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유토피아, Utopia>를 읽고...

깃또리 2019. 6. 4. 14:45

<유토피아, Utopia>를 읽고...

토마스 모어/ 김용일 역주

계명대학교출판부

2013. 05. 08.

   

   <유토피아, Utopia, 1515년 출간>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유토피아라는 말은 대부분 알 것이다. 물론 나 역시 토마스 모어가 책을 지었다는 것은 알지만 정작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다 이 책을 발견하고 조금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대부분 서양고전들은 책이 두꺼운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두꺼운 책은 요즘 같이 바쁘고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진득하게 읽기가 부담이 되어 피하게 되는데 이 명성이 자자한 책이 해설을 포함해서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어서 요약본이 아닌 가 의심을 하며 펼쳐보았다. 기왕 읽으려면 완역본을 읽으려고 책 뒤의 <해설>을 먼저 읽었으나 어느 줄에서도 요약본이라는 내용은 없고 다시 책 앞의 <역자서문>을 보니 번역을 위해 Pengine Classics로 출판된 Paul Turner가 번역한 <Utopia>를 대본으로 삼았다고 나왔다. 즉 토마스 모어가 당시 라틴어로 썼기 때문에 영문으로 고쳐 쓴 것을 우리말로 옮겼다는 말이다. 아무튼 지레 겁을 먹고 피하던 고전 한 권을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겠다는 기쁨에 다른 책을 밀치고 읽기시작하여 오늘 읽기를 마쳤다.

 

책의 본문은 <모어가 피터 자일즈에게 보낸 편지>, <바스라이덴에게 보낸 피터의 편지>그리고 제 1권, 제2권 순서로 구성되었다. 먼저 <모어가 피터 자일즈에게 보낸 편지>는 토마서 모어가 실존 인물인 안트워프 장관을 역임하고 <우신예찬>의 저자인 에라스므스의 친구이자 모어에게 에라스므스를 소개하기도 한 피터 자일즈(1486~1533)에게 쓴 편지다. 내용은 자신이 지은 책을 보내면서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줄거리를 적고 끝으로 계속 지도 편달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바스라이덴에게 보낸 피터의 편지>는 피터가 아이레의 수도원장이며 카스틸라의 찰즈 왕의 고문관 제롬 바스라이덴(1470~1517)에게 자신이 모어로부터 책을 받았으며 간단한 원고내용과 추천서를 부탁하는 편지이다.

 

1권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어 독자들이 뻔한 허구이지만 읽는 동안은 사실과 같이 느끼도록 하였다. 토마스 모어가 당시 영국 왕이었던 헨리 8세의 지시에 의하여 안트워프로 일을 보러 갔으며 이때 피터 자일즈를 만났고 그는 토마스 모어에게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를 소개 하였다는 것이다. 즉, 피터 자일즈는 실존인물이고 라파엘은 허구의 인물이다. 더하여 라파엘은 미 대륙에 처음 항해하였던 역사적인 인물 아메리고 베스푸치(1451~1512)와 함께 해상활동을 하다가 잔류하여 유토피아에 5년간 생활하다가 돌아온 사람으로 토마스 모어피터 자일즈에게 유토피아 이야기를 해 준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책은 두 사람이 주로 질문하고 한 사람이 대답하는 대화체 형식이다. 라파엘이 전하는 유토피아에 대하여 간추리는 것도 쉽지 않아 내가 읽으면서 눈에 띄는 부분 몇을 추려보았다. 라파엘은 약 여섯 페이지에 걸쳐 유토피아 사회체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재산의 균등한 분배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중략) 바꾸어 말하면, 나는 사유 재산이 존재하는 한 우리들은 결코 공평한 재산의 분배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행복한 세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소수의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과 고뇌의 짐을 지고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모어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나는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사람들이 상당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게 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착실히 일하는 자도 없을 것입니다. 이윤추구를 위한 동기가 없으면 누구나 게을러지기 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일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토마스 모어가 공산주의를 정립한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66세),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76세)보다 300년도 더 이전 사람인데 책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정면 대비를 다루었으니 말이다. 물론 인류의 수렵시대를 원시공산주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16세기에 이분법을 사용하여 체제구분을 확실히 한 일이 의외이다. 토마스 모어가 Communism, Capitalism이란 영어가 아닌 라틴어로 표현했을 텐데 원문이 어떠한지 또한 궁금하다. 1부 마지막 부분은 토마스 모어가 점심을 하고 나서 오후에 다시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하여 달라고 하며 끝을 맺는다.

