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밥벌이의 지겨움>을 읽고...

깃또리 2018. 12. 26. 12:28

<밥벌이의 지겨움>을 읽고...
김훈지음
생각의 나무
2015. 03. 12



 처음 김훈씨의 저작목록에 이 책이 들어 있어 장편소설이겠거니 생각했었다. 막상 대출하여 펴보니 소제목 54개로 이루어진 에세이 모음으로 그 중 하나가 <밥벌이의 지겨움>이다.  이 에세이집의 제목이기도 한 <밥벌이의 지겨움>은 2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글이다. 인간은 입안으로 밥을 넘겨야 살 수 있는 원초적인 운명, 밥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밥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숙명에 대하여 작가는 인간의 비애를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밥벌이를 지겨워하고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은 인간을 향해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만" 작가는 밥벌이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며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라고 격려하고 있다


 뒷부분에 <사무라이, 예술가 그리고 김훈>이란 제목의 남재일교수와 인터뷰 내용이 포함되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 후기 쓰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소설이라면 줄거리도 쓰고 소설이 주는 일관된 느낌을 적을  수 있지만 수십 편으로 구성된 에세이집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에세이 중에서 인상 깊은 몇을 골라 내 느낌을 간추려 후기를 대신 할까 한다.


 <아이들은 청순하기만 한데>라는 제목의 글은 김훈이 사는 동네 여자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이 모여서 까르르 웃고 떠드는 모습과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날 2학년 학생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3학년 선배와 재수생들을 응원하는 모습을 새벽 산책길에 발을 멈추고 오랫동안 지켜 본 다음 쓴 내용이다. 뒤이어서 충남예산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이 젊은 여교사에게 차심부름을 시킨 일이 발단이 되어 교장이 자살하고 교장과 여교사를 대신하여 양쪽이 각자의 입장을 세력화, 집단화, 이념화, 정치화로 발전시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이야기를 썼다. 김훈은 이 상황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쏘아붙였다. "이 싸움의 형국은 한 마디로 개수작이다." 조금 거칠고 점잔하지 못한 표현이지만 전체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속 시원하고 과연 김훈 씨답다. 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사건에서 교장 편에 선 사람들은 교장의 죽음을 '순교'라하며 전교조 교사들을 친북세력이라 매도하였으며 전교조교사들은 교장집단을 '수구세력'으로 내몰았는데 이에 대하여 김훈 씨는 '이 모든 소음이 모두 다 개수작이라는 말이다.'라고 다시 일갈하였다. 김훈 씨의 해법은 이러하다. "젊은 여교사가 늙은 교장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주는 선의와 애정은 예에 맞으나, 또한 교장이 젊은 여교사에게 차 시중을 시키는 일은 스스로 삼가는 것이 또한 예에 맞는 일이라 생각한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양쪽이 인의예지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온당하고 사리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로 교장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다.  최근 우리사회의 일들이 대부분 이러하다. 극과 극으로 대치하고 너 죽고 나 죽기 식으로 양보나 타협이 없는 강팍한 싸움판의 세상이 되었다. 모두 우리 스스로 뒤돌아 볼 일이다.


