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검은 꽃>을 읽고...

깃또리 2019. 5. 6. 13:48

<검은 꽃>을 읽고...

김영하

문학동네

 

 

 

2012년 12월 중순경에 다른 사람이 적어 놓은 독서후기에 영향을 받아 <검은 꽃>을 연말에 읽었다. 장미꽃을 교배하여 수많은 색상의 장미 품종을 개량하였지만 푸른색의 장미꽃은 아직 만들지 못하여 만일 누가 푸른색 장미를 꽃 피우면 노벨상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 전이라 지금쯤 푸른 장미꽃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까지 ‘검은 꽃’도 본 일이 없다. 또한 검은 꽃이라는 제목을 보니 터키의 노벨 문학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이 쓴 <검은 책>을 몇 년 전에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장편역사소설의 범주로 분류 가능하고 형식은 비교적 평범하지만 지나온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었으나 작가의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교직하여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부여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이런 유형의 소설로는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가 그린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을 바탕으로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소설형식을 빌려 써서 공전의 인기를 모은 <진주 귀고리 소녀>가 떠오른다. 국내에서도 여러 작가들이 이러한 시도로 많은 작품을 출판한바 있는데 이번 김영하의 <검은 꽃>은 그 어느 작품보다 돋보인다.

 

소설은 일본대륙식민회사가 추진하여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농장에서 2년간 노동계약 이민으로 떠났던 1905년 4월 4일을 두 달 앞둔 시기의 제물포항구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묘사부터 시작한다. 이민자들을 실은 배는 여객선이 아닌 네덜란드 선적의 화물선으로 독일기관사에 일본 요리사로 구성된 '일 포드'호이다. 사실에 근거한 소설내용에서 대한제국의 짧은 이민사가 소개되는데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계약 이민을 시작으로 '일 포드'호가 멕시코를 향해 제물포 항구 출항 한 달 후에 288명을 태운 몽골리아 호의 하와이 이민선이 마지막이라고 하였다. 결국 초기 정식 이민은 3년이란 짧은 기간인 셈이며 이 기간은 대한제국이 지리멸렬하여 이민을 떠나는 자도 조선에 남는 자도 한 줄기 희망이 없던 시기였으며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일본에 병탄되어 수많은 이민자들은 계약기간이 끝났으나 돌아 올 나라도 없는 처지가 되어 수만리 떨어진 이국에서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다가 현지인들에게 동화 또는 흡수되면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작가 김영하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한국 이민사 전문 외국인 연구자의 저작을 읽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며 또한 이 소설의 주 배경이 되는 유카탄 반도를 직접 방문하여 돌아 본 다음 과테말라 남부 안티구아라는 도시에 머물며 소설의 상당 부분을 집필하였다 한다. 소설 마지막 <작가의 말>부분을 읽다 보면 안티구아에는 스타벅스 커피 집이 없는데 서울 시내의 스타벅스에선 안티구아 커피 원두를 팔고 있어 작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과테말라의 플란테이션에서 마야인들을 고용하여 커피를 생산하여 서울 스타벅스에 파는 것이라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 하였다.

 

작가는 1905년 시대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민선 '일 포드'호에 승선한 조선인들의 신분을 상당히 다양하게 구성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고 있다. 경제적으로 천민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당시 고종의 사촌 일가부터 대한제국에 속하였으나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된 군인들, 한 때 부유한 역관이었으나 주색으로 재산을 탕진한 사내, 토지와 관직을 잃고 몰락한 양반 후예 일족 등도 포함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땅 한 평 없는 농민과 자본도 없이 몸만 가진 상민들과 박수무당, 악사출신, 농노 등 천민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소설적 재미를 위하여 소설 사이에 열여섯 살 고아 출신 ‘김이정’이라는 청년과 한 살 아래의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으나 몰락한 가족을 따라 나선 나이 어린 처녀 ‘이연수’와 사랑 놀음도 배치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도 한다.

