학 그리고 지리학을 공부하고 특히 책 읽기와 언어 습득을 좋아하여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까지 배워 Ascham과 때때로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대화를 할 정도였다 한다. 공부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명석하여 Ascham은 그녀를 'The brightest Star'란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하며 또한 현재의 피아노와 비슷한 Virgin이란 악기를 배우고 바느질, 수예, 승마까지 능숙했다니 다재다능하였던 것 같다. 그녀의 나이 13살 때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두 손에 책을 들고 책갈피에 손가락 하나를 끼고 있는 모습이어서 그녀가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13살에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자 셋째 부인에서 낳은 9살의 왕자 Edward가 왕위에 올랐지만 병약하여 15살에 사망하여 첫째부인 소생 Mary가 1552년 여왕으로 등극하였다. Mary는 37살, 엘리자베스는 19살이었는데 Mary여왕은 자신의 어머니가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더구나 자신은 독실한 가톨릭신자이고 엘리자베스는 영국국교회여서 더욱 미워하며 자신의 자리를 탐냈다는 죄목을 씌워 런던탑에 수감하고 죽일 명분을 찾고 있었다. 당시 Mary여왕은 비 가톨릭교도들을 가혹하게 대하여 250명 이상을 화형에 처하여 ‘Bloody Mary’라 불리 운다. 두 달 동안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언제 자신의 죽을 날이 올지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편지를 배다른 언니 Mary여왕에게 보내 용서를 받아 풀려났다. 한편 Mary는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으려고 애를 썼으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건강이 나빠져 1558년 11월17일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못해 엘리자베스를 다음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였다. 당시 25살이 된 엘리자베스는 다음해인 1559년 1월 15일 Westminster Abbey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당당히 여왕의 자리에 앉았으나 그 동안 습득한 엄청난 지식과 생사를 넘나들었던 위기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주변 인물들도 어떻게 다뤄야 하는 가를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누구보다 잘 알았다.

 

대관식을 마치고 런던 거리를 도는 퍼레이드를 펼치며 여왕은 도중에 수차례 마차를 세우고 자신을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추운 날씨에도 나와 준 시민들에게 감사 표시를 하였다 한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처녀여왕은 영국 곳곳을 방문하여 자신이 영국백성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 모두가 자신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여왕은 측근 조언자그룹을 항상 곁에 두고 의견을 청취하였으며 최종 결정은 자신이 하는 아주 현명한 방식으로 정치를 펼쳤으며 의회와도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모든 일을 잘 처리하였다 한다. 여왕의 조언자 그룹은 The Privy Council(추밀원)이라 불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큰 목소리에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한다.

 

이 추밀원에는 William Cecil이라는 The Secretary of State 즉, 오늘날의 국무장관격의 인물이 오랫동안 여왕을 보좌하였다. 37살의 나이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일을 시작하여 77살로 죽을 때까지 40년간을 여왕의 손과 발이 되어 보좌한 충신이었으며 또 한 사람의 추밀고문인 Sir Francis Walsingham은 엘리자베스 1세가 싫어하였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여왕과 조국 영국을 위해 자신의 재산까지 들여가며 유럽 각국의 정세를 염탐하여 여왕을 지키고 나라의 국익을 위해 헌신하였다 한다. 한편 추밀원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결혼을 종용하였으나 여왕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전 여왕 Mary와 정략 결혼하였던 스페인의 필립국왕을 비롯하여 유럽대륙의 왕족이나 왕들도 결혼제의를 하였으나 적절히 대처하여 영국과 자신의 입지를 잘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전혀 남성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 한다. 즉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Leicester의 백작, Robert Dudley’는 교육도 잘 받은 명석한 인물로 여왕은 그를 'Sweet Robin'이란 애칭으로 부를 정도였으며 궁전 가까이 지내도록 했으나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 Robert Dudley가 죽고 나서 만년에 Earl of Essex를 수양아들로 삼아 총애하였으나 그는 여왕에 등을 돌리고 민중봉기를 꾀하다 투항했으나 반란죄로 처형하였다. 여왕의 측근들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일어날 왕권쟁탈에 따른 혼란을 걱정하여 결혼하여 왕위 계승자를 두기를 원했으나 여왕은 그 동안 자신의 아버지가 아내를 어떻게 했는지를 똑똑히 알고 있어 한사코 결혼을 거부하였다. 또한 당시 출산으로 목숨을 잃는 일도 허다하여 더욱 결혼을 기피하면서 “만일 내가 우유 짜는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부자 왕과 결혼하는 것보다는 혼자 살겠다.”라는 말을 했다 한다.

