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빛의 제국>을 읽고...

깃또리 2019. 5. 14. 12:53

<빛의 제국>을 읽고...

김영하

문학동네

2012.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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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의 소설로는 세 번째이다. 작가에게는 창의성이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소설 3권의 내용이 제각기 독특하여 더욱 감탄을 하였다. 먼저 읽었던 <퀴즈 쇼>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적절히 배치한 환상소설이라면 <검은 꽃>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병탄과정 시기였던 민족수난기인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의 실재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기록에 없는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충하고 독자의 흥미를 일으키도록 소설적 기법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이번 읽은 <빛의 제국>은 전혀 다른 소재를 다룬 소설이다. 한마디로 북한 스파이를 다룬 간첩소설이라  할 수 있으나 말은 스파이 소설이지만 사실 스파이 활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면 북한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어 대학교 영어과를 다니던 본명이 김성훈은 21살 때 북한의 소형 잠수정에 실려 남한에 밀입국한 간첩으로 새 이름은 김기영이며 특별한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벌인 사람이 아니고 단지 남한에 암약하는 간첩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 부분도 크게 다루지 않았다. 북한에서 그의 아버지는 댐 공학자였으며 당성이 뛰어난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김기영이 중학생 때 자살하였으며 비교적 공부를 잘하고 영어 실력이 두드러져 남한 생활에 쉽게 적응하였다. 21살에 남한에 들어 온 김기영은 지령에 따라 서울의 대학교에 입학하고 취직하여 실무를 익힌 다음 영화수입업자로 일하였으며 27살에 장마리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공부 잘하는 현미라는 중학생의 아버지이다.

 

부인 장마리는 외국수입승용차 대리점에 다니며 남편에 대한 의심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점 조직으로 이어진 김기영의 바로 위 상관인 이상혁이 남한 생활 10년이 지난 시기에 홀연히 연락이 끊겨 사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체념하고 서울의 보통시민처럼 11년간 지냈기 때문이다. 소설은 오히려 이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즉, 스파이 소설이지만 스파이 얘기가 아닌 평범하게 살아가는 영화수입업자, 수입자동차 판매직원 여성, 그리고 중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소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작가는 독자들의 흥미 유발을 위해 김기영의 딸 현미가 다니는 중학교의 국어선생 소지현을 등장시킨다. 세금 탈루로 거액의 재산을 모은 지방도시 주류도매상의 딸로 아버지의 부조리한 삶에 환멸을 느껴 대학생시절에 가족과 관계를 끊고 학생운동을 하다 김기영을 만나 몸을 주고받기도 하는 명문 대학출신으로 이제는 중학교 국어선생이며 작가를 꿈꾸기도 하며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냥 '소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또한 소지도 아내 장마리처럼 김기영의 정체를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김기영을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기도 한다.

 

사실 김기영은 공작원 준비기간에 남한 생활을 충분히 대비하였으며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대학교까지 다녀 언어, 행동, 사고방식이 주변사람의 의심을 살만한 점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더구나 10년 이상 상부로부터 연결이 끊겨진 소위 '잊혀 진 공작원'이다 보니 자력으로 부양가족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돌연 어느 날 자신의 컴퓨터를 통한 이메일로 귀환하라는 4번 명령 메시지가 나타나 갈등과 혼란이 일어난다. 전혀 남편의 정체를 모르던 부인 장마리는 김기영의 고백을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자신은 남편 김기영이 없어도 혼자 살아 갈 수 있노라 선언하고, 김기영은 소지와 함께 제3국으로 탈출을 구상해보기도 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김기영은 남한 정보요원들에게 체포된다. 물론 그 중에는 자신이 월급을 주고 일을 시키던 직원도 사실은 정부정보요원임을 알았다. 즉, 남한 정보기관에서 그 동안 김기영을 꾸준히 감시하고 있었으며 그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잊혀 진 공작원'에서 불려 나와 다시 북한으로 귀환하려는 그의 행동을 주시한 후에 그를 체포하여 설득하여 지령을 부여한다. 즉 그가 한 밤중 해안으로 접근하여 북한 잠수정에 맥라이트 신호를 보내며 남한을 탈출하기 직전 해안 서치라이트가 잠수정과 그를 발견하고 기관총을 발사하여 탈출을 저지하는 계획이었다. 이때 "조명탄이 밝혀놓은 해안은 초현실주의적이었다. 하늘은 검은데 세상은 밝았다. 그것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연작을 연상시켰다."라는 문장이 사용된다. 결국 김기영은 남한 정보요원의 도움으로 북한 귀환이 좌절되는 과정으로 끝을 맺으며 어쩌면 김기영의 바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도 수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작가 김영하는 수학에 관심이 많거나 아니면 수학사에 관한 책을 섭렵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태생 갈루아는 수학에 재능을 보인 어린 천재였으며 당시 수학계의 관심사는 '5차 방정식의 일반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22살의 갈루아는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는데 마침 프랑스 제1의 명사수를 약혼자로 둔 어느 미모의 여성을 사랑한 탓에 그 약혼자로부터 총을 이용한 결투를 제안 받았다 한다. 결투 전날 갈루아는 다음 날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감으로 밤 세워 앞에서 말한 수학문제를 풀어 친구 오귀스트 슈발리에게 편지와 함께 계산과 증명을 남겼으며 다음 날 상대방의 총탄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며 그 날은 수학사에서 길이 남는 1832년 3월 30일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김기영이 귀환지령을 받고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며 인용된 내용이다.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만일 한정된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장 무엇을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사실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영생하기라도 할 듯 하루하루를 별 생각 없이 보내고 있다. 어제 죽은 사람에게 내가 사는 오늘 하루는 천금과 같은 하루라는 것을 언뜻언뜻 떠 올리기도 하지만 다시 우리의 하루하루의 가치를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기영이 남한 탈출을 계획하며 소지에게 함께 어디로 가볼까 넌지시 떠보는 대목에서 소지가 기영에게 자신과 육체관계를 맺은 일을 상기시키며 이런 말을 한다."여자랑 자면 안 돼, 그때부터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게 돼" 아니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자가 지배한다. 하긴 다시 생각해보니,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여자 하녀와 동침하고 나면 머리를 올려주어 일테면 성인식을 치르게 한 다음 평생을 보살피며 지배하였으며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여성이 남성에게 몸을 허락하면 그 사실 하나로 여성은 남성을 따르거나 버림받으면 목숨을 버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도리어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는 역의 시대가 된 것은 결국 의식의 혁명이란 생각에 미친다. 또 기영이 대학시절 소지를 만났던 기억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이런 말이 나와 눈길을 끈다.

 

"소년은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은 늙어 늙은 소년이 되고 소녀도 늙어 늙은 소녀가 된다." 흔히 나이든 사람 사이에게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비록 몸은 세월의 풍상에 허물어졌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15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부부의 연으로 살을 섞고 살았던 김기영의 아내 장마리는 남편의 북한귀환에 조금도 주저 없이 자신은 혼자 남아 남한에서 생활하겠다고 냉정하게 말하는 부분은 우리 시대의 비정한 남, 녀 부부사이를 엿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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