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깃또리 2019. 2. 12. 16:37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예담
2014.01.30.

 

 그간 반 고흐와 관련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뒤돌아보면 고흐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 바로 이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이다. 얼마 전 꽤 시간이 지나기도 하였지만 앞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았으나 거의 처음 읽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몇 년이 지났는지 궁금하여 출판 연도를 찾아보니 초판 발행이 1999년으로 내가 출간 직후 읽었다고 보면 15년 전쯤이다. 15년이면 옛말로 강산이 한번 반 변 한다는 조금 긴 세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새 책이나 다름없어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당시 책을 읽고 나서 독서후기를 쓰지 않아 더욱 기억 소실이 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이쯤 다시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았다.

 

 다 알다시피 반 고흐는 편지쓰기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화가의 길로 접어 들어서서 죽기 바로 전까지 모든 생활비를 동생 테오에게 의존하였기 때문에 수시로 자신의 상황을 편지로 알렸으며 이리하여 테오에게 보낸 편지만 모두 668 통이라 한다. 다행스럽게도 테오가 이 편지들을 잘 간수하였으며 결혼한 다음에는 부인 조안나가 누구보다 고흐를 이해하고 좋아하여 이 편지들을 잘 보관하고 정리하였기 때문에 이 편지를 통하여 고흐의 생활방식과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고흐가 그린 그림들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누구보다 조안나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어느 기록에 보면 프랑스인가 독일에서 내 기억으로는 독일어로 이 편지들을 모두 정리하여 3권인가 4권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대략 50통 정도의 편지 내용이므로 전체의 1/10도 되지 않지만 고흐를 이해하기에 다른 어느 책 보다 유익하고 특히 고흐의 생생한 생각을 아는 일에 더 없는 좋은 자료이다. 편지 내용에는 자신이 현재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밝히면서 생활비 특히 물감을 구입할 돈이 모자란다는 이야기가 수없이 나와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이번 책 읽기에서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이 꽤 여럿이며 고흐가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편지에 쓴 내용이 퍽 인상 깊어 일부를 추려 보기도 하였다.

 

 목사인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1875년 5월 구필화랑 런던지점 근무시절에는 성서 탐독을 하였으며 그래서 벨기에 탄광지역인 보리나주에서 전도사 일을 했다. 그러나 점점 종교에 대한 신념이 약해지고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부분이 나온다. 즉 그는 성경을 읽어 크리스트에 대한 지식을 쌓았으나 당시 크리스천들의 행태에 실망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을 읽다 보니 떠오르는 구절로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며 비폭력 항거의 대명사인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I like a Christ, but I don't like a christian. Because they don't like a Christ.

 

 1853년 출생한 고흐는 1879년 즉 그의 나이 26살에 그림 그리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테오에게 대셍 기법에 대한 책과 물감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가 나오며 더구나 화가로는 늦은 나이인 이 시기부터 화가의 길로 나선다. 1880년 테오에게 보낸 꽤 긴 편지에 독서에 몰두하고 있다고 하였다. 고흐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책을 많이 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편지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퍽 반가웠다.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찰스 디킨즈, 스토우, 애쉴리와 미슐레의 <프랑스혁명>이 나오고 마이너 계열의 위대한 거장으로 '파브리시우스'와 '버다'를 거론하였는데 나에겐 마지막 두 사람이 낯선 사람들이고 특히 마이너 계열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고흐는 당시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 대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다양한 독서로 자신의 인생관과 그림에 대한 철학을 정립하였던 것 같다.  이후 편지를 읽어보면 물론 한글 번역이긴 해도 고흐의 글은 조리가 있고 해박한 지식과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고 화가로써의 가치관이 뚜렷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모든 것이 풍부한 독서의 힘이라고 믿어진다. 고흐가 문학 작가나 작품을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면, '에밀 졸라'가 가장 자주 등장하고 1885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졸라, 도데, 공쿠르형제, 발자크 같은 문학의 거장들이 묘사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골수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낄 때면 그 욕망은 더 강하게 불타오른는 구절도 보인다.”