 

45년이란 긴 세월동안 재위에 올라 많은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중에서 큰 사건 중 하나가 분리왕국이었던 스코틀랜드와 관계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친척관계인 Mary Stuart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가톨릭이어서 영국내의 많은 가톨릭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가 잉글랜드까지 통치하기를 바랐으며 Mary Stuart여왕 또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자리까지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싫어하는 반란군에 쫓겨 남쪽 잉글랜드로 도망쳐 나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도움을 청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촌뻘 되는 Mary의 안전을 보장하였으나 또 한편 감시의 눈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Mary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반란을 도모하다가 앞서 말한 추밀원의 치밀한 감시망에 걸려 재판을 받고 사형 당하였다. 그 당시 사형이 선고 되어도 형 집행은 여왕의 마지막 허가가 있어야 했는데 엘리자베스여왕은 사형집행 허가증에 서명하는 것을 미루며 괴로워하다 결국 서명을 하여 Mary는 44세인 1587년 2월 28일 처형되었다. 그러나 여왕은 Mary를 예우 차원에서 Westminster사원에 안장시켰다. 이 사건을 전해 들었던 스페인 필립왕은 같은 종교를 믿는 Mary를 처형한 일에 불같이 화를 내고 이번 기회에 잉글랜드를 정벌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Armada함대를 출진시켰으나 영국판 신풍으로 실패하여 국운이 기울어지게 되는 시발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Mary여왕을 18년 동안 감시하고 보호하면서도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퍽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죽어서야 비로소 같은 장소인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힌 사실이 퍽 흥미롭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기에 활동하였던 유명한 인물 중 하나가 Sir Francis Drake였다. 그는 원래 해적 두목이었으나 잉글랜드를 위하고 값비싼 노획물을 여왕에게 바쳤기 때문에 1580년 여왕은 그에게 기사작위를 부여하였다. 또 여왕 재위시절 유럽에서 쥐벼룩으로부터 감염되는 페스트가 두 번이나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천연두가 돌아 여왕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살아서 얼굴에 그 흉터가 남아 죽기 전까지 시녀들이 얼굴에 두껍게 화장을 하여 흉터를 감추었다 한다. 당시 궁내의 사치가 극심하여 여왕은 수백 벌의 옷을 장만하여 자신의 위엄과 미모를 자랑하였다하며 보통 여덟 겹의 옷을 시녀들이 입혀주었다 한다. 책에 나온 그림 설명을 보면 고래 뼈로 만든 Bodice(보디스, corset 위에 입는 여성상의)와, corset(코르셋), petticoat(속치마), hoop(버팀테), farthingale(버팀 살)이라는 스커트, 그리고 목과 팔목에 두르는 collar ruff에는 진귀한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여 그 무게도 엄청나 여왕은 혼자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여 시녀들의 도움으로 걸었다 한다.

 

귀족이나 부유층 남성들도 사치가 심하여 머리에 물을 들이고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하였으며 남자들도 허리를 가늘게 보이기 위해 girdle을 착용하였다 한다. 상류층 사람들은 문학, 드라마, 연극, 노래, 댄스를 즐겼으며 소네트를 낭송하는 유행이 퍼져 있었으며 당시 유명한 극작가로는 Christopher MarloweWilliam Shakespeare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1586년 최초의 극장이 개관하였고 1599년에는 셰익스피어에 의해 Globe Theatre가 문을 열어 하층시민들도 극장을 찾을 수 있었다.

 

1600년에는 엘리자베스여왕이 68세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야외산책과 말 타고 나들이를 하며 활기롭게 무도회에서 춤도 즐겨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을 유지 하였다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부터 계속된 흉작으로 굶주리는 사람이 늘고 아사자도 속출하여 이농민들이 대거 런던으로 몰려들어 정국이 불안하였으며 앞에서 말한 양아들 Essex가 반란을 일으키자 1601년 그의 목을 벤 이후에 여왕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수족이나 다름없던 Cecil도 죽고 그녀가 사랑하였던 Robin도 곁에 없어 쓸쓸하고 노쇠한 여왕은 죽기 수일 전에는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않은 상태로 만 이틀 동안이나 줄 곳 서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침대에 쓰러져 죽음을 맞았다 한다. 죽기 직전 여왕은 그의 후계자를 묻는 추밀원 고문의 대답으로 한 동안 자신의 적이기도 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Mary Stuart의 아들 James 6세(1566~1625, 70세)를 눈빛으로 승낙 표시한 다음 1603년 3월 24일 이른 아침에 영면하여 수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이후 왕위에 오른 James 6세는 잉글랜드 왕까지 겸하여 호칭을 James 1세로 고쳤다 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간략하지만 잘 설명한 글이어서 옮겨 본다.

 

The young girl who had been shunned by her father had grown to become one of England's greatest rulers. She had lived in a world where men were though to be smarter, wiser, and better in all ways than women. She had led the English navy to victory, and encouraged the growth of literature and the arts, and in the end she had left her people with a great gift: a strong and powerful England.

