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환상의 책, The book of illusion>을 읽고...

깃또리 2019. 2. 22. 09:25

<환상의 책, The book of illusion>을 읽고...
폴 오스터 /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2014. 02. 09.


 1년여 전 폴 오스터의 대표작 <뉴욕 3부작, New York Trilogy, 1987>을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 도중에 그만 둔 일이 있다. 오스터의 초기 작품이지만 가장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오스터의 대표작으로 꼽는 책이 내게는 왜 재미가 없는지 모르겠다. 그 뒤 <달의 궁전, Moon Place, 1980>, <나는 왜 읽는가, Why Write?, 1996>를 읽었는데 이 책들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다 겉표지가 너덜너덜한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옆에 책등이 깨끗한 오스터의 책들이 보여 신간들인가 하여 뽑아 살펴보았으나 <환상의 책>은 초판 발행이 2003년이고 <폐허의 도시>는 2002년으로 모두 오래 전 출판 된 책들이었다. 별로 인기가 없어서 대출이 뜸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무튼 두 권을 집에 들고 와<폐허의 도시>를 먼저 펼쳤으나 지루하여 읽기를 그만 두고 이 책 <환상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퍽 재미있고 내용도 독특하여 손에 놓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


 주인공 ‘데이비드 짐머’는 미국 동부의 좋은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버몬트 햄스턴 대학교의 비교문학교수가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 아내 헬렌(36)이 아들 토드(7)와 마르코(4)를 데리고 친정인 시카고를 가다가 여객기가 추락하여 모두 세상을 떠나 1985년 6월 7일 주인공 짐머 교수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학교도 휴직하고 술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켠 TV에서 1930년 대 무성영화 한 편을 보게 되고 영화 주인공인 코메디 배우 헥터 만에 주시하였다. 사실 핵터 만은 영화계에서 그리 출중한 연기자는 아니었고 그의 성장배경도 어린 시절 아르헨티나에서 살다 L.A.로 이주했다는 것과 한 때 반짝 인기를 누리는 동안 여러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다 1929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정도만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거의 폐인처럼 지내던 짐머는 이 헥터 만의 출연영화에 대한 연구서를 쓰기로 결심하고 술도 멀리하고 "무성영화시대 코메디 연기"를 내용으로 <헥터 만의 무성영화세계>를 집필하였다. 1988년 책이 출판된 다음 절친한 선배이자 어느 대학교의 교수로부터 프랑스의 작가 샤토브리앙의 회고록 번역을 제의 받아 이를 수락하고 번역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헥터 만의 아내라는 프리다 스펠링으로부터 헥터 만을 만나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몇 차례 받는다. 그러나 1900년 출생의 헥터 만이 수십 년 행방불명된 상태이고 살아 있다고 해도 90세가 다 된 나이라 장난 편지이거나 어떤 나쁜 의도의 편지라고 생각하여 무시하고 지내던 중 30대 중반에 엘런 그런드라는 헥터 만과 프리다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여자가 예고도 없이 집으로 방문한다.  편지에 대답이 없어 직접 뉴 멕시코에서 왔다고 하며 헥터 만을 만나러 가자고 하고 만일 거부하면 죽이겠다고 권총을 들이 댔다. 갑자기 당한 황당한 일과 실랑이 끝에 권총을 빼앗아 그렇지 않아도 아직 아내와 아들들의 죽음으로 절망감에 빠져 나오지 않은 상태에 이런 복잡한 일에 연루되자 세상사는 일이 귀찮게 여겨져 순간적으로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는데 사실은 안전장치가 걸려있어 죽음을 면하였다. 순간의 격정으로부터 죽음에서 빠져 나오게 되었으며 당황한 그런드의 진지한 설득으로 짐머는 죽기 전에 헥터 만을 만나러 가기로 하고 그 날 밤 두 사람은 위스키를 마시며 서로 상대방의 힘든 상황을 들어준다.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다 성적 흥분이 일어 두 사람은 정사에 이른다.


 짐머의 집은 미국 동부 버몬트주이고 헥터 만은 뉴 멕시코주의 엘버커키에서 2시간 반 거리의 작은 도시 티에라 델 스에노로 설정되었다. 마침 내가 지금 일하는 직장에서 가깝게 지내는 Mr. Scott의 고향이 뉴 멕시코의 작은 마을 Tulsrosa여서 얼마 전 뉴 멕시코주 지도를 자세히 본 일이 있던 차에 이곳 지역이 나와 반가웠다. 또 나는 1992년 쯤 일본 혼열 여성 ‘미야자와 리에’를 누드모델로 하여 뉴 멕시코지역을 배경으로 촬영한 표지제목이 <Santa Fe>라는 퍽 이국적인 사막 풍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집을 구입하여 본 일이 있었다. 그 사진집 발매 후 현대자동차에서 같은 이름인 Santa Fe라는 SUV를 출시하기도 하여 나를 비롯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산타 페'라는 곳의 지명을 알고 있다. 2주일 전 쯤 우리 사무실을 방문한 다른 미국인 직원 Mr. Bellino에게 고향을 물었더니 뉴 멕시코 엘버커키라 하여 마침 바로 옆에 있던 Mr. Scott과 같은 주여서 서로 악수하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사실 내가 우연히 그런 자리를 마련해 준 셈이며 미국은 워낙 넓고 출신지에 대한 관심들이 우리보다 약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