 

 1887년 여동생 윌에게 보낸 꽤 긴 편지에도 문학에 대한 글이 나오는데 "문명화된 사람들 대부분은 우울증과 비관론이라는 병에 걸려 있다. 나도 웃고 싶은 마음을 잃고 살아온 게 몇 년인지......이게 내 잘못인지 아닌지는 따지지 말자. 어쨌든 나는 좋은 웃음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낀다. 그 웃음을 모파상한테서 발견했다. 웃음의 의미를 잘 전해준 다른 사람도 있다. 오래된 작가 중에는 라블레가 있고, 오늘날에는 앙리 로슈포르가 있다. 그리고 <캉디드>를 쓴 볼테르도 있다.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을 원한다면, <제르미니 라세르투>와 <소녀 엘리자>를 쓴 공쿠르 형제가 있고, <삶의 환희>와 <목로주점>을 쓴 졸라가 있다. 그 밖에도 많은 걸작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공감하는 삶을 묘사하고 있어서 진실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킨다. 졸라, 플로베르, 모파상, 공쿠르형제, 리슈팽, 도데, 위즈만 등 프랑스 자연주의자들의 소설은 정말 훌륭하다. 그런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모파상의 걸작은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너를 위해 구해보마." 이 편지의 추신 부분에서 다시 모파상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 고흐는 모파상에 깊이 경도되었던 것 같다.

 

 "추신: <행복을 찾아서>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모파상의 <오리올 산>을 읽었다. 네가 말한 것처럼, 예술은 아주 숭고하고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행복을 찾아서>를 보면, 우리 본성에는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은 악이 존재한다고 하지 않더냐?  나는 현대 작품이 이전의 작품처럼 도덕적인 설교를 하지 않아서 아주 좋다. '선과 악도 설탕이나 황산처럼 화학 생성물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기겁하고 분개하겠지만."
 
 1888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시 모파상의 소설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요즘 모파상의 <피에르와 장>을 읽는 중인데, 참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서문을 읽어 보았니? 서문에는 '소설가에게는 소설을 통해 자연을 더 아름답고, 더 단순하게 더 위안을 줄 수 있게 과장하고 창조할 자유가 있다'고 씌어 있다. 그다음에 '재능은 오랜 인내로 생겨나고, 창의성은 강한 의지와 충실한 관찰을 통한 노력으로 생긴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이 의미하는 것에 대하여 쓰고 있다." 다시 얼마 후에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모파상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육체적 변화를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같은 남자로써 동정이 가는 대목이다. "모파상의 소설에 나오는 토끼 사냥꾼을 기억하니? 10년 동안 사냥감을 좇아 열심히 뛰어다녀서 녹초가 되었는지, 결혼을 할 생각을 했을 때는 더 이상 그게 서지 않던 사람을...... 그 때문에 그는 아주 초조해지고 슬퍼했지.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육체적으로 나는 그와 비슷해지고 있다. 뛰어난 선생 지엠에 따르면, 남자는 더 이상 발기할 수 없는 순간부터 야망을 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발기하느냐 마느냐가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면, 나는 야심을 품을 수밖에 없지." 이 외에도 테오에게 문학 작품 <대지>와 <제르미날>을 함께 읽었던 지난날을 상기시키는 등 고흐는 문학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부분 사람들이 그를 광기의 천재 화가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수준 높은 문학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열정적인 그림 그리기가 그의 그림의 원천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해야 한다. 흔히들 말하는 광기와 천재적인 재능이 아니란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흐 생전에 그림이 단 한 점 팔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유화에 해당하는 말이고 헤이그 풍경을 담은 열두 점의 스케치가 팔린 적이 있다 한다. 고흐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생각이나 화가로써의 본분에 대한 글이 편지 곳곳에 나와 그의 화가로서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882년 고흐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시기에 자신이 그림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을 적은 글에서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다시 1883년 편지에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화가로써의 일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려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 이런 생각에 집중하면 해야 할 일이 분명해져서, 더 이상 혼란스러울 게 없다." 이 글을 보면 그는 뚜렷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화가가 사회적으로 어떤 책무를 가져야 하는가를 밝힌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또 하나 화가와 대중에 대한 인기에 대한 글로써 "대중의 인기 문제라면, 몇 년 전 르낭에서 그 주제를 다룬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찬성한다. 즉 훌륭하고 유용한 일을 해내려는 사람은 대중의 승인이나 평가를 기대하거나 추구해서는 안 되며, 열정적인 가슴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공감과 동참만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조차도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이미 고흐는 자신이 당시 일부 전문가와 대중으로부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인기에 영합하여 움직이지 않고 의연하게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꿋꿋하게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주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그가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대목을 읽고 퍽 놀랐다. 왜냐면 고흐가 음악 연주회장에 드나들었다는 기록을 지금까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처럼 오디오 기기나 녹음기와 MP3 같은 음악 재생기구가 다양하였다면 모르겠으나 지금부터 약 100년 전인 그 당시 대도시 연주회장 출입이 아니고는 음악 감상하기가 어렵고 더구난 고흐와 같은 가난한 화가가 음악을 가까이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83년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황혼 속에서 양 떼가 귀가하는 장면은 어제 들었던 심포니의 피날레 같았다. 하루 종일 심금을 울리는 음악에 심취해서 먹고 마시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물레를 그렸던 작은 여인숙에서 흑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마신 게 전부였다. 하루가 지났고 황혼에서 새벽까지 아니 이튿날 밤까지 나는 그 심포니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집에 돌아와 불 옆에 앉자 갑자기 배가 고팠다."

