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사람의 아들>을 읽고...

깃또리 2019. 1. 28. 10:32

<사람의 아들>을 읽고...
이문열
민음사
2015. 10. 08.


 한 달 전쯤 경부터미널 지하철 역 한 구석에서 책을 쌓아 놓고 파는 할인판매서점을 지나치다 제일 위에 놓인 소설책<사람의 아들>에 눈길이 닿았다. 헌책이라 단 돈 1000원을 주고 샀다. 사실 이문열씨가 쓴<사람의 아들>은 이문열 작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소설에 관심 있는 사람에겐 필독서라 할 수 있다. 즉 이문열 작가는 상당수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경원시 되며 분서의 치욕도 당했지만 그가 29살의 젊은 날에 썼던 이 작품은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성취로 여겨지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나이와 관계없이 또 하는 일에 무관하게 꾸준히 국내외 소설을 일 년에 몇 권은 읽고 있는 사람으로 이 소설을 오랜 만에 다시 읽는 기분은 오래 헤어진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D시의 경찰서 형사계에 근무하는 1945년생으로 작품 속에 30대 중반으로 나오는 남경호경사가 자신의 담당 구역에서 발생한 민요섭 살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소설의 얼개로 삼고 있다. 사건 해결차원에서 남경사가 민요섭의 삶을 추적하고 그가 남긴 노트와 민요섭을 추종하던 조동팔의 글이 전체 소설 315페이지에서 반이 넘는 약 200페이지를 차지한다. 민요섭의 글은 아하스 페르츠라는 인물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와 동시대 인물로 이 소설에서는 예수와 다섯 번 만나서 열띤 논전을 하기도 하지만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외경에만 나오는 인물이라 하며 기독교 측에서는 사탄의 조종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으로 치고 있다 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다 아하스 페르츠의 집 앞에 쓰러져 잠시 쉬어가기를 청했으나 아하스 페르츠는 침을 뱉으며 거절했다 하며 이 잘못으로 예수 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세상을 떠도는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어 '방황하는 슬픈 인물'로 그림이나 음악분야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문학작품에도 이런저런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작가 이문열은 아하스 페르츠의 입을 빌려 전지전능하신 신께서 왜 이 세상의 어렵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 두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이기도 하다. 참혹한 전쟁, 자연재난, 테러, 수 없는 질병, 아무 죄 없는 어린 생명의 죽음 이 모두가 신의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신은 인간의 고통과 잔혹함을 즐기는 취미라도 가졌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며 결국 '신은 없다' 또는 '신은 죽었다'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에 밝은 사람들은 별별 논리로 신을 대변하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고 질문하는 사람을 회유하며 이 상황을 이용하여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고 하면 너무 반기독교적인 생각인가? 아무튼 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신의 존재 특히 기독교에서 믿는 ‘신의 존재’ 또는 ‘신의 의지’에 대하여 아하스 페르츠를 '사람의 아들' 예수를 '신의 아들"로 하여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가 신의 아들에게 묻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경이요 벌을 받을 만한 내용이지만 작가라는 입장으로 이렇게 반기독교적인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수상소감 중에 이런 말을 하였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神의 얘기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혹 하더라도 그들은 쑥스러운듯 수근거리며 말했고, 더러는 자기들의 隱語로만 얘기했다. 그래서 감히 내가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얼굴은 달아오른다. 그러나 신은 우리들의 영원한 주제 중의 하나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두려움뿐. 긴 밤 물어뜯는 부끄러움뿐.  찬사가 아니라 질책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약속뿐이다. 벌써 수업이 끝났다고 착각하지 않겠다는 약속. 다시는 써놓고도 얼굴을 붉히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이 賞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약속."


 사실 기독교가 전파되어 기독교 문화에 젖은 유럽에서 일찍이 반기독교 정서가 일어났고 신의 부정이 제기되었다. 특히 철학자, 작가들이 선두에 섰으며 이들의 사고가 일반인에 비해 자유로웠고 현상을 규명하는데 탁월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생존 시 또는 사후 얼마 동안은 많은 비난과 이단으로 비판을 받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존경을 받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소설 이야기로 돌아와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민요섭은 독일 선교사 밑에서 자란 고아였으며 선교사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남겨준 상당한 재산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사이비 목사들과 교회와 대항하여 싸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조동팔이란 고등학생이 민요섭의 추종자가 되어 가출하고 나아가 자신의 의지를 굳히는 수단이란 명분으로 자기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강도짓까지 하여 가족들과 절연을 하였다. 이후 조동팔은 민요섭 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의 신이나 어느 다른 신의 개입 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을 실천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불의라 생각하는 사람의 목숨도 빼앗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극단주의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죽어가 던 사람, 김동욱이라는 환자를 돌보다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 김동욱의 주민등록증을 이용하여 자신의 전과기록을 은폐하기 위해 김동욱으로 행세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내 이름과 같은 사람이 등장하여 퍽 흥미를 느꼈다. 한편 내 주변에서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이 이렇게도 없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왜냐면 이 대단한 소설을 읽고 특히 김동욱이 짧게라도 등장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은 사람은 틀림없이 나를 만나게 되면 "아! <사람의 아들>에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과 같네요,"라는 말을 할 텐데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문열씨가 내 이름을 등장인물 중 한 사람으로 설정하였다는 사실은 작가가 아는 사람 중에 내 이름과 같은 인물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보았다.

