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르 클레지오의 오로라의 집>을 읽고...

깃또리 2019. 5. 3. 13:49

<르 클레지오의 오로라의 집>을 읽고...

르 클레지오/ 조남선 옮김

2019. 04. 06.

  

주말에 읽으려고 쉬운 책을 도서관 서가에서 고르다가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책에 실린 글은 어느 장르라 말하기 어렵다. <오로라의 집>과 <세상 밖으로 또는 오를라몽드>라는 제목의 두 편의 글인데, 간단한 줄거리의 산문으로 된 소설, 소설 중에서도 짧은 단편 분량으로 소설 형식을 빌린 작가의 유년시절을 떠올려 쓴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이어져 마치 시처럼 생각되어 '산문시'라고 부르고 싶다. "모든 어른들은 한 때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소년, 소녀였다."라는 말이 있다 까르르 천진스럽게 웃던 아기가 자라 소년, 소녀가 되면 풀과 꽃과 나무, 구름을 사랑하고, 누구의 말에 의심을 품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단, 한 번의 속임에, 그리고 험한 세상을 경계하는 부모로부터 누구 말이라도 성급하게 믿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고, 이 세상은 남에게 뒤떨어지면 패배자가 된다, 그래서 항상 이겨야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불신, 경쟁심, 탐욕에 서서히 물들게 된다.

 

<오로라의 집>의 화자인 '나'의 이름 ‘제라르 에스테브’는 단 한 번 나온다. 나는 어린 시절 개구장이 친구들과 이미 페허의 조짐이 짙은 오로라의 집을 감싸고 있는 넓은 정원의 갈라진 울타리 틈새로 들어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관목사이에서 울새, 나이팅게일 특히 휘파람 소리를 내는 티티새의 노래를 천상의 음악처럼 느끼며 놀았다. 멀리서 보았던 빌라 오로라의 여주인은 항상 큰 정원용 모자를 쓰고 오솔길을 산책하거나 장미나무를 손질하는 모습이었다. 정원 안에는 그리스의 원형 신전 비슷한 오래 내버려 둔 건물이 있었으며 입구 기둥에는 OUPANOS (우라노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얼마 후 외국어를 공부하던 친구가 그리스어로 '하늘'이라고 알려주었다. 글에는 나오지 않지만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느라 오로라의 집을 잊고 지내다 법률공부를 시작하기 직전 홀로 오로라의 집을 찾아간다. 그간 세월이 흘러 정원과 집 주변은 콘크리트 아파트, 아스팔트 도로가 이리저리 휘감고, 정원도 대부분 새로 지은 집과 도로로 줄어 있었다. 어릴 때 가까이 갈 수 없었던 오로라의 낡은 집에 다가가자 집은 더욱 퇴락하였으나 집 주인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마리 두세'

 

"나의 추억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이 아름다운 그녀의 이름, 그 이름을 보는 것으로, 그리고 즉시 그 이름을 사랑하게 된 것으로, 나는 행복했다. 나의 추억의 장소를 걸어 다니자 실패와 낯섦의 느낌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잠시 나는 생각해 보지도 따져 보지도 않고 단순히 오랫동안 흠모했던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벨을 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나는 떠났다. 나는 자동차로 가득한 주차장에 불켜진 창문들을 지닌 커다란 건물들 사이를 지나 텅 빈 거리를 내려갔다. 하늘에는 더 이상 새가 없었고, 늙은 들 고양이들이 살 장소도 있지 않았다. 나 또한 낯선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일 년이 지나 나는 용기를 내 다시 오로라 집을 찾는다. 오로라의 집, 산뜻한 진주빛깔은 이제 음산한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집을 관리하고 지켜주는 일을 해줄 학생에게 방 제공'이라는 마드무아젤 마리 두세가 낸 광고를 보고 오로라의 집을 방문한다. 마리 두세도 이제 나이가 들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웠으며, 응접실로 안내된 '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켜 쓰러질듯 하자 마리 두세는 놀라 의자에 앉도록 하고 차를 권한다. 오랫동안 흠모하던 여인 비록 나이가 들었으나 기품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나는 서둘러 오로라의 집을 나온다. 다시 시간이 흘러 행정당국과 결탁한 부동산, 건설업자들이 수없이 매각을 종용했으나 마리 두세가 거절하자 불량소년, 소녀들을 동원하여 오로라 집을 방화하여 나의 어린시절 꿈과 추억이 깃든 오로라의 집은 불타 사라진다.

 

<세상 밖으로 또는 오를라몽드>

 

'아나'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 가파른 절벽 길을 올라 제일 높은 곳에 고딕식으로 지은 버려진 낡은 극장이 있다.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을 극장은 이제 폐허로 변하여 찾는 사람도 없다. '아나'는 남자 친구 피에르와 함께 학교에 가지 않고 이 폐허의 극장에 가기를 좋아하지만, 피에르는 극장까지 올라가기를 싫어하여 단지 절벽아래에서 '아나'를 기다린다. 아나는 창문턱에 앉아 절벽 아래를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왜냐면 이곳이 바다와 하늘이 가장 잘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대지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에......"

 

‘아나’의 행복도 잠시 오를라몽드 입구엔 "공사현장 출입금지, 폭약 폭발 위험" 경고판과 출입금지 줄이 쳐있다. 그래도 아나는 줄을 넘어 자기가 좋아하는 창문으로 간다. 폐허의 극장을 철거하는 일이 시작되어도 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다 마침내 아저씨들의 손에 끌려 아래로 내려오면서 잠깐 뒤돌아 마지막으로 돌 벽과 바다를 바라본다. 오를라몽드는 이제 존재하지 않고 빛바랜 잿빛 폐허만이 남아있다." (중략) 그러나 바다에 쏟아지는 태양의 그림자는 소녀의 얼굴 위로,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반짝인다. 분노로 꺼지지 않는 빛과 함께." 라는 문장으로 글은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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