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를 읽고...

깃또리 2019. 6. 11. 10:59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를 읽고...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그림

랜덤하우스

2013. 06. 21.

   

 

책 표지에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여행에서

나는 아무 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지난 2008년 작가 김영하는 나이 40세에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국립예술대학교수, 라디오 문화 프로그램 진행자,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서울의 아파트,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자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이 쓴 소설은 꾸준히 팔려 인세도 상당히 들어오는 그야말로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득 어느 날 자신이 너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자각에 이를 탈피하고자 우선 캐나다 밴쿠버 UBC대학으로 떠나기 위해 집과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2008년 8월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집이 팔린 시점이 5월 중순이라 2달 반이란 기간을 보내기 위해 궁리하다가 2007년 어느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 파일럿 프로그램을 찍는 여정에 참가하여 한 번 가보았던 시칠리아를 여행하기로 아내와 함께 결정했다 한다. 결국 이 책은 소설가가 작품을 쓰기 위한 재충전 기간 동안 시칠리아 여행을 하며 적은 기록이다.

 

  책에도 나와 있지만 지리적으로 시칠리아는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반도와 가장 가까운 섬이지만 고대 그리스가 지중해 해상에서 위세를 떨치던 시기에는 그리스 속령이었다. 그래서 시라쿠사나 타오르미나를 비롯한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에는 그리스인이 건설한 원형극장이 아직도 남아 있어 여름에는 이곳에서 다양한 공연을 열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책에서 고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그리스인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는 바로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출생하고 활동하여 그리스와 로마가 싸울 때 로마병사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당시 로마 공격을 지휘했던 집정관 마르쿠스 마르켈수스는 아르키메데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어 그를 발견하면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병사들에게 명령하였으나 로마군이 성안에 진입한 것도 모르고 골똘히 문제를 풀던 허름한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병사의 칼에 맞아 죽었다 한다. 또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시칠리아를 여러 번 방문했다 한다. 그래서 시라쿠사에 가면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을 붙인 호텔, 관광회사, 분수, 거리 이름, 식당 등이 있고 심지어 '유레카'라는 제과점도 있다 하며 가끔 플라톤의 이름을 딴 간판도 볼 수 있다 한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본토와 여러 이질적인 요소가 있으며 그러다보니 로마로부터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여러 불이익을 받았으며 이러한 불이익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결사조직이 '마피아'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원래 마피아는 시칠리아 농민보호 비밀조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이곳 사람들이 대규모로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국에서 그 악명을 떨치며 영화 "대부, The God Father" 시리즈에 의하여 일반사람들에게도 마피아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시칠리아에 들어가는 일에서부터 도착하여 이동하는 중에 여러 가지 불편한 일들을 감내하며 시칠리아 여행을 하였으나 돌이켜보면 그곳에서 잃은 것은 없다고 하였다. 사실 이탈리아는 선진국의 대명사라 할 G7의 태동시기부터 회원국이며 세계 경기부침에도 불구하고 그 지위가 크게 흔들리지 않은 나라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부패하고 타락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많았으며 사회 시스템 또한 부실하다고 소문이 났고 수십 년 동안 좀도둑과 소매치기의 소굴이란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않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경제문제에서는 크게 흔들림이 없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이탈리아 교통 특히 철도수송의 문제, 관광정보 부족 등으로 여러 곤란을 겪은 일을 나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 넘게 유지했던 로마제국이 남긴 엄청난 문화유산과 좋은 기후 그리고 타고난 낙천적인 이탈리아 사람들의 품성에서 우리들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여행의 묘미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시칠리아와 관계없는 별개의 한 가지 작은 사건에 주목하였다. 김영하 작가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장군까지는 오르지 못한 것 같으며 대대장 즉 중령이나 대령쯤에서 전역한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부대 근처나 부대 내의 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어느 시기에 집에서 기르던 아버지가 귀여워하는 셰퍼드 '꾀돌이'가 어느 날 행방불명이 되어 병사들을 동원하여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여 휴전선 철책이 가까워 월북한 것으로 단념한 일이 있다 한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아버지도 전역하고 당시 부하 병사 한 사람이 집에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실은 당시 11중대원들이 그 셰퍼드를 잡아먹었다고 실토하며 용서를 비는 것을 어린 김영하는 엿들었다 한다. 아버지는 지난 일이라면서 "그럴 수도 있지, 그 나이 때는 쇠도 삶아 먹을 때가 아닌가,"라 하면서도 "끄응. 한숨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짧게 냈다."고 하였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아무리 단백질 보충이 급했다 해도 군대에서 더구나 자기 부대의 대대장이 기르는 개를 죽이다니. 조금 비약하면 작가의 아버지가 덕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11중대원들이 정말 못된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시칠리아 시골마을을 여행하다가 평화로워 보이는 어는 식당 앞에 양을 잡아 목을 꿰어 벽에 걸어 놓기 위한 물음표를 닮은 쇠갈고리를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이 셰퍼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기르던 내가 좋아하던 개를 아버지 친구들이 뒷산으로 끌고 갔던 기억으로 무척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 이제 열한 살이 된 우리 집 강아지 “별”이를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지중해 연안은 계절마다 방향을 바꾸어 바람이 세게 불어 이 지역이 나오는 글에는 바람 이야기가 항상 빠지지 않는다. 그리스의 크레타 출신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영혼의 자서전>등에도 수 없이 바람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여름에는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시로코(지브리)가 겨울에는 대서양에서 미스트랄이 불어온다고 하였다. 같은 방향의 바람이라도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왜냐하면 그리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말이 각기 다르고 영어 표기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지중해 인접한 나라에서 미의 여신도 영어 '비너스'도 그리스인은 '아프로디테' 페니키아인은 '아스타르테'로 그리고 시칠리아인은 '베레네'라는 말이 나온다. 같은 대상일지라도 누가 부르냐에 따라 바람과 미의 여신의 이름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끝 부분의 <죽은 신들의 사회>라는 소제목 아래의 글에서는 아그리젠토라는 작은 도시를 소개하는 글이 나온다.

 

모든 시칠리아 여행 안내서는 대부분 이곳에 거의 온전하게 보존 된 '콩코르디아 신전'을 표지 사진으로 삼는다 한다. 사진을 보니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매우 흡사하지만 보존 상태가 훨씬 양호하다. 즉, 지붕만 없을 뿐 기둥과 테두리보 그리고 박공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아그리젠토는 아편밀매와 마피아로 악명이 높다고 한다. 아편은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에서 조달하고 마피아는 이를 유럽 전역에 나른다 한다.

 

두 달 반을 시칠리아에서 보낸 작가부부는 힘들 일을 당하여 낙심 할 때나 혹은 둘 중 누군가가 당황하여 허둥대면 어느 식당 주인이 말하였던 "Senora, prego. E caldo"를 마법의 주문처럼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떠나 볼 필요가 있다. 먼 이국의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나와 다른 태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수십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은 되도록 멀리 그리고 고생이 따르더라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

 

책 마지막은 <Memory Lost>라는 후기를 겸한 글이 나온다. 사실 'Memory Lost'는 영어 표현으로는 틀렸지만 이탈리아 사람에게도 영어는 외국어다 보니 유명한 라틴어 경구인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와 같은 언어 구조로 이해하여 이탈리아 시칠리아 어느 보세구역 입구 안내문에 나온다 하였다. 저자는 이를 '유실물 주의' 정도로 이해했으나 다시 되새겨보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로 고쳐 받아들였다 한다.

 

그래서 작가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을 마지막에 실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짱 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와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