 

제2권은 라파엘이 유토피아가 폭 200마일(약 320킬로미터) 길이 500마일(약 800킬로미터)크기이며 11마일되는 해협으로 대륙과 떨어져 있는 섬이며 54개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는 지형 설명을 시작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풍습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내가 읽으면서 특히 주목한 부분을 단편적으로 적어 본다. 매달 한 번의 휴일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시대 보다 적지만 500년 전의 생각이며 하루 노동시간도 오전 3시간 점심 휴식 시간 2시간이고 오후 3시간 일하여 노동시간은 모두 6시간뿐이니 현재의 여덟 시간 보다 짧다. 유토피아인은 그리스계통이며 언어도 페르시아 언어와 흡사하다고 하였으며 지명과 관직명은 그리스 잔재가 남았다 하였다. 이를 보면 모어는 고대 그리스문명에 애정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자살한 사람은 매장이나 화장을 해주지 않고 연못에 버렸다 한다. 이는 당시 가톨릭 종교의 영향이라 생각한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죄악 시 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범죄자는 노예 형이고 여성들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면 당시 영국이나 유럽사회에서 여성들의 화장이 지나쳐 모어는 이를 꼬집었다고 볼 수 있다. 법률서는 짧고 쉬우며 종교는 특별한 일신교가 아니고 일종의 다신교이며 기독교 우월성을 주장하다 제지 받은 사람이 체포되어 공공질서 문란 죄로 기소되어 유죄로 판정되면 국외 추방되었다고 하였다. 이 또한 당시 영국사회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의 폐해가 어느 정도였을까 유추해 볼만한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명징한 사고력을 지닌 식자들은 이미 기독교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오래 전부터 인식하고 있는 것을 여러 책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조금 역설적이고 재미있게 본 대목으로 실용품인 식기나 컵은 유토피아에서는 정성을 들여 좋은 재료로 만들지만 더러운 일상용품 예를 들면 요강이나 죄수용 족쇄는 순금으로 만들고 또한 죄수들에게는 금 귀걸이, 금반지, 금 목걸이를 준다고 하였다. 이 또한 영국이나 유럽사회가 사치가 심하였고 특히 금에 대한 애착이 지나침을 우회적으로 조롱하고 비판한 것이라 불 수 있다. 유토피아의 국방문제를 다루면서 군인은 모두 용병으로 구성하였으며 ‘짜폴레타 Zapoletae’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짜폴레타는 강조접두사 Za,와 '팔다'라는 poletes 라틴어 합성어로 사실은 스위스 사람을 말한다고 페이지 아래 각주에서 밝히고 있다. 사실 지금 스위스는 천혜의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과 세계최고의 시계공업으로 그리고 영세중립국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토마스 모어 시절만 해도 산악지대에 자원도 없어 이 나라 저 나라의 싸움터에 용병을 보내 그 수입으로 겨우 삶을 유지하던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바티칸 교황청의 군인들이 스위스 사람들인 것은 그 어떤 신성한 종교적인 목적이나 대의명분이 있어서 아니라 단지 오래 전부터 이어 온 용병 전통이 남아 있는 어쩌면 서글픈 스위스 운명의 흔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래서 역사를 반추하는 재미가 있다.

 

뒷부분 <해설>에는 유토피아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소개하였다. 그리스어 ou(=no라는 의미)와 topos(=place 장소)의 합성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의 토마스 모어가 만든 신조어였다 한다.

 

이 책이 쓰여 지기 전에 이미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국가, Politeia>에서, 캄파넬라는 <태양의 나라, Civitas solis>에서, 그리고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새로운 대륙, Nova Atlantis> 등에서 이상사회, 이상국가가 펼쳐지는 내용의 책을 지었으며 해설자는 토마스 모어는 특히 플라톤의 <국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사회는 귀족중심이 아닌 철학자가 중심이 되어 계급과 빈부의 차이가 없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로 설정하였으며 캄파넬라는 현명한 군주의 출현으로 강제성을 지닌 이상국가를, 베이컨은 과학자가 지배하는 엘리트 사회로 같은 이상사회라 해도 그 모습들은 조금씩 다르다 한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통하여 알리고자 한 내용은 첫째,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 둘째, 아직 도달하지 않은 더 나은 미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보았다. 모든 문화와 지적 생산물은 그 당시의 시대적 산물로 <유토피아>도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 불어 닥친 휴머니즘과 전 시대의 여려 저작에 의한 영향의 산물로 탄생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50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우리의 사회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데올로기 논쟁과 함께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를 비롯한 사회 부조리에 대하여 토마스 모어의 이 <유토피아>는 우리들을 다시 성찰하게 하는 훌륭한 책이다.

