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을 읽고...

깃또리 2019. 5. 10. 09:00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을 읽고...

노승영, 박산호 지음

세종서적

2019.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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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표지 제목 아래 "과학책 번역하는 남자, 스릴러 번역하는 여자의 언어로 세우는 세상이야기"라는 문구가 있다. 노승영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협동대학원을 수료했다 한다. 나는 인지과학에서 다루는 과목이 언어학, 철학, 심리학, 신경과학, 컴퓨터 등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노승영은 번역을 하기 전에는 컴퓨터 번역 프로그램, 환경단체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2006년 '강주헌의 번역 길라잡이'라는 강좌를 듣고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한다. 작년을 기준으로 12년 동안 번역 일을 했는데 초기엔 이것저것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본인의 말로는 잡식성, 전 방위 번역가였으며 다른 사람은 조금 멋있게 ‘르네상스 번역가’로 불렀으나 지금은 과학책 번역으로 정착하여 장르 번역가라 하며, 국내 번역 풍토에서 번역 초년생 시절엔 자기 입맛에 맞는 분야를 고를 수 없었다 한다. 총 60 권 번역서와 영어책 2권을 썼는데 자신은 운이 좋았는지 초기에 번역한 <세계대전 Z>라는 스릴러가 인기를 얻어 이 책이 출세작인 셈이라 했다.

 

자신이 번역한 책 중에서 독자들의 인기를 얻은 것과 자신이 애착을 느끼는 책은 별개라 한다. 모든 책의 번역에 심혈을 기울이지만, 특히 자신의 취향이나 관심이 더 끌리는 책의 번역은 더 노력을 기울여 애착을 더 갖지만 이런 책이 독자들의 호응을 더 받는 경우는 적다한다. 그래서 독자들의 인기에 관계없이 자신이 번역한 책 여섯 권을 추천하였으나 나와는 거리가 있는 장르의 책들이고 제목도 생소하다.

번역가들은 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도 많이 읽고 책에 관심도 많다 하며, 노승영씨는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감명 깊은 책으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을 꼽았다. 사실 나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그리고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 진 신>을 읽고 책의 이론과 과학적 설명에 힘입어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불가지론, 무신론에 대한 희미한 신념을 확고히 할 수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한 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소위 종교적 신념으로 굳건한 사람들에겐 다 소용없는 일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저자인 박산호씨는 한양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르넬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한다. 나이는 나와 있지 않지만 노승영씨 보다 조금 아래인 듯하며, 책 어디엔가 번역일이 20년이 다 되었다하니 영국에서 돌아와 바로 번역 일을 시작했다면 40 중반쯤일 것 같다. 역시 60여 권의 원서를 번역했다 하며 노승영씨 보다 글을 아주 재미있게 썼다.

 

즉 노승영은 사실적이고 논리적으로 글을 전개하여 좀 딱딱하지만, 박산호는 에피소드를 중간 중간 소개하기도 하고 가정법 문장도 적절하게 섞었으며, 가끔 조금 익살스런 표현도 가미하여 나는 책을 읽다가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혼자 실실대기도 하였다. 이런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면 퍽 재미있고 유쾌할 것 같다. 대부분 번역가들은 남이 쓴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로 기계적이고 따분하며 자존감이 떨어져 자신의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다 한다.

 

즉 창조적인 글,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다. 더구나 번역가는 상당한 수준의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았으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번역료도 생각 보나 낮으며, 수많은 단어를 다른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자칫 실수가 있을 때는 혹독한 질타를 감수해야 하므로 항상 긴장을 해야 하는 직업이라 한다. 이 책은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번역에 관련한 궁금했던 내용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진지한 삶의 성찰을 느끼게 하며 더하여 재미까지 있어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다. 언젠가 다시 읽으려고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부분을 정리하여 본다.

 

<몸에게 물어야 할 시간>이란 소제목의 박산호의 글에서 번역 일을 시작하고 조금 자신이 붙어 번역 수입으로 일 년에 일억을 목표로 몸을 돌보지 않고 매달리다 몸에 이상이 나타나 암 진단부터 하고 하지정맥으로 수술을 하였다 한다. 그 당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비로소 일도 몸이 따라야 한다는 자못 평범하지만 확실한 진리를 깨닫고 한 시간에 5~10분 쉬고 작업량도 대여섯 시간으로 정했다 한다. 이는 번역가뿐 아니라 직업을 가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로 명심할 일이다.

