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이름 없는 너에게, 원제: Dear Nobody>를 읽고...

깃또리 2019. 3. 27. 09:51

<이름 없는 너에게, 원제: Dear Nobody>를 읽고...
벌리 도허티, Berilie Dorherty/ 장영희 옮김/ 김진아 그림
창비
2019. 03. 24.

이름 없는 너에게

 

 장영희 교수가 2009년 세상을 떠났으니 꼭 10년 세월이 흘렀다. 나는 장영희 교수 생전에 그가 쓴 책을 거의 다 읽고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사후 출간 몇 권을 더 읽어 장영희 교수가 쓴 책은 다 읽은 셈이다. 최근 내가 작성한 장영희 교수 책의 독서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는데 장영희 교수가 영문소설을 번역한 책이 몇 권 되지만 나는 <종이시계, 원제: Breathing Lessons>만 읽었음을 알고 나머지 몇 권을 틈나는 대로 읽기로 했다. 사실 문학 작가라면 시, 소설 또는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사람을 뜻하며 장영희 교수는 그동안 에세이와 영문소설 번역을 했으므로 문학 작가라 하기는 그렇고 영문학자, 에세이스트 정도가 어울릴듯하다.

 

 도서관에서 이 책 <이름 없는 너에게>와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원제“ Iron weed> 두 권을 빌렸다. 책을 열면 서문에 해당하는 글에서 원저자 벌리 도허티가 2002년 한국에 초대받고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대학교수, 교사, 학자, 도서관 사서들과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눈 멋진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2004년 출판사 ‘창비’에서 <Dear Nobody>를 한국어로 번역하겠다는 제의가 와서 기뻤다 하며 여자 입장으로 남자 주인공 크리스토퍼(크리스)의 심리 묘사하는 일이 어려웠다고 술회하였다. 책 뒤 <옮긴이의 말>은 ‘더 아름답게 사랑하는 법’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장영희 교수가 쓴 글이 나온다. 간단히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소개하고 서강대학교 영미문화 전공수업으로 개설한 ‘번역연습’ 과목의 텍스트로 이 책을 선정한 이유로 “표준어로 써진 책, 문학성과 재미가 있는 책, 세 번째로는 공감할 수 있고 교육적 가치가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라 밝히기도 하였다. 이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게 되면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 이야기를 쓰고 책 한 권씩을 주기로 약속했으며, 35명의 학생 이름을 모두 열거하였는데 아쉽게도 내가 아는 이름은 없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작가 도허티가 셰필드 상을 받아서 인지 영국 셰필드가 배경으로 고등학교 졸업반인 18살 크리스와 헬렌이 주인공이다. 각자 다른 학교에 다니지만 집은 자전거로 몇 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어 헬렌의 집에서 함께 공부도 하기도 한다. 헬렌의 아버지는 대학교 도서관 직원이지만 재즈 광으로 동네 악단의 일원이며 조금 차가운 성격의 어머니 엘리스, 동생 로비 네 사람이며 동네에서 다른 집에 비해 조금 부유한 편이다. 크리스는 10살에 어머니 조운이 던이라는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출하여 공사장 작업자였으나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집 지하실에서 진흙으로 머그잔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는 아버지와 14살 동생 가이와 함께 경제적으로 조금 어렵게 산다. 크리스와 헬렌은 함께 공부하다 단 한 번 육체관계로 헬렌이 임신하여 곤경에 빠진다.

 

