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찰스 램 수필선>을 읽고...

깃또리 2019. 1. 25. 13:03

<찰스 램 수필선>을 읽고...
Charles Lamb 지음/ 양병석 옮김
범우사
2015. 09. 30.



 문학작품을 운문과 산문으로 나누고 운문은 시, 산문은 다시 소설, 희곡, 수필 등으로 구분한다. 시, 소설, 희곡을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으나 수필(Essay)은 그렇지 않다. 쉽게 말해서 시, 소설, 희곡을 제외하고 나머지 글들은 대개 수필로 분류하는데 어떤 정해진 틀이 없이 자유롭게 쓴 글을 지칭하기 때문에 여행기, 책 읽고 쓴 감상문, 자신의 삶의 궤적을 정리한 자서전이나 평론 등도 수필의 범주에 넣기 때문이다. 수필이 형식에 구애 받지는 않으나 삶의 지혜와 깊은 통찰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 이를  좋은 수필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조금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미화하여 수필집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내 수필의 격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수필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종류의 개인사에 관련한 수필집을 읽지 않도록 충고하기도 한다.


 수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 59)페이터(Walter Horatio Pater 1839~1894, 55)이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피천득, 이양하씨 등인데 아마도 우리들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교과서에 이들의 수필이 실렸기 때문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페이터의 글은 아예 <페이터의 산문>이란 제목이었다. 수필이 산문 형식이며 운율을 지닌 시 이외의 모든 글이 산문이지만 산문하면 으레 페이터가 떠오르는 것은 그 만큼 중, 고등학교시절의 학교교육이 우리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는 찰스 램의 수필 중에서 <오래 된 도자기, The Old China>를 약 15년 전에 읽을 기회가 있었다. 나의 짧은 영어실력에 100여 년 전에 쓴 글이라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글을 해설과 각주를 참조하면서도 몇 시간을 걸려 읽은 기억이 난다. 한글 번역문은 몇 분이면 읽을 분량이기 때문에 쉽게 잊혀 지지만 영어와 씨름을 한 탓에 더욱 이글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이번 추석 한가한 시간에 범우사 문고본 <찰스 램 수필선>을 다시 꺼내 읽고 <오래된 도자기>는 영문본을 다시 읽었다.


 찰스 램은 1975년 영국 런던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크라이트 호스피털이라는 학교를 7년 다니고 바로 가족 부양을 위해 14살의 나이에 취직을 하였다. 찰스 램과 관련한 세계사 연대가 조금 흥미롭다. 그는 1776년 미국독립 일 년 전에 태어났으며 요즘 기준하여 중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한해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이다. 찰스 램은 21살 때 누이 메리가 정신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칼로 찔러 살해하는 비극을 맞아 자신은 결혼을 포기하고 누이를 보살피며 51살 퇴직 때까지 46년간 직장에 다녔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꾸준히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교유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명성을 쌓았는데 그가 친하게 지낸 문인으로는 코울리지, 위즈워스 그리고 윌리엄 헤즐릿 등이며 특히 코울리지와 헤즐릿은 요즘말로 하면 절친 사이였다 한다. 1834년 코울리지의 죽음에 애통해 하다가 자신도 같은 해 세상을 떠나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한다.


 첫 글은 <정년 퇴직자>이다. 51살이 되는 해 다니던 동인도회사에서 요즘으로 치면 퇴직 후 75%의 직장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권고 사직을 당한 직후 쓴 글이다. 어린 시절부터 계산하면 46년, 동인도회사에서만 사무서기로 33년을 하루 9~10시간씩 일하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자 홀가분하기도 하고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허하고 너무 많이 남는 시간에 당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유쾌하게 그렸다. 이글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실 나는 정말 액면 상으로 50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 세월에서 나 자신에게가 아니고 타인에게 살아준 시간을 빼보라. 그러면 내 나이 아직 젊은 청년임을 인정할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것이 정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오직 진정한 시간이오, 전적으로 자신에 대하여 갖는 시간이지 나머지는 어느 의미로는 그 시간을 살았다 할지라도 타인의 것이지 자기 것은 아니다. 내 가련한 여생의 남은 시간은 길든 짧든 내게는 적어도 세 배의 시간이다. 내 인생의 다음 10년은 그때까지 산다면, 앞에 보낸 생의 30년과 같다. 이는 삼단 구구의 정확한 수치다.”