 

<번역보다 힘든 옮긴이의 후기> 노승영씨의 글이다. 책마다 다르지만 본문 앞에 <서문>, <들어가기>, <저자의 말>, <추천사>, <헌사>, <등장인물 소개>등이 있고 책 뒤에는 <저자 후기>, <저자의 말>, <저자 소개>, <연대표>, <찾아보기>, <주석> 등이고 번역서의 경우엔 <옮긴이 후기>도 있다. 옮긴이 후기는 없을 때도 있지만 출판사 요청으로 쓰게 된다는데 과거에는 번역자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으나 점차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대개 옮긴이의 후기를 덧붙인다 한다. 그런데 이 후기를 쓰는 일이 독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번역자에게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한다. 노승영씨의 경우 총 61권 중 26권에 옮긴이의 후기를 썼는데 옮긴이의 후기를 쓰는 일도 어렵지만 대부분 후기를 쓰기 싫어한다고 했다. 왜냐면 그 이유가 솔직하다. 번역료는 원고지 매수나 또는 단어 수에 따라 적든 많든 받지만 쓰기 어려운 후기는 대가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란다. 최근에는 번역가들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적은 금액이지만 원고료를 주기도 한다 했다.

 

책의 출판 형식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데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상이한 출판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대부분 일본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했다.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한 김석희씨는 자신의 번역서 99권의 옮긴이 후기를 따로 엮어 <번역가의 서재>라는 책을 펴냈다 한다. 후기의 금기 쓰기 사항으로 책의 줄거리를 소개하지 말아야 하고, 저자는 가족과 지인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번역가는 쓰지 않는 게 예의라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에 따르면 영미 작가들의 책에는 <저자의 말> 끝 부분에 항상 책을 쓸 때 도움을 준 도서관, 연구소, 친구, 출판사, 편집인, 교정자 그리고 심지어 자료를 찾아 준 도서관 사서의 이름도 밝히고 아내와 아들, 딸들의 이름도 밝히며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또한 출판 풍토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옮긴이 후기의 괴로움> 박산호도 괴로움을 토로하는 걸 보니 정말 쓰기 싫은 것 같다. 마라톤 선수가 스타디움에 들어섰는데 관중들을 위해 한 바퀴 더 돌라는 주문과 같다는 표현을 썼다. "출판사도 원하고 독자도 원하니 어쩔 수 있나? 쓰라면 쓰고 까라면 까야지(이건 아닌가?)"라 하였다. 또 후기 금기사항을 확실하게 적었다.

첫째, 후기는 번역가의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고 책과 저자에 대한 글을 쓰는 공간이므로 번역가 자신의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둘째, 원서의 비판이나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이를 밝히지 않는다. 출판사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셋째, 스포일러,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미끼를 던져 유혹한 뒤 슬쩍 빠져 독자들이 즐겁게 읽도록 유도해야 한다.”

 

두 사람이 모두 번역료에 대하여 솔직한 이야기를 하였다. 대부분 몇몇 번역가를 제외하고 원고지 매수에 따라 받는 단가가 엇비슷하며 두세 달에 한 권씩 줄기차게 번역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다 하였다. 번역료 받는 방법도 세 가지로 인세, 원고지 매수, 인세와 원고지 매수를 반반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인세로 계약을 했다가 책이 팔리지 않으면 번역료를 한 푼도 못 건진다 했다. 그러나 멋모르고 인세로 계약한 책이 의외로 인기를 얻어 행복한 경우는 노승영의 경우 겨우 한 권이라 했다. 번역료와 관련하여 어떤 경우엔 단어 개수에 따라 번역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고백하건데, 나는 10년 전쯤 <Chinese Cinderella>라는 학생들이 즐겨 볼 만한 영어책을 세 번인가 읽고 2/3 정도를 우리말로 옮겨 보았으나 도중에 여러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뒤돌아보면, 첫째 영어 두 문장을 우리말에서는 한 문장이 적절해 보이는데 어찌할 까 확신이 서지 않았고, 둘째, 영어 문장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옮길 수 있는데 어떤 것이 좋을까 알 수 없었으며, 셋째, 외국인 이름이나 지명을 원음으로 할까 우리가 이미 정한 철자로 해야 할까 결정이 어려웠다. 넷째, 근본적으로 제일 어려운 결정으로 나 역시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문제에 봉착하였다. 전체적으로 의역이면 의역, 직역이면 직역으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외에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여러 궁금증이 생겨 일단 책을 덮고 번역에 관련한 책을 몇 권 읽어 보았다. 기억하기로 <번역의 테크닉>, <번역은 반역이다>를 비롯하여 제목은 잊은 다른 두 권까지 네 권 정도였다. 이런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번역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 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열점을 영문으로 소개한 그림이 곁들여진 책을 우리말로 옮겨보았다. 이제 다시 꺼내 읽어보면 얼마나 내가 용감했는지 알 것 같다. 결국 번역은 나의 길이 아님을 이번 책을 읽고 다시 실감하며 번역가들에게 힘찬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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