 소설은 두 페이지 조금 넘는 프롤로그가 나오고 이어서 소제목이 <1 월>로 시작하여 마지막은 <11 월>로 끝나는 1년 가까운 기간의 이야기이며 1인칭 크리스의 서술, 사이사이 ‘이름 없는 너에게’라는 제목의 헬렌의 편지글로 이루어지며 수시로 등장인물들의 과거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 준비 없이 1월에 임신하여 3, 4월엔 헬렌이 유산을 시키려고 승마장을 찾아 과격한 말 타기, 어머니의 강요로 임신중절을 위해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올랐으나 마음이 변하여 간호사가 잠시 빈틈에 병원탈출, 자신의 앞날보다 아기를 위한 출산 결심, 가족과 주변의 따가운 시선, 9월 30일 출산 등 여러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헬렌은 자신의 장래를 희생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크리스와 결별하여 크리스 만이라도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헬렌이 자신의 속마음을 크리스에게 다 드러내지 않아 크리스는 고통을 받고 가까운 친구 톰과 프랑스에 한 달간 여행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크리스와 헬렌은 가출했던 크리스의 엄마를 찾아서 만나기도 하고 헬렌의 어머니가 미혼모로부터 태어난 사생아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래서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가 냉랭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헬렌이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사실은 친할아버지가 아님도 알았다. 서양의 남녀문제, 결혼, 이혼 가족관계 등이 우리와 다르기고 하고 문제가 많은 듯 보이지만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나라도 서양의 추세를 따르고 있어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옮겨본다. 8년 전에 가출하여 던이란 남자와 살고 있는 어머니를 크리스와 헬렌이 찾아 갔을 때 크리스가 집에 남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들도 한때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텐데, 한때는 사랑에 빠졌다가도 멀어지고, 그 사랑이 증오로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힘들다. 이야기를 듣거나 보면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 도리어 제일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데, 그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예를 들어 우리 엄마랑 아빠도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빠가 행복해 보일 때는 책을 읽거나 피아노를 칠 때뿐이다.” (중략) 크리스의 긴 서술 다음에 이번엔 헬렌이 크리스 엄마 이야기를 듣고 하는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썩 좋았다. 그리고 크리스나 크리스 아버지보다 상류층 계급의 말투였다. 엄마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녀는 아마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결혼한 것이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이 대목을 보면 영국인들도 역시 언어 구사에  따라 신분을 구별하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디서든 언어는 중요한 요소 이기도하다. 즉 언어는 한 사람의 정체성, 지식, 교양 등을 종합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 헬렌이 할머니를 찾아가자 임신한 사실을 할머니가 눈치 채고 “그 어미에 그 딸” 이란 말을 하며 집안에 ‘나쁜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를 하여 이 얘기를 처음 듣는 헬렌은 놀라 자신이 사생아인가 의구심으로 어머니에게 따져 묻자 사실은 어머니 자기가 사생아였다 하며 할머니 즉,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한 헬렌에게 “내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런 더러운 짓을?”이라 쏘아 부친다. 할머니는 밤무대 댄서와 육체관계로 헬렌의 엄마를 낳아 사생아였고 할머니는 자신의 과거 행실을 자책하며 손녀를 질책한 셈이다. 이 소설이 2000년이 되기 조금 전에 씌었으니 짐작해보면 영국 사회도 불과 70~80년 전인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혼모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지탄의 대상이었고 사생아 역시 천대받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미혼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헬렌의 어머니가 헬렌에게 “네 할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 때 할머니랑 결혼하셨다. 그리고 그건 말이야, 아주 용감하고 이해심 많은 행동이었어. 그 당시 미혼모는 창녀나 다름없었거든. 미혼모의 자식은 수치였고. 네 할머니 가족들은 할머니와 의절했고 할머니는 버림받았어. 나도 함께 말이다. 사생아-아비가 없는 아이들을 그렇게 불렀고, 어렸을 때 학교 다니면서 나는 그 말을 지겹게 들었다. 난 내 인생을 그렇게 시작했어.” (중략) “엄마는 온 가족의 수치와 죄의식을 혼자 다 짊어진 채 자신의 삶을 통해 조금씩 바로잡으려고 노력해 왔던 것이다. 난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했다. 엄마의 ‘체면’이라는 말을 마치 보석처럼, 소중한 유산이라도 되는 양 애지중지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헬렌은 뱃속의 아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건 더 이상 수치가 아니야. 엄마가 어렸을 때와는 달라. 아무도 너를 사생아라고 놀리지 않을 거야.

 

 이제 다른 이야기로 크리스가 뉴 케슬대학교 영문과를 준비하며 영어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영어 과목을 맡은 해링턴 선생이 많은 격려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언어가 곧 힘이다. 문학은 사랑이고 시는 영혼을 위한 양식이야.” 나도 평소 언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공들이 주로 학생이다 보니 영국의 학교생활과 공부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주인공 크리스는 뉴 케슬 대학교 영문과 희망으로 졸업시험에 영어 A, 프랑스어 C, 사회학 B 그리고 일반상식 F로 평균 성적 B에 못 미쳐 입학이 어려웠으나 선생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입학할 형편이다. 셰필드 음악대학교를 지원한 헬렌은 공부를 잘하여 전 과목 A를 받았다 하는데, 임신, 정신적 방황, 병원 출입 등을 생각하면 아무리 소설이고 영특하다 해도 전 과목 A는 무리한 설정이다. 헬렌의 가장 친한 친구 루슬린은 의대 지망생으로 전 과목 B를 받아 입학이 좌절되는데 아마 전공마다 기준이 다른듯하다. 소설에서 맨체스터 학교, 뉴 케슬대학교, 셰필드대학교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고향에 가까운 대학을 선택하기 때문 인듯하여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지역, 문화 환경, 관습, 시대적 상황 등이 다르지만 역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능 중 하나는 어떤 시련에도 굽히지 않는 모성본능 인듯하다. 불과 18살로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며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헬렌이 단지 자신의 몸 안에 자라고 있는 생명체를 세상에 나오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은 경이롭고 숭고하다. 무릇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바로 이 모성애의 존재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할 수 있다. 남성들은 글을 읽고 머리로 모성애를 이해한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고 이 글을 적는 나 또한 글로는 찬사와 경의를 말하지만 모성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작가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장영희 씨의 매끄러운 우리말 번역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여 시간이 되면 서점에 들러 영문판을 살펴보고 내가 읽을 정도인지 아닌지 알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