 

  

* 토마스 모어를 더욱 자세히 알려고 인터넷에 들어갔는데 아래와 같은 모어에 대하여 대단히 유익한 글이 있어 복사하여 붙여 보았다.

<유토피아>라는 책 한 권으로 일약 유명해진 토머스 모어는 그 책만큼이나 역설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이상세계”를 뜻하는 단어로 종종 사용되는 “유토피아”는 실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또한 책 속에서 “유토피아”의 사회상을 전달하는 주인공 라파엘 히슬로데아우스(Raphel Hythlodeaus)는 “헛소리 하는 사람”을 뜻한다. 정리하면, 모어는 ‘어디에도 없는 섬에 대한 헛소리’를 책으로 써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 자신의 소설을 ‘헛소리’로 풍자했던 만큼이나 그의 생애 역시 자신이 그려낸 이상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10년 가까이 수도사가 되고자 고행의 길을 걸었으나, 만난 지 얼마 안 된 17살 소녀와 결혼으로 포기해버린 성직자의 꿈. 전제적인 왕권을 부정하면서도 권위에 복종할 줄 아는 소시민성. 한 때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음에도 직접 개신교도를 잡아들여 집에 가두어버리는 이중성. 사형 판결이 두려워 본인의 신념을 포기해버렸지만, 막상 사형을 앞두고서는 농담이나 주고받는 대담함 등 그의 생애 전반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은 풍자로 가득했던 그의 [유토피아]만큼이나 유머러스하다. 때문에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유토피아]가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학문적 글이 아니라, 단지 본인의 유머 감각을 뽐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를 내놓기까지 한다.

 

결혼 때문에 포기한 성직자의 꿈

1478년 2월 7일 유명한 법학자였던 존 모어(John More, c. 1451~1530)의 아들로 태어난 토머스 모어는 어려서부터 사립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13살이 되던 해에는 켄터베리 대주교이자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존 모튼(John Morton, c.1420~1500)의 집에서 시종 노릇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유력자의 집에서 시종 노릇을 하며 인맥을 넓히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교육과정이었다. 당대 잉글랜드의 가장 대표적인 유력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모튼은 재기가 넘쳤던 모어를 무척 아꼈고, 모어가 르네상스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적극 지원해주기도 했다. 나아가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며 모어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1492년부터 옥스퍼드에서 고전 교육을 받기 시작한 모어는 단 2년 만에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해졌다. 하지만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뛰어난 법학자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 존 모어는 아들을 런던으로 소환하여 전문적인 법학 교육을 받도록 권유했다. 모어 역시 법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자신의 학업능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모어는 학교에서도 위트 있는 법학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런데 뛰어난 법률가가 될 거라던 주변의 확신도 잠시, 모어는 금욕주의에 깊이 빠져들어 수도사의 삶을 몸소 실천하기 시작한다. 거친 옷을 입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고행을 하겠다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1502 경에는 아예 수도원 옆에 살면서 수도사의 삶에 적극 동참했으며, 이 생활이 2년 넘게 지속되자 그는 신실한 수도원지기와 전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토머스 모어의 가족.