 

 다시 1889년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의 음악이 이미 이룬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네.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는 그림말일세. 그런데 자네와 나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네. (중략) 네덜란드 유령선의 꿈도 꾸었지. 요람을 흔드는 여인이 선원을 잠에 빠지게 하려고 노래하는 것을 듣기도 했고, 음악을 모르는 문외한인 주제에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색의 배치를 통해 그림으로 표현하려던 모습도 떠올랐고 어릴 때 들었던 자장가를 듣기도 했다네. 이른 시일에 자네 편지를 받아볼 수 있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네. 늘 우리는 친구라는 사실 잊지 말게." 이런 글로 미루어 고흐는 음악에도 상당한 관심과 지식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어떤 과정으로 음악을 들었는지 퍽 궁금하다. 장차 알아볼 일이다. 나는 편지를 통하여 고흐의 그림 중에서 특히 여러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그림에 고흐 자신이 직접 언급한 부분이 퍽 인상 깊어 일부분을 옮겨보았다.

 

 고흐의 최초 대형 유화 작품으로 고흐 자신도 만족해하였던 작품 <감자먹는 사람들>에 관한 1885년 편지 일부분이다. "네 생일을 맞아, 늘 건강하고 마음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오늘에 맞춰 유화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내고 싶었는데 작업이 잘 진행되긴 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중략)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중략) 언젠가 이 그림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중략)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할 것이고 농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똑 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가는 잊어야 한다." 동생 테오의 생일에 맞춰서 그린 그림이 이 유명한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앞으로 이 그림을 보면 더욱 고흐의 마음을 되새길 수 있을 것 같다.

 

 1888년에 그린 <꽃이 핀 복숭아나무>를 그린 다음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일본 판화의 양식에 따라 무언가를 그려보고 싶다. 철이 뜨거울 때는 두들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 과일나무 그림은 20호, 25호, 30호 켄버스에 그리고 있어서 작업을 끝내면 많이 지칠 것 같다. 그래서 아주 많이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알려지다시피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 판화 형식에 매료되었으며 고흐도 일본에 가보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본 문화계는 자신들의 판화가 프랑스 인상파에 큰 영향을 준 사실에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으며 1980년대 소위 버블경제로 일본 경제가 호황을 구가할 당시 세계 미술 경매시장에서 인상파 그림이 나오면 거침없이 구입하였던 적이 있다. 이리하여 세계 곳곳에 소장된 고흐 그림 분포도가 나온 어떤 자료를 본 일이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6점 홍콩에 1점으로 나와 있었으며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점도 없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국내에도 고흐 그림이 한 점 있다는 신문기사가 게재되었으나 공개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연유로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에서도 인상파 그림 전시가 다른 어떤 화파 보다 자주 열렸던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인상파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를의 도개교> 이 편지에서는 <아를의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이란 제목으로 1888년 5월 10일자 편지에 나온다. "이 번에 부치는 짐 속에는 거친 캔버스에 그린 분홍색 과일나무 그림이 있고 폭이 넓은 하얀 과일나무 그림 그리고 다리 그림이 있다. 그걸 보관해두면 나중에 가격이 오를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수준의 그림이 50점 정도 된다면 별로 운이 없었던 우리의 과거를 보상받을 수 있겠지. 그러니 이 그림 세 점을 네 집에 두고 팔지 마라라. 시간이 지나면 이 그림들은 각각 500프랑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편지 곳곳의 내용으로 짐작하면 파리의 동생 테오로부터 약 250프랑을 달마다 지원받았던 같은데 이에 비추어 보면 <아를의 도개교>를 500프랑 가치로 본 대목이 흥미롭다. 지금 경매시장에 이 그림들이 나온다면 아마 수 십억 원을 호가할 것이다. 고흐가 고갱 다음으로 좋아했으며 15살 아래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유명한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노란색에 보라색을 섞어서 중성적인 톤으로 칠한 대지에는 노란 물감으로 붓질을 많이 했네. 실제로는 어떤 색인가에는 별로 관심이 없네. 낡은 달력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거든.

