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베토벤의 생애>를 읽고...

깃또리 2019. 6. 21. 11:04

<베토벤의 생애>를 읽고...

로맹 롤랑/ 이휘영역

문예출판사

 

 

 

  꽤 오랫동안 서가에 꽂혀있던 책 중 한 권이다. 1972년 초판, 1985년 신장판 1쇄 인걸 보니 아마 나는 1986년 쯤 이 책을 어디선가 구하여 읽었던듯하다. 그나저나 신장판이라는 용어는 생소한 단어이다. 나는 책 구입일과 구입처를 앞 뒤 어느 쪽에 쓰는 편인데 그런 기록이 없고, 책 중간에 마른 단풍잎이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있는 걸보면 내가 어느 날 거리를 걷다 어느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던 책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해본다. 이 책은 이전 읽었다는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것으로는 저자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 1944, 78)은 창작 작가이기도 하지만 인물 전기를 쓰는데 심혈을 기울인 사람이며 내가 이 책을 읽고 수많은 음악작곡가 중에서 왜 베토벤만이 유일하게 '악성 樂聖'이라는 호칭이 붙은 이유를 알게 된 계기가 된 책이기도 하다. 거의 30년이 지나 다시 읽게 되어 책이란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다시 읽게 된다는 옛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준다.

 

1927년 저자가 쓴 <머리말>엔 그가 이 책을 1902년부터 쓰기 시작했다니 지금부터 100년이 더 지난 일이며, 베토벤이 1770년 태어나 1827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으므로 베토벤 사후 꼭 75년이 지나 책이 쓰여 진 셈이다. 또한 로맹 롤랑은 베토벤 사후 39년이 지난 1866년 출생하여 1944년 세상을 떠나 당시 아직 베토벤의 흔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던 시기였고 베토벤과 가까운 지인들을 만났기 때문에 생생한 기록이 되었다. 모두 164페이지 중에서 <베토벤의 생애>란 제목으로 쓴 본문은 74페이지뿐이다. 나머지는 베토벤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베토벤이 주변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베토벤이 이곳저곳에 기록했던 짧은 글을 모은 <베토벤의 사상 단편>, 로맹 롤랑이 비엔나의 베토벤 기념제 강연에서 했던 글, 그리고 <베토벤의 짧은 수기>는 말이 수기지만 4페이지 분량으로 이곳저곳에서 모은 베토벤의 어록이며 뒤이어 베토벤에 관련한 출판물 문헌 목록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역자 이휘영의 <역자의 말>로 끝을 맺는다. 본문 시작부분에 나타난 베토벤의 출생은 이렇게 쓰여 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퀼른 근처 작은 도시 본에서 어느 가난한 집의 보잘것없는 다락방에서 태어났으며 선조는 플랑드르 혈통이었다. 플랑드르는 헌재 벨기에 동부의 일부 지역이다. 그의 아버지는 본디 총명하지 못한데다 술주정뱅이 테너가수였고 어머니는 종비계급의 여자였다. 요리사의 딸로 어떤 남자종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죽자 베토벤의 아버지에 재가 했다. 베토벤의 음악성을 가혹하게 이용하려는 아버지 밑에서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다 18살이 되던 1787년 그나마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2년 후 베토벤이 아우구스브루크의 샤테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한다. “어머니는 나에게는 참으로 좋은 어머니, 사랑스런 어머니, 나의 가장 귀한 벗이었다! 어머니라는 정다운 이름으로 불러 볼 수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어머니가 들어 주시던 그때의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없으리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한 신분의 여자였으나 아들 베토벤에게는 소중한 어머니였다.

 

베토벤은 생활능력을 잃은 아버지를 청원하여 은퇴시키고 두 동생까지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졌으나 이 시기에 평생의 후원자가 되었던 부로우닝 가를 만났던 것은 베토벤에게 행운이었다. 이 집의 상냥한 딸 로르헨 엘레노레 폰 부로우닝은 두 살 아래 어린 소녀였고 베토벤은 그녀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그녀로부터 시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엘레노레는 의사인 베겔러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베겔러와 친구가 되어 평생 우정을 나누고 죽는 날까지 그와 신뢰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베토벤의 편지> 여섯 편 중에서 다섯 편이 엘레노레의 남편인 베겔러와 자신이 사랑했던 엘레노레와 주고받은 편지일 정도이다. 십대 후반의 첫 사랑이었던 여성을 무려 36년 동안 마음 변치 않고 사랑했으며 더구나 그의 남편까지도 함께 우정을 나누었다는 것을 보면 베토벤의 순수한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다시 생각하면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을 마음씨 고운 베겔러가 사랑하기 때문에 어쩌면 많은 위안이 되었으리라.