 김동욱, 아니 조동팔에게 깊은 신념과 의지를 심어주어 조동팔에게는 정신적 지주였으며 삶의 표상이었던 민요섭은 자신의 새로운 신의 창조에 실패하고 다시 기독교로 복귀를 뜻하고 이에 자신의 정체성까지 부정해야 하는 입장에 선 조동팔은 민요섭에게 기독교 복귀를 반대하며 매달리고 애원하다 좌절되자 조동팔은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민요섭을 없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소설의 이 부분에서 민요섭이 다시 기독교로 회기 하는 설정이 너무 미약한 것이 이 소설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결국 남경사는 조동팔을 어렵게 찾아 대면하고 그의 긴 술회와 살해 동기를 듣게 되지만 말을 마친 조동팔은 치사량이 넘는 독물을 이미 마신 상태여서 남경사 앞에서 쓰러진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혼불의 돌연한 연소'처럼 남기는 말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러나 나까지 패배해 쓰러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은 민요섭의 피지, 우리의 신에 대한 절망은 아니오. 이 시각 이전이나 이 시각 이후에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은 우리의 신뿐이며, 설령 아무도 느끼지 못할 지라도 고독한 신성(神性)은 언제나 당신들의 머리 위에서 빛날 것이오......"


 이 소설은 민음사가 주관하는 1979년 제 3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중편소설이었으나 1987년 개정 증보판이란 이름으로 장편으로 개작하여 재출간하였으며 1993년 다시 부분 손질하여 출간하였는데 나는 장편 개작판을 읽은 셈이다. 이문열은 일부 사람들에게 극우보수의 화신처럼 인식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만을 평가하면 우리나라 '국보급 작가'라는 사람들의 평가도 크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 70세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숙한 작품을 기대해 볼 만한 작가이지만 최신작을 검색해보니 전자책으로 <만화 수호지>가 뜨고 <호모엑스쿠탄 1.2.3>이 2006년 발행으로 나와 퍽 실망하였다. 하긴 나도 이 작가의 책을 사보지 않았으니 작가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평소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이나 기독교에 대한 인식, 의문점을 이 소설에서 상당히 근접하여 같은 맥락으로 다루어 유익한 글 읽기였으며 다시 되돌아보면 책 한 권으로 반기독교 정서에 너무 자신감을 얻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스스로 경계를 한다. 한편 이 책의 먼저 주인은 초반부는 제법 진지하게 읽은듯하다. 왜냐면 여러 페이지에 노란 형광펜으로 줄을 그은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하스 페르츠가 자신의 아버지와 논쟁하는 대목에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데 나도 줄을 긋고 싶은 대목이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그분의 무책임한 방임입니다. 두개의 상반된 의지 틈에서 인간들이 피  흘리며 투쟁할 때, 그리고 끝내 패배하여 타락과 멸망의 길을 갈 때조차도 침묵하고 계시던 그분에게 그 결과인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고 벌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분을 다만 냉혹한 형리(刑吏)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이 그토록 자비스럽고 사랑에 넘친 분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애매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아담은 감히 선악과를 따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원죄의 굴레를 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 그 자유가 꼭 주어져야 했다면, 금지규범을 만들지 않아야 했지요. 그랬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땄더라도 죄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훼께서는 그 두 개의 무거운 짐을 우리의 나약한 의지 위에 얹어놓고, 선택의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려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는, 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에게 거기다가 더욱 나빠진 것은 에덴에서는 하나뿐이었던 그 금지규범의 수가 세월이 갈수록 불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 이전의 여러 말씀들, 토라와 할라카에 담긴 4천 이상의 가르침과 미드라쉬, 미쉬나, 또 무엇무엇들에 숨어 있는 그 수많은 금지규범이 바로 그렇습니다. 도대체 왜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인지, 우리의 구원이나 영생에 그것들이 무슨 본질적인 연관이 있는 것인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도 우원(迂遠)하고 고통스런 길이 그분의 <사랑하는 자식들>인 우리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합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작가들 또한 작가 나름대로 가치관과 문학관이 있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획일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여 다양성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성숙한 사회일 것이다. 이문열 작가도 우리 시대가 배출한 소중한 소설가이므로 넓은 시야에서 객관적으로 한 인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즐거운 책 읽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