오랫동안 수도사가 되겠다며 고행의 삶을 살았던 모어의 꿈을 날려버린 것은 그보다 10살 어렸던 17살의 아름다운 소녀 제인 콜트(Jane Colt, 1488~1511)였다. 1505년, 제인과 사랑에 빠진 모어는 수도사의 꿈도 버려두고 급하게 그녀와 결혼했다. 모어는 너무도 사랑하는 아내와 모든 시간을 함께 하고자 했고, 스스로 문학과 음악 선생을 자처하며 일상생활 전부를 공유했다. 모어는 제인이 좋은 교육을 받기를 바랐고, 3명의 딸과 1명의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해줄 수 있는 현명한 어머니로 성장하기를 꿈꿨다. 그러나 유난히 행복했던 그의 첫 번째 결혼생활은 1511년에 갑자기 끝나고 말았다. 그의 사랑하던 아내 제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모어는 자신의 비통한 마음도 잠시, 아이들에게 좋은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곧 재혼했다. 모어의 두 번째 부인은 앨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 c.1475~1551)이라는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이미 전 남편과 3명의 여자 아이를 두고 있던 앨리스는 심지가 굳고,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고 한다. 앨리스는 자신의 아이들은 물론 모어와 제인 사이에 3명의 여아와 1명의 남아를 무척 잘 키웠으며, 비록 행복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주도했다. 앨리스와 모어의 결혼 생활이 비교적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 두 사람의 유머 코드가 달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주변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는 것을 즐겼던 사람들이었는데, 서로의 웃음 포인트가 달랐던 나머지 상대방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모어는 앨리스의 외모에도 별로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모어는 자신의 아내를 두고 “내 아내는 진주도 아니고, 소녀도 아니다”라고 평가한 바 있는데, 이는 자신의 아내가 ‘예쁘지도 않고, 젊지도 않다’는 말을 의미한 것이었다. 한편 앨리스 역시 모어가 이렇다 할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실망한 바 있었는데, 당시 모어는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던 차였다. 여전히 제인과의 결혼 생활을 잊지 못했던 모어는 앨리스와의 결혼 생활보다 자신의 첫째 딸 마가렛 교육에 더욱 애정을 쏟았다. 모어는 아들과 딸에게 동등한 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마가렛은 굉장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모어는 이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으며, 마가렛 역시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다. 훗날 모어가 런던탑에 갇혀 있을 때나, 그가 사형을 당했을 때에도 가장 먼저 찾아가 문제를 수습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가렛이었다.

 

헨리 7세에게 대들다가 낙마했던 모어의 승승장구

 

겨우 26살의 나이로 영국 의회에 진출한 토머스 모어는 즉시 헨리 7세(Henry VII, 1457~1509)의 지나친 과세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러한 반대에 밀려 헨리 7세는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헨리 7세는 토머스 모어의 아버지를 런던탑에 가두고, 모어에게는 벌금형을 부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마침 제인과의 행복한 생활 중이었던 모어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어차피 모어는 정치적 야심도 없던 터라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나버렸고, 변호사 생활에 열중했다. 이러한 그를 새삼 끌어낸 것은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였다. 1510년부터 모어는 런던시의 고위 행정관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는 정직하고 능력 있는 행정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1514년에는 추밀원의 일원으로 들어갔으며,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외교관이었던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 1473~1530)와 함께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외교 업무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은 모어는 1521년에 정식으로 작위를 수여받고, 재무부에 자리 잡게 된다. 헨리 8세의 개인 비서이자 조언자였던 모어는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갔고, 외교업무를 전담함은 물론 왕과 신하들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그는 왕과 울지 사이를 조율하는 핵심인물이었으며, 매일같이 헨리 8세, 캐서린 왕비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밤늦게까지 토론하곤 했다. 능력 있고 유머러스한 모어를 유난히도 좋아했던 헨리 8세는 모어가 어려운 임무를 손쉽게 해결해가는 과정에 감탄하곤 했으며, 모어를 깜짝 방문하여 놀라게 하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뛰어난 능력은 물론 국왕과의 친분을 발판 삼은 모어는 결국 1529년 수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런던의 제빵사였던 할아버지와 법률가였던 아버지 가문의 둘도 없는 자랑거리가 된다. 이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헨리 7세에 눈 밖에 났던 초보 법률가치고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주의를 꿈꾼 [유토피아]

 

애초에 모어가 헨리 7세에게 대들었던 것은 전제왕권에 대한 그의 반감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장미전쟁(1455~1485)의 후유증을 눈으로 목도했던 모어는 안정된 국가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힘을 가진 국왕은 전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으며,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왕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못하도록 견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모어는 권위나 권력의 존재 자체는 필요하다고 여겼는데, 이는 안정된 정치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권위가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리처드 3세]라는 역사서를 통해 전제 권력의 잔인함을 고발한 바 있던 모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럽 국가들의 문제점을 재미있게 풍자하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그려간다. 1516년 라틴어로 쓴 [유토피아]라는 그의 소설에는 바로 모어가 생각하는 이상세계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모어가 친하게 지냈던 네덜란드 출신 휴머니스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휴머니즘 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1 장미전쟁의 한 장면