 나도 평소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일만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하여 일은 남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고 여기서 얻은 수입으로 자신을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는 형식인데, 우리들은 깊은 생각 없이 일로 인생을 채우려는 사람이 많다. 일과 자신의 삶의 관계를 유효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평소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일을 떠나서는 주체적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체적 삶이라는 것이 개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어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정년 또는 스스로 일에서 떠나는 시기를 정하는 일도 개개인의 성향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어느 나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단지 최근 수명이 늘어나 옛날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찰스 램이 50살에 정년을 맞아 10년을 더 살다 60에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 추세로 보면 70세까지 일한다 해도 약 20년 이상을 일이 없이 지내야 하는 셈이다.


 <오래 된 도자기> 일찍이 유럽에서는 도자기를 중국에서 수입하여 China가 도자기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음을 익히 아는 사실이다. 글은 오래 된 도자기를 예찬하는 글로 시작하였으나 이 수필의 주요 내용은 가난했던 시절 돈을 아껴 소장하고 싶었던 책을 구입하면서 기뻐하던 일, 비싼 음식점에 가지 못하여 직접 만든 도시락으로 소풍을 갔던 일, 그리고 제일 싸구려 좌석에 앉아 연극을 보면서도 ‘약간 창피했기 때문에 그 만큼 더 재미있었고’ 또 ‘큰  돈을 책 사는데 썼기 때문에 새 옷을 사는 일은 뒤로 미루고 낡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책을 가졌다는 자부심으로 떳떳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 장년층들에게는 얼마쯤 같은 경우를 겪었기 때문에 아 나도 그랬었지 하는 대목이었다. 글은 찰스 램과 사촌 누이와 함께 이야기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사촌 누이가 아니고 친 누이인 ‘메리’이다. 그에서 누이가 이렇게 말한다. “그 시절에 우리는 훨씬 행복했다고 확신하네. 이제 돈이 충분하고 여유가 생기니 물건을 사는 것도 그저 구입에 불과할 뿐이야. 전에는 물건을 사는 것, 그것은 하나의 기쁨이었지. 우리가 값싼 사치품을 가지려 했을 때(참, 그때는 자네의 승낙을 받으려고 얼마나 나는 법석을 떨어야 했던가!)” 찰스 램은 마지막에서 이런 내용으로 글을 맺는다. “노경에 넉넉한 수입을 갖는 것은 젊음을 보충 받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실로 섭섭한 보충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에 걸어가던 곳을 이제 차를 타고 가야만 합니다. 또 누님이 지금 말씀하신 그 좋은 옛 시절에 할 있었던 것보다는- 좀 더 호사도 하고, 좀 더 편안한 자리에 드러누워야 합니다. -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옛 시절이 다시 돌아 올 수 있다면, -누님과 내가 하루 30마일을 다시 한 번 걸을 수 있다면, - 베니스터와 블랜드 부인이 다시 젊어지고, 누님과 나도 젊어져 그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1실링짜리 대중석에 앉던 그 좋은 시절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누님 이제는 이것들은 모두 꿈이 되었습니다. - 하지만 바로 이 순간 화려한 양탄자가 깔린 벽난로 가에서, 이 사치스런 안락의자에 앉아, 이렇게 조용히 말다툼을 하는 대신에- 누님과 내가 다시 한 번 그 불편한 층계를 비집고 오르며, 싸구려 관람석에 모여드는 가난뱅이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리고 팔꿈치로 얻어맞고 있다면- 내가 다시 한 번 누님의 그 근심스런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비집고 올라가 맨 위 층계를 점령하고서, 발 아래로 흔쾌하게 펼쳐진 극장 전경을 볼 수 있는 구멍이 트일 때면, 아- 이제 살았구나! 하고 부르짖던 누님의 그 유쾌한 음성을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다면- 그 옛 시절을 사오기 위해서라면, 크리서스가 가진 것보다, 거부 유태인 R씨가 가졌다고 생각되는 재산보다 더 큰 재산이라도 깊디깊은 바다 속에 던져버릴 용의가 있답니다. 그러니, 이제 저 즐겁고 작달막한 중국인 하인이 침대 덮개만큼이나 큰 양산을 들고 저 농청색 정자 안에 있는, 저기 귀엽고도 싱거운 성모 마리아를 반쯤 닮은 한 귀부인의 머리 위를 받치고 있는 저 찻잔의 그림이나 감상합시다.”