 

1792년 베토벤의 나이 23살 때 고향을 떠나 당시 독일의 음악수도인 비엔나에 정착했으며 책을 읽다보면 베토벤은 1787년 비엔나에 정착하기 전에 짧은 방문으로 모차르트(1756 ~1791, 35)와 만났으나 둘 사이는 서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같고 1790년에는 하이든(1732~1809, 78)에게 몇 번의 레슨을 받았으며 살리에르(1750~1825, 75)로부터는 성악 작곡법을 배웠다 하였다. 당시 나이도 어리고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던 베토벤이었을 텐데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조우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시기는 유럽대륙이 스산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베토벤이 19살이었던 1789년에는 프랑스혁명의 회오리바람이 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기로틴에 목이 잘려 나가던 상황이었다.

 

아무튼 1795년 3월 음악가로서 피아노 연주공연으로 데뷔를 했으며 그의 수첩엔 "육신은 아무리 약할지라도 나의 정신은 꼭 이기고 말리라! ...... 스물다섯 살! 나도 이제는 스물다섯 살이다....... 인간으로서 모든 역할을 드러내야할 나이가 된 것이다."라고 썼다 한다. 그리고 이 시기 조금 후에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 (Dann soll meine Kunst sich nur zum Besten der Armeh zeigen)" 라고 썼다 한다.

 

이 글을 보면 베토벤은 이미 20대 중반에 자신의 음악이 어느 목적을 위해 쓰여 져야 하는가를 분명히 자각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예술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일찍이 간파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26살부터 찾아온 귓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수많은 위대한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음악가에게 귓병은 치명적이어서 처음엔 주변사람들에게도 숨기다가 32세가 되는 1801년에는 친구 베겔러와 아멘다 목사에게 괴로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잠깐 사랑에 빠졌던 여인이 줄리에타 기타르디였으며 이 여인을 위해 소나타 OP 27 일명 <월광, Moonlight sonata>을 작곡하여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1803년 베토벤을 버리고 갈렌메르크 백작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베토벤을 슬프게 하였으며 더구나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베토벤을 이용하기까지 하여 베토벤을 더욱 난처하게 하였다 한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갈등 그리고 두 동생 카알과 요한의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 등으로 살아 갈 용기를 잃은 베토벤은 사후에 유명해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게 된다.

 

총 여섯 페이지로 된 1802년 10월 6일자의 편지의 끝은 "나의 동생 카알과 (요한)에게 내가 죽은 뒤에 읽고 실행하도록"이 덧붙여졌다. 하인리겐슈타트, Heiligentadt는 당시 비엔나 교회지역으로 가난한 음악가와 화가들이 살던 조용한 곳이며 하인리겐, Heiligen은 영어 Henry에 해당하고 슈타트, stadt는 마을이란 의미로 그래서 Altstadt, 알트슈타트는 영어로 Old town이라는 의미이며 독일에는 ‘슈타트’라는 어미가 붙은 지명이 많다. 요제프 하이든의 묘가 있는 Eisenstadt, 아우디자동차 박물관이 있어 이름이 잘 알려진 Ingolstadt, 훈데르트 바서라는 화가이자 건축가가 설계한 주거건물이 있는 Darmstadt 등이 그렇다. 나는 2013년 늦은 봄 비엔나에 들렸을 때 어느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근처가 바로 하인리겐슈타트라고 하여 바로 이 베토벤의 유서가 떠올라 퍽 반가웠으나 시간이 없어 들리지 못했었다. 그곳을 가보지 않았던 일이 지금 생각하면 퍽 아쉽다. 사실 베토벤은 경제적 형편과 여러 사정으로 비엔나 생활 35년 동안 약 30번의 이사를 했다고 하니 거의 일 년에 한 번은 집을 옮긴 셈이다. 그래서 비엔나에 베토벤이 살았다는 또렷한 집이 없다.