2 유토피아


 모어가 그려낸 “유토피아”라는 섬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게 교육을 받으며,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이 이뤄진다. 또한 이 섬에는 재산권이나 화폐가 없으며, 모두가 똑같은 집에서 살아간다. 누구나 동일하게 일하고, 동일하게 즐기며, 무료 시장에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누구나 2년 동안 농사를 지어야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공동체는 모어가 한 때 심취했던 수도원적 사회주의(monastic communalism)에 입각한 것으로 성서에도 묘사된 바 있는 초창기 교회 공동체의 삶을 당시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이었다. 모어의 유토피아가 성서에 근거한 사회주의에 가깝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모어가 종교개혁의 불길이 날로 거세지던 당대 상황에서 가톨릭을 지지하고자 소설을 쓴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작품이 그다지 진지한 작품이 아니라는 견해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이 책은 전혀 학술적이지 않으며, 전문적이지 않은 단순한 풍자문학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의 [유토피아]에는 그저 당대 사회 현실에 대한 본인의 유머 감각을 보여주고 싶을 뿐인 의도도 다분히 엿보인다. 그러나 모어의 의도나 연구자의 해석과는 별개로 [유토피아]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열기를 더해가던 유럽 내 다양한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 때 수도사를 꿈꾸었던 그의 경향은 소설 속에 있는 그대로 드러났고, 이는 그가 의도치 않게 종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모어를 신학적으로 보수화시킨 마틴 루터와의 논쟁

 

모어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헨리 8세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였다. [유토피아]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가톨릭적 성향이 짙었던 모어는 1521년에 헨리 8세를 대신하여 마틴 루터에 대항하는 반박문을 보냈다. 이에 교황은 헨리 8세를 크게 칭찬했고, 이후 모어와 루터 사이에 상호 비방문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모어는 루터에게 “너의 썩어빠진 입에서 나는 입 냄새에 구역질이 난다”는 글을 보냈고, 루터 역시 모어에게 “돼지, 머저리, 거짓말쟁이”라는 욕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모어는 이 과정에서 감정이 상했는지, 신학적으로 더욱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는 오직 가톨릭 교회만이 단 하나의 교회이며, 이 전통과 실행은 온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루터와 개신교를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세력으로 지목했다. 그의 시각에서 개신교는 이단이었으며, 교회와 사회의 안정을 파괴하며 “전쟁을 부르는 놈”들이었다.

심지어 모어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개신교도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기도 했다. 수상직을 수행하면서 모어는 6명의 개신교도 화형에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수십 여명에 달하는 개신교도를 자기 집 지하에 가두어두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직접 채찍을 들고 고문에 임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모어 스스로는 그러한 이야기를 부정하곤 했다. 하지만 어쨌든 모어의 이러한 태도는 [유토피아]에 묘사된 종교적 관용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헨리 8세의 갑작스러운 개종과 모어의 몰락, 문제는 모어와 입장을 같이해오던 헨리 8세가 돌연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헨리 8세는 점차 교황권을 부정하기 시작했고, 영국 교회의 수장이 자신임을 외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이 문제는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앤 볼린과의 재혼과 맞물리며 여러 신하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헨리 8세의 오른팔이었던 토머스 울지마저 이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각했으니 그 어려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1529년 울지가 실각한 이후 수상 자리에 오른 모어는 일단 헨리 8세와 왕실 측근들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화해도 잠시, 헨리 8세가 점점 더 교황권을 부정하면서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 헨리 8세

 

2 앤 볼린

 