 1770년대에 출생한 찰스 램처럼 우리시대의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찰스 램과 비슷한 가난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오래 된 도자기>가 주는 정서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현실에 만족하며 크고 작은 어려움에 대처하는 능력도 있으나 최근의 20~30대 연령층에게 가난의 고통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어 현실만족에 이르기가 어려운듯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어려운 시기로 회기 할 수도 없으니 가정, 학교, 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이 좋은 가치관을 세울 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 수필을 꽤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 찰스 램이 누이의 표정을 묘사하는 문장이 “— many a long face did you make over your puzzled accounts, and in contriving to make it out how we had spent so much — ”이었으며 이를 우리말 번역은 “여러 차례 얼굴을 길쭉하게 늘어뜨리곤 하였지”라고 하여 퍽 실망하기도 하였다. 왜냐면 ‘ long face ’는 ‘우울한’ 또는 ‘슬픈 듯한’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문학자로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번역자가 직접 번역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읽으면서 번역자가 정확한 의미를 알면서도 어떤 사정에 따라서 그렇게 번역을 할 지 않았을까 생각하였다.

 
 <제야>라는 글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 12월 31일이 되면 매년 보신각 타종행사를 하는 제야풍습이 이미 영국에서 100년 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유럽-일본을 거쳐 우리가 받아들인 행사인지 궁금하다.

 

<기혼자의 행동에 대한 어느 독신자의 불평> 찰스 램은 한동안 Ann Simmons라는 여성을 애인으로 삼았던 시기가 있었고 Alice Winterton(Alice W-n)을 가명으로 하여 자신의 글에 등장시키기도 하였다. 45세에 배우 패니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한 일도 있었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영국이나 우리나라인 경우나 노총각, 노처녀 또는 독신으로 늙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있어 이에 대한 불평을 재미있게 적었다. 그 첫 부분은 이렇다. “결혼 한 사람들은 내가 독신으로 살고 있어 보다 고차적인 즐거움을 잃고 있다고 말하는데, 나로서는 그 기혼자들의 약점을 기록해두는 것으로 그 고차적인 기쁨에 대해 스스로 위로를 해온 지 오래다.” 그렇다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생활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만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즉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빈곤한 벗과 친척들> 찰스 램이 일에 벗어나고 명성도 높아지고 책을 출판하여 수입도 늘어나자 빈곤한 친구들과 친척들이 이런저런 도움을 청했던 것 같다. 세상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찰스 램 주위에 있는 이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은 자신이 궁핍에 몰려 지내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위엄이나 체면을 세우면서 친척의 도움을 받고 지내는 것을 관찰하여 대단히 유머러스하게 글을 적었다.

 찰스 램의 수필을 읽어보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시간적으로 100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영국 런던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제로 삼았으나 인간이 겪는 희노애락 그 중에서도 가난이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사람 사는데 뒤따르는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정서가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마치 내가 이야기 하듯 실감 있게 그러면서도 재치 있게 적었다. 또한 찰스 램의 수필은 고전을 섭렵하고 당대 문사들의 글을 읽었다고는 하나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 지며 글을 쓸 때 오류가 발행하는 법인데 찰스 램의 글에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롯하여 성경의 여러 인물의 등장이 시의 적절하게 등장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짐작키로는 찰스 램은 책을 읽고 난 다음 자세히 정리하고 분류하여 글을 쓸 때 이를 잘 이용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고통과 좌절을 넘어서 삶을 관조하며 써 내려간 찰스 램의 수필이야말로 진정한 수필의 정수가 아닌가 하며 시간이 흐르면 어느 땐가 다시 꺼내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