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일본으로 간 조선 선비들>을 읽고...

깃또리 2019. 3. 19. 12:40

<일본으로 간 조선 선비들>을 읽고...
김경숙지음
이순
2014. 05. 31.


 책의 부제는 "조선 통신사의 일상생활과 문화교류"이며 '1만 리 일본여행길 위에 펼쳐진 조선통신사의 파란만장 생활사'라는 문구가 표지에 보인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책 제목 <일본으로 간 조선선비들>은 적절한 제목이 아닌듯하다. 왜냐면 제목만 보아서는 조선선비가 일본으로 떠난 다음 돌아오지 않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일본에 갔다 온 조선선비들> 또는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 온 조선선비들>이 적당하지 않은 가 생각된다. 아무튼 저자 김경숙은 원래 고전문학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하여 조선 후기 특히 18~19세기 문학과 문화에 관심을 기울여 주로 서얼과 여성 그리고 조선통신사에 관한 책과 논문을 썼다고 한다. 지금은 이화여자대학교와 가천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한다.


 나는 그 동안 조선통신사라면 막연하게 십 수 명의 조선관리가 일본을 다녀 온 일 정도로 생각하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고 여행기간도 일 년 가까이 걸린 일에 놀라기도 하였으며 이 책 한권으로 제법 조선통신사에 대하여 많은 상식을 얻었다. 먼저 조선통신사란 일본을 다녀 온 사신단이자 문화사절단이고 1601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열두 번 이루어졌으며 참여 인원은 평균 470명으로 사행기간은 대략 1년 정도 걸렸다 한다. 제일 먼저 놀란 일은 40여 명도 아니고 무려 47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한양에서 출발하여 부산-대마도-에도(현 도쿄)를 육지와 바다와 강 그리고 다시 육지를 통하여 갔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이다. 사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후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요청으로 1607년 일본 사행을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우선 떠오르는 대목이 '조공'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중국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유지하며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사신단과 함께 '조공'을 바친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는 조선이 작은 나라로 군사적, 문화적 힘의 열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막부의 요청에 의했다고 하지만 일본은 두 번의 침공으로 비록 확실한 점령은 이루지 못했으나 조선 전 국토를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끌고 갔을 정도이니 막부의 입장으로는 승리자로 자처하고 사신단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물론 우리 조선의 입장에서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을 회유하고 동태를 살피며 끌려간 피로인을 귀환시킨다는 명분이었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내심 불편한 심사를 억누를 수 없다. 한편 일본으로써는 새로 건립한 비쿠후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조선이 무릎을 꿇고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도록 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군사력에서는 열세였지만 문화적 수준은 일본에 앞섰기 때문에 일본 막부와 일본의 지식인들은 조선통신사를 반기고 조선 선비들과 접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사실로 초기 통신사들이 일본과 교류할 때는 대우도 극진하였고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환대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이 조선을 통하지 않고도 직접 중국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자 조선통신사의 가치가 낮아지고 결국 194년이 지난 마지막 12번째인 1811년의 통신사는 에도까지 초대되지 않고 대마도에서 그쳤으며 인원도 평균 인원에 한참 못 미치는 336명으로 줄어든 것이 이를 뒷받침 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일본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 들여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하였고 조선은 상대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여 마침내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운명에 다 달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어느 민족 어느 국가 모두 해당되는 일이므로 정치지도자를 비롯하여 모든 국민들이 잠시도 과거의 치욕을 잊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하여튼 조선 통신사 일행은 한양을 떠나 부산에 도착하여 대략 여섯 척의 사행선에 나누어 타고 대마도(쓰시마)에 도착한 다음 도주의 영접을 받고 행장을 정리한 다음 아카마카세키(현,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 세토내해로 들어서서 오사카의 시라나시가와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타고 온 고국의 사행선을 정박시키고 일본 막부가 준비한 금루선으로 갈아타고 강을 따라 요도가와에 이른 다음  교토, 하꼬네, 나고야를 거쳐 시나가와를 지나 에도에 도착하였다 한다. 에도에서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식을 치른 다음 오던 길을 뒤집어 돌아왔다 한다. 이 긴 기간 동안 조선 통신사들은 많은 글을 남겼는데 이 책에 자주 거론되는 기록은 남용익의 <부상일록>, 김지남의 <동시일록>, 홍우재의 <동사록>, 임수간의 <동사일기>, 신유한의 <해유록>, 원중거의 <승사록>, 조엄의 <해사일기> 등이다. 기록물들은 작성한 사람들의 주관과 관심분야에 따라 내용이 다양한 듯하며 나는 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출발하여 전남 육지를 향하다가 풍랑으로 중국으로 표류하여 갖은 고생 끝에 육로를 이용하여 북경, 압록강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온 최부가 쓴 <표해록>을 퍽 흥미 있게 읽은 적이 있다. <표해록>다음으로 신유한의 <햬유록>을 읽을 예정이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며 이 책이 일본 항해 표류기일거라는 지레 짐작만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신유한도 통신사로 1719년 한양을 출발하여 일본을 왕래한 선비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으며 빠른 시일 내에 구해 읽어 보려 한다.