 

 나이든 농부의 집에서 볼 수 있는 달력에는 눈이나 비가 오는 장면이나 날씨 좋은 날의 풍경이 아주 유치한 양식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나."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약간 감개무량하고 어떤 우연의 일치에 가슴이 뛰기도 하였다. 왜냐면 내가 고흐란 화가를 아마 중학교 미술시간에 알았겠지만 고흐의 그림을 제대로 본 일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당시 아마 어느 중앙은행 달력 12장짜리가 고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아버지가 이 달력을 구해 우리 집 벽에 걸어 두었다. 나는 특히 12장 그림 중에서 이 <씨 뿌리는 사람>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지금도 어제 일처럼  달력이 걸렸던 그때의 그 방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해 지난 이 달력을 몇 년간 보관했으며 고흐 그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되었다. 그런데 고흐의 편지에서 달력 이야기가 나오니 새삼 50년 이상의 긴 세월을 뛰어넘어 기막힌 우연의 일치에 작은 전율마저 느낄 정도였다.

 

고흐의 작품 중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이다. 사실 같은 제목의 그림이 두 점이다. 한 점은 멀리 아를의 불빛이 론 강물에 비치고 하늘에 많은 노란 별들이 빛나며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오른쪽 아래에서 걸어오는 그림으로 1888년 9월에 그렸으며 지금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었으며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한 점은 아를에서 간질 발작으로 고갱과 다투고 자신의 귀를 자르는 소동을 벌인 다음 아를에서 가까운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린 1889년 6월 작품으로 왼편에 불꽃처럼 솟아오르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하늘 가득 조금은 기괴한 모습으로 소용돌이치는 크고 작은 7개의 노란 별과 오른쪽 상단의 초생 달 그리고 아래 1/3 정도를 차지하는 지상의 밤 풍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의 집들과 그 중앙에는 첨탑이 솟은 작은 교회가 보인다. 그래서 제목은 교회가 보이는 <별이 빛나는 밤>이다. 이 그림은 뉴욕 MOMA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100년이 다 된 지금 사람들도 이 그림들을 좋아하지만 고흐 편지를 읽다 보면 고흐 자신도 이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별이 빛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희망을 여러 번 하였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기 바로 전인 1888년 4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 "혹은 잘 익은 밀밭 위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고 싶다. 이곳의 밤은 지독하게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걸 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라고 했는데 결국 그가 아를에 더 오래 머물렀더라면 밀밭위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우리들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기도 한다. 고흐가 밤하늘의 별을 좋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편지에는 나오지 않으나 그가 알퐁스 도데의 책을 읽었다는 내용에 연관 지어 보면 고흐가 도데의 프로방스 목동의 이야기가 나오는 <별, Les Etroiles>을 읽고 나서 더욱 별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별을 이야기한 아름다운 글이 그의 편지에 나오기도 한다.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 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 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 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이 편지 내용으로 보면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암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흐의 또 다른 인기 있는 그림 하나에 <밤의 카페 테라스>가 있으며 1888년 9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그림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이번 주에 그린 두 번째 그림은 바깥에서 바라본 어떤 카페의 정경이다.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옆으로 별이 반짝이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세 번째 그림은 흐릿한 베로네즈 녹색 바탕에 잿빛 톤으로 그린 퇴색한 느낌을 주는 자화상이다." 사실 이 그림에서 빛은 하늘의 별 빛, 오른쪽 집 창문에서 비치는 빛, 테라스의 가스 등 그리고 테라스 탁자 위에 다시 비치는 빛 등이다. 당구대가 보이는 <밤의 카페>라는 그림도 있는데 이 그림과 관련해서는 자기 아버지와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내용이 나온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 아버지와 닮은 초라한 농부가 카페로 들어왔다. 정말 놀랄 만큼 닮았다. 특히 속을 알 수 없어 보이고 권태로워 보이는 분위기나 분명치 않은 입 모양새가 많이 닮았다. 그 모습을 그리지 못한 게 아쉽다." 아를 지방에서는 카페는 간단한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며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사교 공간이었으며 고흐의 편지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흐가 여러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고흐하면 해바라기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그림이기도 하다. 내 책장에도 해바라기 그림 복사본 한 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여러 점이다. 1887년 파리 체류시기에는 화병에 꽂지 않은 <두 송이 해바라기> 3 점과 <네 송이 해바라기> 한 점을 그렸으며 아를로 옮기고 나서 고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쁜 마음으로 보내면서 그린 꽃병에 꽂힌 <세 송이 해바라기>, <다섯 송이 해바라기>, <열 두 송이 해바라기> 그리고 <열네 송이 해바라기> 그림이 있다. 사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보아도 구도, 비례, 색상 조화, 안정감 등에서 단연 뛰어난 작품으로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열네 송이 해바라기>를 가장 뛰어난 해바라기로 보고 있다.

 

 두껍지 않은 작은 책이지만 고흐를 이해하기에 어느 책보다 유익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언제 시간이 되면 다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