 <서민>이란 글에서 선거와 투표시기가 되면 갑자기 후보자들이 서민 행세를 하며 팔을 걷어 부치고 날뛰는 꼴을 김훈씨는 가차 없이 질타하였다. "왜 스스로 높은 귀족의 정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쓰레기통 근처를 얼씬거리며 쌍소리를 해대는가(중략) 지도자는 대중이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대중 전체의 뜻을 거역하면서 그 반대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귀족정신을 모조리 처부수어야 서민의 낙원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가 귀족의 명예심을 잃을 때 서민의 지옥은 시작된다. '서민'은 귀족의 반대말이 아니다." 이 또한 참으로 옳은 말이다. 모름지기 서민을 이끌 지도자가 될 사람은 서민들이 지니지 못한 고결하고 높은 이상을 가지고 서민의 앞장에 서서 나아가야 서민도 살고 지도자도 살고 그 민족 그 국가가 번성할 것이다. 잠시 동안 서민 흉내를 내거나 서민들이 듣기에 좋은 이야기나 행동을 하여 지도자의 자리에 앉는다면 결국 그 사람은 임기 내내 서민의 눈치나 보고 이를 이용 하여 자신의 영달만 챙길 것이다. 그 나라의 정치 지도자의 수준은 그 나라의 투표하는 사람들의 수준이라는 말을 누군가가 했다. 지극히 온당한 말이라는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 투표권자들도 누가 과연 옳은 지도자인지를 가려낼 줄 아는 수준에 이를 때 우리나라의 정치 수준은 올라가고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가 출현하게 된다. 작금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발전은 상당 수준에 이르렀으나 정치 문제는 모두가 실망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런 정치 지도자를 둔 나라에 살고 싶지 않아 이민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조금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의 정치 지도자 수준은 국민 수준이라는 말에 비추어 우리 국민 수준이 조금 더 성숙되어 올바른 정치 지도자를 골라 뽑을 수 있는 시점에 와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정치 선진국을 부러워하고 기대하고 있지만 우리는 참을성 있게 시간이 좀 더 흐르기를 기다려 할 것 같다. 경제수준은 짧은 기간에 높일 수 있었지만 정치 수준은 경제 수준처럼 단기간에 향상시킬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치욕>이란 소제목의 글에서 김훈은 자신이 1948년 태어난 걸 감사하다고 했다. 만일 더 일찍 태어나 즉, 일본 제국시대 살았더라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고 한다. 왜냐면 간단히 말해서 그 시대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숨어서 민족운동을 하거나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어 불멸의 애국자가 된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그 숫자가 미미하고 대부분 일제에 협력하고 변절하여 두고두고 치욕을 당하는 인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간단히 말해서 이름 있는 인물 열에 아홉이 바로 이런 운명에 맞닥트렸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김훈은 "6.25 전쟁 때 유아기, 이승만 치하에서 자라, 박정희 유신통치 밑에서 신문기자, 전두환 시절에 엎드려 더럽고 견딜 수 없는 세월을 살았지만, 그래도 일본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태어난 운명에 나는 감사한다."라고 실토하였다. 지극히 솔직하고 옳은 말이다. 김훈은 조선시대 청 태종 앞에서 엄동설한에 땅바닥에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땅에 이마를 세 번 찧는 소위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치욕적인 항복의례를 치른 다음 겨우 나라와 백성을 보본한 인조 임금의 고뇌와 치욕을 이야기하였다. 누구나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면 개인에게도 크고 작은 치욕이 없을 수 없다. 그 치욕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왔는가에 따라 치욕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치욕이 치욕으로 머무를 때 그 치욕은 독이 되고 치욕을 거울삼아 나아갈 때 그 치욕은 약이 될 것이다.


 에세이가 끝나고 뒷부분에 <사무라이, 예술가 그리고 김훈>이란 제목으로 김훈 씨와 남재일 교수의 인터뷰내용이 실렸다. 남재일 교수는 김훈 씨와 대면하는 일은 처음이지만 김훈 작가의 글을 다 읽어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인 듯한 착각을 하였다고 썼다. 김훈 씨의 신문사를 여려 번 옮겨 다닌 일을 묻자 김훈은 직장에서 불화가 생기면 구태여 해결하려들지 않고 자신이 직장을 떠났다고 말한다. "옛 말에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따랐으며 "불화를 유지하고 불화인 상태로 있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 생각한다."는 말로 다시 보충하였다. 하긴 직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애면글면 부딪쳐 해결하려고 고민하는 것 보다 훌훌 털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남재일 교수는 <칼의 노래>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문체에 김훈씨가 반한 게 아니었는가 하고 묻자 이에 대한 답으로 “‘바다는 잔잔했다. 부하 모모가 군령을 어기기에 목을 베었다.’같은 문장은 전압이 높은 문장으로 두 문장사이에 수다를 떨고 싶지만 참았다”고 하였다. 사실 김훈 씨가 쓴 어떤 회고에 따르면 대학생시절 우연히 <난중일기>를 읽고 언젠가 이순신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다는 말이 나오고 20년이 훨씬 넘어 <칼의 노래>를 썼다. 김훈 씨는 집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체 이야기 중에 훼밍웨이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존 스타인벡의 풍요로운 문장에 끌린다고 밝히면서 존 스타인벡의 문장은 내면으로 들어 갈수록 길이 넓고 깊다고 하였다. 스타인벡이 나오니 작년에 그의 작품<진주, The Pearl>을 읽다가 그만 둔 일이 생각난다. 올해 다시 찾아 읽어보아야겠다.


 한계레신문와 조선일보 이야기를  하면서 진보=선, 보수=악이란 구도로 세상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다른 틀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여성문제를 보는 시각에 관련하여 자신은 '가부장주의'라고 떳떳이 밝히며 여자는 약하니까 보호하고 보살펴야 하므로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과 가깝다고 말했다. 소설은 문장이나 서사는 여성적이지 않지만 여성 펜이 많다고 남재일교수가 말하자 작가는  “여자를 풍경처럼 보면서 여자와 생명을 생각하면 경이롭고 정체를 알 수 없다”고도 하였다.


 나는 제법 그동안 김훈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었지만 개인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인터뷰내용을 통하여 평소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도 하고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어 퍽 흥미로웠다. 단지 조금 오래 전 내용이라 지금도 김훈 씨의 생각에 변함은 없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