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풍경과 상처>를 읽고...

깃또리 2019. 3. 14. 13:04

<풍경과 상처>를 읽고...
김훈 기행문집
문학동네
2014. 04. 30.


 이번 4월은 책읽기의 진도가 만족스럽지 않다. 화창한 봄날 주말마다 진득하게 책을 읽지 못하도록 산과  들 그리고 강이 나를 불러냈기 때문이다. 영국출신의 작가 Roald Dahl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적은 책 <Boy tales about childhood>를 다시 읽은 것 말고는 이 책 <풍경과 상처>를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풍경과 상처>도 한 번 읽고 연이어 다시 읽었다. 김훈씨의 글쓰기에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는 풍경의 묘사나 자신의 심경을 서술하는 문장이 화려하고 현란하며 강렬하다. 더하여 은밀한 남녀간의 성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특히 여성의 육체와 관련한 묘사가 관능적 표현으로 나타나 남자들이 읽는 데는 크게 당혹스럽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성독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한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생존하는 '언어의 마술사' 또는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찬사에 걸 맞는 작가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이러한 점이 두드러져 한 번 읽고 그냥 책을 내려놓기가 아쉬워 다시 읽었다. 책의 서문 다음의 첫 페이지는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전군가도/사이판>이란 소제목으로 "사쿠라 꽃이 피면 여자 생각이 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 꽃이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성독자가 이 문장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물론 한 두 문장만 읽어서는 안 되고 전체 문장을 읽어야 한다.


 <도망칠 수 없는 여름-강진>에서는 다산 정약용선생의 초당 앞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적은 글로 "강진만의 바다는 따스한 요니(女陰)처럼 육지를 파고들어 조븟하고 아늑하다. 등 푸른 산맥들이 그 요니의 바다를 따라서 만의 하구로 치닫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보아하니 요니는 순수한 우리말인 듯하여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니 아마 古語인듯하고 조븟하다는 '좁은듯하고 아늑하다'라는 의미인데 요니와 잘 어울리는 말이다.


 <오줌통의 형이상학-질마재> 내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전라북도 고창의 선운사와 가까운 미당 서정주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질마재 마을에서 쓴 이야기로 김훈작가는 "언어에 매달리기를 젖먹이처럼 하는 나는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비치다'라는 단어에 의하여 오랫동안 시달리고 있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앞에서 김훈을 '언어의 마술사'어쩌고 했는데 사실은 이렇게 '언어에 매달리기를 젖먹이처럼'했기 때문에 또 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글이 빼어날 수밖에 없다. 세상 일리란 게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염전의 가을-서해/오이도>편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은 어디선가 예전에 읽어 낯익은 글이다. 어디 중년뿐이겠고 가을뿐이겠는가.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에서 요즘은 청년실업이다 뭐다해서 중년뿐이 아니고 젊은이에게도 해당되고 수명이 길어져 은퇴 후 살아갈 날이 한 참이 되는 노년에게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스스로 위안하고 이럴 때일수록 삶 자체를 긍정하고 작은 기쁨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름의 산맥들은 강건하다. 땅에 가득히 꽂히는 여름의 빗줄기는 살아 있는 것들의 물 속 깊은 곳에 가두어진 비린내를 몸 밖으로 밀어내 뜰과 거리에 가득하게 한다. 비오는 날은 거리에서 마주치며 엇갈리는 모르는 여자들도 비린내를 풍기고, 개 집 속에 대가리를 내밀고 빗줄기를 바라보는 우리 집 잡종견조차도 생명의 날 비린내를 주체하지 못한다." 조금 역겨운 느낌도 드는 문장이지만 이어지는 뒷부분을 읽어보면 원초적 생명력, 그 강인한 생명력 속에 흐르는 시간을 임진강에 투영하여 써내려간 글이다.


 다시 엇비슷한 형태의 문장으로 <가을빛-섬진강/구래. 하동>편에 나온다. "태생은 곧 습생인 것이어서, 슬픔과 욕망과 절정에는 늘 물이 흐르고 습기가 고이는 모양이다. 가을산과 가을의 물과 거기에서 내리는 빛은 풍장의 흰 뼈를 생각하게 했고 습기 많은 나는 아직도 내 몸의 습기를 말리지 못한다. 가을 강가에서 나는 습기에 질퍽거리는 내 몸속의 물소리를  들었다. "슬픔과 기쁨과 욕망의 절정에는 늘 물이 흐르고 습기가 고인다."라는 대목이 특히 마음에 드는 문장이고 큰 깨달음을 주는 기분이다. 더하여 아직 "습기에 질퍽거리는 내 몸 속의 물소리"라 하여 작가 자신의 숨김없는 고백에 내 마음 조차 움 추러 진다.


 맺음말에 해당하는 <개정판을 내며>에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심경의 일단을 내 보인 문장이 작가의 글을 이해하고 글 쓰는 방식을 엿볼 수 있어 간추려 본다. 김훈씨는 “언어를 물감처럼 주물러서 사유의 무늬를 그리려 했으며 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없었던 색을 빚어내듯이 이미지와 사유가 서로 스며서 태어나는 새로운 언어를 도모하였다 한다. 몸이 호흡과 글의 리듬이 서로 엉기고, 외계의 사물이 내면의 언어에 실려서 빚어지는 새로운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 하며, 그 모색은 완성이 아니라 흔적으로 남아 이 책이 되었다. 앞으로 이런 방식을 구사하지 않고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을 추수하듯이 글을 쓰려한다.” 고 밝히면서 여기 실린 글은 여전히 자신의 마음 속 오지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