헨리 8세와 교황의 충돌이 점차 심해지자, 모어는 헨리 8세보다는 교황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어는 헨리 8세가 여태껏 부정해오던 마틴 루터 세력의 간접적 지원 속에 교황을 부정하려는 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모어는 헨리 8세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려는 것을 ‘전제 군주’가 되려는 행동이라 보았고, 이것이야말로 나라의 평화를 깨는 행동이라 판단했다. 이에 1530년 모어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취소를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헨리 8세는 반항하는 모어를 고립시키고자 교황을 지지하는 잉글랜드 내 성직자들을 숙청해버렸다. 헨리 8세와 모어는 표면상으로는 여전히 친하게 지냈으나, 헨리 8세는 점차 모어의 수족을 잘라나갔다. 모어 본인의 명예와 영향력은 유지되는 듯 했지만 그 주변 사람이 계속 숙청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모어는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했다. 사임 당시만 해도 둘은 서로를 걱정하는 듯 헤어졌다. 그러나 1533년 모어가 앤 볼린의 왕비 대관식 참석을 거부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사실 모어는 자신의 불참이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헨리 8세에게 앤 볼린을 왕비로 인정하겠다고 이야기했으며, 왕의 행복과 새로운 왕비의 건강을 빌어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어의 정적들은 대관식 참석 거부를 빌미로 모어에 대한 모함을 늘어놓았고, 이러한 모함의 일환으로 모어는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나기는 했으나, 그의 몰락은 이제 뻔한 것이었다.

 

1534년 4월 13일,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모어는 앤 볼린을 왕비로 인정하는 의회 선언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는 앤 볼린의 아이가 왕위계승권을 갖는다는 왕위 계승법(Act of Succession)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앤 볼린의 아이가 국왕이 될 경우 로마 교회의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완전히 끊기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어는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다. 친우였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 1485~1540)과 큰 딸 마가렛이 여러 차례 찾아와 회유를 독려했으나 모어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1535년 7월 1일, 사형 선고를 앞둔 마지막 재판장에서 모어는 죽음이 두려웠던지 국왕이 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려는 듯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모어의 정적이었다. 그 누구도 모어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고, 단 15분 만에 모어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제서야 모어는 “그 어떤 세속적 인간도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없다”며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정치가의 수호성인’이 된 실패한 정치인

 

1535년 7월 6일, 결국 모어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언제나 유머러스한 말과 행동을 잃지 않았던 모어는 자기가 죽는 순간에도 사형집행인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는 “내 목은 대단히 짧으니 조심하게”라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수염을 옆으로 잡아당겼다. 이어 모어는 “내 수염만큼은 왕의 비위를 거스른 적이 없지”라고 말하며, 아무런 죄가 없는 수염이 잘려나가지 않도록 사형집행인에게 주의를 당부했다고 한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모어의 머리는 런던 브리지에 한 달 이상 걸려있었고, 그의 딸 마가렛이 뇌물을 주고 나서야 간신히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아버지 모어의 시신을 수습하는 첫째 딸 마가렛 사실 헨리 8세를 대신하여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세력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국왕이 교황으로부터 칭찬받는데 공을 세웠던 모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돌연 개신교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를 부정하라는 헨리 8세의 요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터였다. 게다가 마틴 루터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신학적 보수성이 짙어진 모어는 헨리 8세의 갑작스러운 개종을 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마틴 루터 세력과 손을 잡고 교황을 압박하는 헨리 8세의 태도에 정치적 환멸을 느꼈던 듯하다. 결국 검소한 생활태도와 뛰어난 능력, 위트있는 말과 원만한 인간관계로 일구어낸 성공적인 정치가로서의 커리어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모어는 본인이 오랫동안 추구했던 ‘반 전제권력, 반 종교개혁’을 하나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정치인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한 모어가 여전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알다시피 그의 작품 [유토피아]에 대부분 기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유토피아”라는 단어 자체에 익숙하기 때문에 “유토피아 문학”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개척한 인물로 모어를 기억할 뿐이다. 그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대단한 성공을 이룬 정치인이자 공직자였는지, 말년에 그가 어떤 쓴 맛을 보았는지와 관계없이 오늘날 모어는 대개 [유토피아]를 쓴 작가로 남아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토머스 모어가 2000년에 이르러 로마 교회로부터 ‘정치가와 공직자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려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마당에 이루어진 새삼스러운 재평가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하필 ‘정치가와 공직자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었다는 사실도 무척 흥미롭다. 물론 로마 교회 입장에서는 가톨릭을 지키려다 반역죄로 삶을 마감한 토머스 모어야말로 훌륭한 정치인일 테지만, 국왕의 비위를 맞추지 못했다며 자조하던 토머스 모어 본인은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해보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다.

 

[출처] * ‘정치가의 수호성인’이 된 실패한 정치인, 토머스 모어 (Thomas More)|작성자 소리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