 엘런 그런드도 <헥터 만의 내세>라는 일대기를 7년 동안 써오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짐머가 헥터 만에 대한 연구서를 쓴 다음 번역하기 시작한 프랑스 작가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편의 회상>이란 제목의 회고록은 나폴레옹과 동시대 인물이며 그가 35년에 걸쳐 총 24권의 책으로 자신 사후에 발표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샤토브리앙은 폐위되어 세인트헬레나에 6년을 지내고 있던 당시 나폴레옹을 다시 만났다는 내용이 나오며 특히 나는 이 부분에서 "위기의 순간들이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두 배로 만들어 준다 Les Moments de crise produisent un redoublement de vie ches hommes."라는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말은 고쳐보면 "사람들이 곤경에 맞닥뜨려지기 전까지는 충실한 삶을 살지 않는다."라고 조금 달리 표현할 수 있으며 사람은 곤경을 헤쳐 나가면서 성숙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짐머 교수는 헥터 만이 노환으로 누워 지내고 있는 뉴멕시코를 방문하여 겨우 그와 몇 마디를 나누었으나 부인 프리다는 서둘러 짐머를 돌아가도록 재촉한다. 짐머는 떠나기 전에 엘런와 하룻밤을 더 지내며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버몬트로 돌아와 자신과 함께 지내자고 제안하자 엘런은 승낙하였다. 사실 엘런은 얼굴 한쪽에 보기 흉한 모반이 있고 외모도 뛰어나지 않았으나 부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짐머에게는 외모를 떠나 마음씨가 곱고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에 이끌렸으며 엘런 또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가장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남자로 짐머에게 애정을 느꼈다. 짐머가 버몬트로 돌아온 다음날 헥터 만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모든 소지품과 기록이 불태워지는 과정에서 엘런이 7년간 써 왔던 헥터 만의 일대기 원고가 불에 타자 이를 구하려고 불타는 집에 뛰어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는다.

 결국 짐머는 엘런을 처음 만나 화재로 죽기 전까지 알고 지낸 8일 간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3일을 같이 지냈으며 5일은 떨어져 지냈고 사랑은 5번, 식사는 6번, 목욕은 1번이었다."


 엘런의 방에 꽂혀 있던 책들을 소개하는 부분에 대실 해밋, 앙드레 브르통, 페르콜레지와 밍거스, 베르디, 비트겐슈타인, 비용, 호손, 멜빌, 에머슨, 소로 등 소설가, 철학자, 시인, 환경론자, 음악가들의 이름이 줄줄이 포함되어 짐머교수가 이 여성에게 이끌렸던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짐머 자신도 비평서 2권, 랭보시집의 번역 집 3권을 썼다고 하였다. 랭보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랭보시집 번역이라면 아마 영어를 불어로 했으리라는 추측을 해본다. 또한 폴 오스터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한 동안 생활하였으며 프랑스 시집을 영어로 번역했던 일이 있어 이 소설에 나오는 짐머는 자신을 모델로 일부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짐머가 쓴 <헥터 만의 무성영화시대>,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편의 회상>그리고 엘런 그런드가 쓰다만 <헥터 만의 내세> 모두 3권의 책이 나오는데 이 소설책의 원 제목<The book of illusion>은 이 3권 모두가 결국 환상, Illusion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 중에 무릎 위를 찍는 인물 촬영법이 "7분신 촬영"이라는 말이 내게는 처음 익힌 표현이었으며 소설 후반부에 짐머 교수가 영화 한 편을 보고 한국 요리 음식점에 저녁식사를 하는 부분에서 "전에도 한 번 그곳에서 먹어 본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음식은 버몬트 기준으로 친다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 걸 보면 작가 폴 오스터도 이미 한식 요리를 즐기는 듯하여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해외에 나갔을 당시에는 한국 사람들이 김치를 먹으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이 싫어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김치 먹는 일을 주저하였고 식사 후 이를 열심히 닦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음식도 어엿하게 많은 외국 사람에게 사랑받는 음식이 된 것 같아 기분이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