 

 

 

* 책을 읽으면서 찾아 본 단어...

 

break up 분쇄하다. 해산하다. 쫒아버리다. 끝나게 하다.

virginal =piano, 16, 17세기 소형 피아노, 처녀의, 순결한

resent ....을 분하게 하다. 원망하다.

scepter 홀, 왕권을 주다

verdure 신록, 울창, 무성 초목, 신선, 푸름, 청록, 푸른 잎

orb 보주, 왕권의 상징

nobility 숭고한, the~ 귀족.

draft 끌기, 견인, 선발, 징병, /통기, 외풍, 통풍/ 도면, 초인

turn down 뒤집다. 거절하다

waging

crumbling 무너지는

perpetual 끝없는

shun 피하다, 멀리하다./ 차렷

 

 

 

 

 

* 2013년 3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영국 운명을 바꾼 엘리자베스 1세...여성은 무엇으로 다스리는가”라는 기사가 흥미 있어 옮겨보았다.

'그리니치(Greenwich)'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이 천문대를 떠올릴 것이다.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되는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Prime Meridian·경도 0)이 그리니치에 있는 천문대를 통과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리니치가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니치는 런던 초입의 템스 강변에 위치해 있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공원이고, 공원 뒤쪽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천문대가 자리 잡고 있는데 생각보다 작다. 이 조그만 그리니치천문대가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된 건 1884년의 일이다. 그때까지 서로 다른 생활권에서 각자의 시간관념 속에서 살아온 인류가 19세기 후반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제국주의의 확대에 힘입어 시간대를 통일할 필요성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영국이 세계 시간대의 중심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우문(愚問)이다. 예나 지금이나 표준을 정하는 건 패권 국가의 권리이고, 당시는 '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ica)'가 절정을 구가하던 시대였으니까. 오히려 이곳에서 우리가 자문(自問)해야 할 것은 '어떻게 영국같이 조그만 섬나라가 전 세계 시간의 표준을 정할 만큼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느냐'가 아닐까. 그 해답의 실마리 역시 그리니치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 이곳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영국 왕이었던 헨리 8세. 그는 딸에게 엘리자베스(Elizabeth)란 이름을 붙여줬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바로 그녀다. 엘리자베스는 공주로 태어났지만, 동화 속 주인공처럼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세 살 때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를 잃었다. 대를 이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헨리 8세가 딸밖에 낳지 못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 불린을 참수형에 처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약혼했고, 열흘 후에는 새장가를 들었다. 더 나아가 아버지는 법으로 딸의 상속권을 박탈해 버렸다. 그녀는 불과 세 살에 서출이 됐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의 위상은 보잘 것 없었다. 이복 자매인 메리가 여왕으로 있던 시절(1553~1558)에는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광신적인 가톨릭 신도였던 메리와 그녀의 측근들이 신교 성향의 엘리자베스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런던탑에 유폐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신중함과 현명함으로 살아 돌아왔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 메리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당시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독립국이었다)의 왕위에 올랐다.

 

그녀가 즉위했던 1558년만 해도 잉글랜드는 유럽의 2류 국가에 불과했고 패권은 스페인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45년에 걸친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가 끝났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잉글랜드는 신흥 강국이 됐고,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무엇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르고, 세상의 역사를 바꿨을까? 해답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용기와 백성을 향한 따뜻한 포용이었다. 그녀를 역사에서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우뚝 서게 한 장점은 용기였다. 당시 유럽 대륙의 절반과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지배자였던 스페인이 잉글랜드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했을 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험가, 상인, 민병으로 군대를 급조해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맞섰다. 객관적으론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직접 갑옷을 차려입고 전선을 시찰하며 군인들을 독려했다. "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너희와 함께 살고 죽겠다. 나의 왕국과 백성을 위해 싸울 것이다. 비록 연약한 여자이지만 내게는 잉글랜드 왕의 심장과 용기가 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는 패배했고, 잉글랜드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백성 모두를 껴안으려 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지 않았다. 백성의 뜻에 어긋난 무리한 정치를 펴지도 않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워 백성의 삶을 고단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디서나 백성과 만나고 어울렸는데, 이는 동시대의 어떤 왕도 시도하지 못했던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백성을 믿었다.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자발적인 충성과 복종이라는 큰 보답으로 돌아왔다. 그 결과 엘리자베스는 강력한 상비군과 효율적인 관료제 없이도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활력으로 무장한 잉글랜드는 '팍스 브리태니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태어난 이곳 그리니치를 세계 시간대의 중심으로 삼았다. 의도했던 것인지 우연한 일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엘리자베스가 보여줬던 사랑과 용기가 오늘날 우리의 리더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이 중요할 뿐.

 

송동훈 '그랜드투어' 시리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