 

이 유서에는 그동안 자신에게 섭섭하게 했던 카알을 용서하면서 몇 가지 당부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부분이 인상 깊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보다 행복하고 고생이 덜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의 아이들에게 도덕을 권하라. 도덕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요. 돈이 아니다, 나는 경험에 비추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었을 때, 나를 받들어 준 것은 도덕이었다. 자살로써 인생을 끝마쳐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예술의 덕택이기도 하지만, 또한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잘들 있거라. 서로 사랑하라! 나의 모든 벗들(하략)"

 

그러나 이 유서를 쓰고 자살로 삶을 마치지 않고 25년을 더 살았다. 베토벤의 유명한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이 유서 이후에 쓰여 졌으며 전혀 귀가 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곤궁한 삶과 속을 썩이는 동생들 그리고 나중에는 대를 이어 말썽을 부리는 조카들을 걱정하면서 작곡을 하였다는 사실이 베토벤의 불굴의 정신을 대변하며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정신적으로 고난의 삶에서 승리한 음악의 거인이고 인간적 성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1803년 <제2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음악외적으로 정치성향은 공화주의 원리를 사랑하여 프랑스를 위하여 보통선거를 희망하였으며 보나파트르 나폴레옹 장군이 이를 실현하여 인류행복에 기초를 닦아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나폴레옹 장군을 위한 <제3 교향곡>을 작곡하여 헌정하려 했으나 그가 황제에 오르자 실망하여 표지를 찢어버리고 대신 "어느 영웅을 위한 행진곡"으로 제목을 바꾸었으며 베토벤의 친구이자 옹호자였던 바스티유의 승리자 로코비치에게 <영웅교향곡>과 <제5 교향곡>을 헌정하였다 한다. 이후 1805년 <현악 4중주곡 OP 18> 등의 작곡에 힘을 쏟았으며 평생 고통의 세월을 보낸 베토벤에게 그래도 가장 평온했던 시기인 1806년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5월 베토벤이 레슨을 했으며 친구였던 프란츠 백작의 여동생 테레제 폰 브룬스빅크와 약혼하였다. 사실 이 여성은 줄리에타 기차르디오 사촌지간이었고 베토벤은 사실 이 여성의 여동생인 죠세핀에게도 연정을 품었다 한다. 이 시기에 <열정 소나타>를 작곡하여 오빠 프란츠에게 그리고 꿈결 같고 환상적인 <소나타 OP78>은 테레제에게 바쳤다. 그러나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약혼은 파기되었는데 후일 음악사가들은 베토벤의 낮은 신분과 빈곤이 그 이유로 짐작되고 있지만 테레제는 1861년 사망 전까지도 베토벤을 사랑했으며 베토벤도 파혼 후 수년이 지난 1816년에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은 그녀를 처음으로 만났던 그 날과 같이 벅차게 뛴다"라 말했다 한다. 또한 테레제는 자기의 초상화를 베토벤에게 주었는데 헌사로 "보기드믄 천재, 위대한 예술가, 착한사람에게 T. B."로 썼다 한다. 베토벤은 친교를 맺고 사랑을 주고받은 여성이 몇 명이나 되지만 결혼에 이르지 못하여 평생 혼자 살았으며 베토벤과 주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도 출판된 걸 본 일이 있다. 1810년 사랑은 사라졌지만 명성은 높아지고 베토벤은 자신감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각으로 당당한 자세를 취하였다 하며 1812년 존경하는 괴테(1749~1832, 83)를 만났으나 괴테의 천재성은 인정하였지만 서로 뜻은 맞지 않았다 한다. 사실 베토벤은 젊은 시절부터 별다른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많은 독서를 통하여 호머, 플루타르크, 소크라테스,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였고 특히 호머의 오딧세이아를 애독했다 한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의 위대한 음악가 화가들이 그냥 위대해 진 게 아니고 많은 독서로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키웠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빈센트 반 고흐도 수많은 책을 읽었으니 말이다.

 

베토벤의 명성이 최고에 다 달은 시점에 그가 비엔나를 떠나려는 것을 막기 위해 부유한 세 귀족들인 루돌프대공, 로코비츠공과 킨스키공은 막대한 연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귀족들도 차례로 세상을 떠났으며 음악적 유행도 이탈리아 롯시니를 향해 바뀌었고 엘레노레의 오빠 슈테판백작과도 사이가 벌어져 베토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처지에 이르러 고독한 처지에 빠졌다. 1816년 그의 일기에 "나에게는 벗도 없다. 천하에 고독뿐이다."라는 글이 보인다 한다. 베토벤의 청력은 점점 약해져 1822년 그가 지휘했던 <피델리오>공연은 실패하였으나 1824년 <제9 교향곡>지휘에서는 청중들의 우래와 같은 박수소리도 듣지 못하여 한 여자가수가 그를 청중 쪽으로 돌려놓아 겨우 그가 상황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베토벤에게 또 다른 고민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폐병으로 죽은 동생 카알의 아들을 마치 친 아들처럼 생각했는데 후견문제로 재수씨와 소송을 치렀고 이 조카 또한 말썽을 부렸으며 베토벤이 깊은 관심에 도리어 부담을 느끼며 "삼촌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더욱 나쁜 사람이 되었다.” 라고 하며 1826년 자기 머리에 피스톨을 쏘아 자살까지 시도하여 베토벤을 크게 낙심하게 하였다.