 

이민선에 오른 사람들이 태평양을 지나면서 이질로 두 사람의 사망자를 내는 등 모진 고생을 거쳐 멕시코 살리나스 루스 항에 도착한 날은 1905년 5월 15일로 출항 후 한 달 10일 즉, 40일 동안 마치 짐짝처럼 취급되어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상태로 긴 항해 끝에 육지에 닿은 셈이다. 당시는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이라서 여기에서 내륙열차에 실려 태평양 반대편 멕시코 만 항구에 도착하여 배로 유카탄 반도 끝 도시 메리다라는 도시에서 긴 여정을 마치고 당시 선박에서 사용하는 로프의 원료인 선인장과 비슷한 용설란인 에네켄을 재배하는 25개의 크고 작은 농장에 팔려 나간다. 우리나라에서 수년 전에 상연된 <에니깽>이 바로 이 당시의 배경을 다룬 영화이며 에네켄을 조선인들이 에니깽으로 발음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이 대목에서 한국인들은 조국에서 발붙이고 사는 땅을 ‘江山’이라 하며 바로 인간은 언제나 강과 산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멕시코에는 어디를 보아도 강이 없고 산이 없어 그야말로 강산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허공에 뜬 사막과 다름없는 불모지에서 가축보다도 못한 환경에서 2년간의 계약으로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그래도 토착민인 마야족이나 인디오족보다 부지런하여 3년이 지난 시점에는 대부분 계약에서 풀려나 자유민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 동안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한다. 또한, 출발부터 남자 비율이 높아 조선 남자들은 마야 여인들과 결혼을 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일부는 농장에 그대로 남았으나 대부분은 대도시로 나가 생활 터전을 잡았으며 극소수는 미국으로 불법 이주를 하였다 한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한 것인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지 이민자 일부 남자들은 마야족 독립운동의 용병이 되어 과테말라 정부군과 전투하여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살아 돌아와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졌다고 에필로그에 기술하였으며 298 페이지에는 "전직 군인, 내시, 도둑, 게릴라, 노동자, 고아, 파계 신부로 이루어진 총 44명의 한인 용병은 1916년 7월 과테말라 혁명군의 길잡이를 따라 유카탄 주의 경계를 넘어 캄페체 주를 지나 멕시코-과테말라 국경을 통과했다."라는 문장이 보이는 것으로 역사적인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이 용병 중 몇 사람은 용병사업이 성공하면 과테말라 북부 지역인 띠깔에 '신조선'이라는 작은 망명 정부를 세우려는 생각도 했다 한다.

 

이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이연수는 김이정의 아들을 낳았으나 신산한 삶을 이어가다 세 번 째 만난 박정훈이란 이발사 남편이 마음씨가 좋아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남편이 죽은 다음 그가 남긴 꽤 많은 재산으로 시작한 고리 대금업이 번창하여 마침내 유흥업과 매춘사업까지 손을 뻗치며 돈을 모으다 천수를 다했다 하였다. 그러나 김이정은 첫사랑 이연수를 잊지 못하였으며, 멕시코 전역을 맴돌다 마야족 용병이 되어 싸우다 과테말라 정부군과 교전 중 생포되어 총살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최근 소설을 읽다 보면 첫사랑을 잊지 못하여 헤매는 쪽은 남자이고 여자는 거침없이 잘 사는 상황이 대부분인데 왜 그럴까 궁금하다. 이제 이 만큼 여성이 남자보다 강하다는 말인지...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 지구상에 어느 민족, 어느 국가가 자신의 자존을 지키며 굴곡 없이 지나오기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유독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외침과 전란으로 강토가 유린되고 결국 불과 백 년 전엔 이웃 일본에게 병합되는 불행과 수모를 당한 뼈아픈 역사를 지닌 민족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위치를 돌아보면 그야말로 단군 이래로 가장 강성한 기운을 발휘하는 시기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검은 꽃>과 같은 역사소설이 모쪼록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널리 읽혀 우리 역사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위한 다짐에 보탬이 되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끝으로 이 소설의 <에필로그> 마지막 몇 문단을 옮겨본다. " 현재 유카탄 반도의 주력산업은 관광이다. 곳곳에 마야 유적지들엔 해마다 수백만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에네켄 농장은 거의 사라져 황무지로 변했고 몇몇 농장은 박물관으로 변신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1956년이 되어서야 밀림으로 뒤덮인 띠깔의 마야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탐사가 시작되었다. 펜실베니아 대학과 과테말라 정부는 고고학적 연구와 복원작업을 시작하였다. 1991년 과테말라와 스페인 정부는 흙과 나무뿌리로 뒤덮인 제1신전과 제4신전을 원래의 형태대로 재현하기로 결정하였다. 연구팀들은 신전의 정상과 주변에서 몇 구의 해골을 발견하였고 이를 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곳을 거처 간 일단의 용병들과 그들이 세운 작고 초라한 나라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