 나는 초등학교시절 교과서에 조엄 선생이 사람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퍼트렸다는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사실 지금까지 조엄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지내왔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조엄도 조선통신사의 정사 직책으로 일본을 다녀 온 사람이며 그 당시에 고구마를 대마도에서 어렵게 입수했다. 근 40년 만에 새로운 역사지식을 덧붙인 셈이며 나의 역사 지식도 일천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기록을 뒤져보니 조엄(趙嚴1719~1777)선생은 서울 옥수동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동래부사, 이조참의 등의 관직을 거치고 1763년 조선통신사 정사로 지명되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처음 보고 눈여겨 두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밀리 고구마 종자를 구하고 재배 방법을 알아내어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한다. 그 후 한성부윤, 공조판서,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를 거치는 등 관직에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나 모함으로 귀양 간 곳에서 병사했다 한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 온 이야기를 <해사일기>로 남겼다 한다. 고구마라는 말의 연원이 대마도에서는 고귀위마(告貴爲摩)라 하였다는 설과 고꼬이모(孝行藷)에서 연유했다는 사실도 이번 기회에 알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동안 남저(南藷)라 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에 들었었다.
 옛 선비들의 책을 읽다보면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목으로 이순신장군이 쓰신 <난중일기>에도 자주 나오는 이 '망궐례'는 조선시대 국왕에 대한 공경과 충성 표시로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으로 주로 음력 초하루, 보름, 명절 또는 왕과 왕비의 생신이나 돌아가신 날에 치르며 지방 관청에서는 주로 객사에서 행하였다 한다.  이순신 장군이 쓰신 <난중일기>에도 수시로 나온다. 그런데 유배지에 있는 관리나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에 돌아가던 선비도 망궐례를 했다 하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객사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평택시 팽성읍에 ‘객사리’라는 동네가 있어 처음에 객사라는 이름이 듣기에는 거북하지만 틀림없이 어떤 연유가 있는듯하여 조금 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옛 팽성고을의 객사가 있어서 동네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다. 그래서 읍사무소 동쪽에 있는 객사를 보러 가보기도 하였다. 덧붙이자면 아마도 지금의 평택보다도 팽성이 조선시대에는 더 큰 도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평택은 일제 강점기 철도가 부설 될 때 팽성을 지나지 않고 평택을 지나면서 평택과 팽성의 도시위상이 바뀌어졌으리라 추측된다.


 다시 통신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들이 임금이 있는 곳은 서쪽이었으나 왕은 항상 남쪽을 향해 앉아 있기 때문에 선비들은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만세삼창 萬歲三唱을 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만세삼창을 하는 일이 드물지만 내가 초등학교시절만 해도 국경일이나 무슨 행사를 마칠 때면 만세삼창을 하곤 했다. 생각해보니 만세란 임금님이 만년까지 사시라는 축원이며 세 번을 연달아 했기 때문에 만세삼창이라 했던 것 같다. 지금 기억으로 만세삼창을 하고 나면 뜻도 모르면서 항상 기분이 좋았었는데 이제 다시 만세삼창을 해보면 스트레칭도 되고 좋을 듯하다.


 책 곳곳에 재미있는 사실들을 나오는데 이를 다 옮길 수 없고 몇 개를 골라 적어본다. 원중거라는 1763년 사행단에 참여한 선비는 일본여성들은 조혼을 했으며 얼굴을 하얗게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고 이를 검게 물들였으며 이를 물들이지 않은 여성은 처녀, 과부, 창녀이거나 비구니였다고 기술하며 여자들이 너무 치장이 심하여 남자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미풍양속을 해친다 생각했다. 에도 가는 길에 만난 일본 선비에게 이를 지적하자 옳은 말이라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선비를 만나자 근처의 여성들에게 화장을 심하게 못하도록 하였다고 하며 자세히 보니 갈 때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한다. 물론 근처 일부 여성들에게 일시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인데 내가 지금까지 이런저런 곳을 다녀 본 경험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화장을 진하게 하는 여성들이 우리나라 여자들이 아닌가 한다. 쉽게 말하여 조금 과장한다면 자기 집 문지방을 넘는 여성은 어김없이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는 상황이다. 뭐 화장이 진하다고 큰 문제 될 일은 아니겠지만 조선통신사시절과 현재는 조선과 일본이 정 반대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저자가 여성이다 보니 통신사들이 남긴 글에서 가정생활에 관한 내용이나 여성에 관한 글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사실로 그 당시의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하여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유연하여 시, 문의 창작이 자유로웠으며 상대적으로 조선시대는 유교영향이 강하여 여성들의 사회진출이나 교육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책 곳곳에 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주로 일본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다수 나오는데 우리나라 조선시대 그림에 비하여 필치가 세밀하고 정교하다. 특히 <니혼바시, 日本橋>라는 그림은 다리를 건너는 수많은 사람과 에도시대의 건물모습이 정교하며 원근감이 뚜렸하고 뛰어난 생동감으로 대단한 걸작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