 

베토벤의 작품 내용으로 <제9 교향곡>의 작곡과정을 5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기술하였다. 사실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 교향곡은 어느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특히 <제9 교향곡>은 형식, 규모, 내용 모두 그 어느 작품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이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오케스트라 기악곡에 남녀 독창과 혼성 합창을 편성한 독특한 형식, 100명이 넘는 모든 종류의 악기를 동원한 기악 연주에 수많은 합창단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어 한 시간이 넘는 연주시간 그리고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넘어서 환희의 절정에 이르는 내용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책에 없는 내용으로 1981년 네덜란드 필립스전자회사와 일본의 소니에서 음원 저장 장치에서 신기원을 이룩한 Compact dice.를 개발하여 세계표준으로 정하면서 그 크기를 휴대성과 저장용량을 최적화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고심하는 과정에서 C. D. 한 면에 베토벤의 <제9 교향곡>을 담아서 음악 감상자가 곡이 끊이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이야기를 수십 년 전에 어느 기록에서 읽은 기억이 나기도 한다. 이리하여 제품은 직경 12센티미터에 저장용량을 74분으로 했다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 하지는 않았지만 그 만큼 서양에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며 아무튼 C.D. 한 면에 제9교향곡이 들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환희의 작곡과정으로 돌아와 베토벤은 전 생애의 삶의 목적 중 하나로 일찍이 결정했던 제9번 교향곡은 실러의 시 <환희에 부치는 송가>는 1785년 쓰여 졌으며 1793년 그가 아직 비엔나에 오지 않고 본에 있을 때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한다. 비엔나에서 궁핍과 자신의 홀대에 실망한 베토벤은 런던으로 이주하여 <제9 교향곡>을 초연하려 했으나 1824년 여러 귀족들이 앞장서서 간곡하게 탄원하여 결국 그해 5월 비엔나에서 초연하였다 한다. 보통 황실 내빈들이 청중으로 입장한 경우는 세 번의 갈채를 보내는 관례를 벗어나 연주회 끝에 다섯 차례 갈채와 경찰이 소요를 진압해야할 정도로 요란하였다 하며 이런 열렬한 반응에 감격하여 베토벤은 잠시 의식을 잃고 신들러의 집으로 실려가 휴식을 취했다 한다. <제9 교향곡>은 독일에서는 1825년 4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연주되었고, 3월에는 런던에서, 1831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으며 멘델스존, 바그너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다. <제9 교향곡>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베토벤의 마음은 전보다 훨씬 가벼워져 제10 교향곡의 구상을 비롯하여 규모가 큰 여러 주제의 음악작곡을 계획하였으며 사실 애초에 교향곡에 합창을 넣으려는 구상은 제10 교향곡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어 9교향곡에 사용하였다 하며 결국 10교향곡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한편 베토벤의 음악 이외의 문제에 대하여, 여러 편지와 자료를 조사해보면 종교적 입장은 폭이 넓고 자유로웠으며 "그리스도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유대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당시로는 퍽 파격적인 말을 했다 한다. 20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도 감히 이런 말을 하기 어려운 실정인데 베토벤은 종교적으로도 소신이 굳은 사람임을 알 수 있고, 소신을 떠나 의지력도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정부당국의 결점을 공공연히 지적하고 재판소송의 강압적이고 번거로운 절차, 경찰권의 남용, 무능한 관료주의, 귀족계급의 특권 등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여 경찰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서 몽상가 정도로 간주하여 넘어가기도 했다 한다.

 

사후에 베토벤의 질병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발간되어 <베토벤의 최후의 병과 죽음>이란 제목의 논문과 <베토벤의 생애 마지막 나날의 의학적 성찰>이란 논문이 비교적 참고할 만하다 한다. 베토벤 사망 몇 달 전 늑막염성감기로 세 번의 수술을 받았으나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하였고 이 힘든 시기에도 고향 친구 베겔러에게 편지를 썼으며 1827년 3월 26일 눈보라가 휘날리던 이른 봄 비엔나에서 이 위대한 인물은 영면하였다. 대부분 잘 알려진 사실들이지만 오랜 만에 다시 읽어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삶을 반추해보았으며 그동안 연주회장에서 여러차례 베토벤의 대작들을 감상하였으나 특히, 작년 2012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송년음악회에서 제9교향곡 <합창>을 인상 깊게 감상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올 해에도 그런 기회를 기대하고 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