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고흐, 고갱 그리고 옐로 하우스>

깃또리 2018. 12. 17. 09:54

<고흐, 고갱 그리고 옐로 하우스>
마틴 게이포드 지음/ 김민아 옮김
안그라픽스
2015. 02. 20.



 '아를에서 보낸 60일'이란 부제가 붙은 빈센트 반 고흐가 남프랑스 아를에 1888년 2월 20일 도착하여 다음해인 1889년 3월 3일 까지 일 년 조금 넘게 지내면서 그 기간에 고갱이 아를로 내려와 함께 지낸 60일을 기록한 내용이다. 말이 기록이라 했지만 사실은 글쓴이가 많은 자료를 연구 조사하여 일부분은 추측을 사실처럼 표현하기도 하였다.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도착하여 12월 23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때문에 다음날 아를을 떠나 고흐와 함께 지낸 기간이 60일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2008년 생일선물로 사무실의 젊은 동료로부터 받았으나 400페이지가 넘는 제법 두꺼운 책이라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 읽었다. 어언 만 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책을 받았던 동숭동의 2층 맥주 집과 자리를 함께 했던 세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유의 하나로 책 속표지에 세 사람의 생일축하 글을 다시 읽게 되면 더욱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요즘 책 선물이 예전 같지 않다. 왜냐면 책에 대한 기호도 각자 다르고 선물로 받으면 읽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받은 사람들이 기꺼워하지 않고 더구나 책을 구하기도 쉽고 책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하여 선물로써 큰 인기다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도 책 선물이 소중하고 더구나 내가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용이 담긴 책은 더욱 그러하다. 그간 고흐에 관한 이런저런 책을 읽고 전시회에도 찾아 다녔지만 고흐가 살아서 그나마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왕성한 창작 의욕으로 여러 빛나는 걸작을 그린 아를에서 고갱과 보낸 기간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 책은 퍽 유익하고 흥미 있다. 더구나 일부러 맞추기나 한 듯 책을 다 읽고 살펴보니 2008년 2월 19일 선물 받았는데 2015년 책을 읽고 덮은 날이 2015년 2월 19일이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완벽하여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세 사람의 헌사와 함께 적은 날짜를 보면 한 사람은 내 생일이 1월 12일이라는 걸 알고 2008년 1월 12일이라 적었고 두 사람은 당시 모인 날짜인 2월19일로 적었다. 내 생일은 음력이다 보니 아마 그해 2월 19일이 음력으로는 1월 12일이었던 같다. 눈에 익은 세 사람의 필체를 보고 있노라니 이젠 자주 못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이런저런 일들이 떠오른다. 필체는 그 사람들이 전달하는 문구의 내용과 함께 글쓴이의 성품과 인상을 나타내는 상징 기호이기도 하여 이렇게 시간이 흘렀으나 세 사람의  손 글씨를 보고 있으면 그들과 함께했던 즐거웠던 순간들이 머리를 스친다. 책은 총 12장으로 나누어 뒤에 문헌노트, 감사의 말, 색인으로 구성되었으며 표지 뒤에는 고흐와 고갱의 대표적인 그림들이 수록되었다. 아울러 아를의 위치가 나온 지도와 찾아가는 교통편 그리고 고흐와 고갱이 살았던 엘로 하우스의 1층과 2층의 간단한 평면도가 실렸다.


 상당부분 그간 내가 고흐관련 책이나 전시회에서 읽었던 설명문과 겹치기도 하였으나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되어 이런 부분을 간단히 간추려 후일 다시 읽어 기억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 고흐가 에밀 졸라와 귀스타브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알퐁스 도데, 기드 모파상 그리고 도스프엡스키와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즐겨 읽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갱도 책을 좋아하여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감명을 받아 자신의 자화상 아래 서명과 함께 레미제라블을 써서 '자신은 유죄를 선고받은 범죄자이며 부랑자이고 순교자이자 성인인 장발장과 비교될 수 있는 인물'임을 표현했다.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고갱은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도 썼다 한다. 당시 고갱뿐만 아니라 후일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로 불리는 화가들은 사회적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기에 스스로를 사회적 이단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에서 고갱의 언어습관 중에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하였다. 즉, 고갱은 형 빈센트 반 고흐를 단지 '빈센트'라 불렀고 동생 테오 반 고흐는 '반 고흐'로 불렀다는 대목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였는데 왜냐면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형이나 언니는 성씨로 부르고 동생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었는데 고갱이 반대로 불렀기 때문이다. 짐작하기로 당시 사회적으로 위치가 고흐보다 높기도 하고 고갱은 테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테오를 '반 고흐'라는 성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는 당시 프랑스 화폐 1프랑이 지금 우리나라 돈 가치로 약 8000원 정도로 추정해 보았으며 고갱과 고흐가 아침 식사비로 1프랑씩을 쓰는 게 아까워 빵과 커피로 집에서 아침식사를 대신하였다 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 달에 물감, 캔버스 구입 등을 포함하여 두 사람이 300~400프랑을 지출하였다 하니 요즘으로 치면 두 사람이 300만 원 정도를 썼으며 이 비용의 대부분을 동생 테오에게 의지하였다. 당시 생존 화가 중에서 어니스트 메소니에 그림이 가장 인기가 높아 최고 40만 프랑을 기록했다고 하였는데 대략 32억 원에 해당하니 놀랄만한 금액이고 이에 비하여 고갱은 자신의 그림 값으로 400프랑을 받아 기뻐하고 빈센트는 그 마저도 기회가 없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단 한 점이 몇 십 프랑에 팔렸다 하니 어이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클로드 모네는 상당한 인정을 받아 말년의 여생을 지베르니에서 상당히 여유롭게 보내기도 하였다. 고갱과 고흐 두 사람이 2주에 한 번 정도 들렸던 창녀촌에 2프랑을 썼다는 내용도 나온다. 생각보다 적은 금액이다.
 
 고흐의 습관이나 취미를 살펴보면 커피는 거의 중독 수준이었고 피아노는 배우긴 했으나 잘 치지 못했다 하며 스포츠나 게임은 즐기지 않았으나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하여 자신이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위해 며칠 동안 몇 백 킬로미터를 걸었던 일도 있고 아를에서도 들판 길을 몇 십 킬로미터 걷다 돌아 올 정도였는데 앞서 말한바와 같이 독서와 글쓰기 특히 편지쓰기는 평생 그의 취미였다. 고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고 그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 생각했다는데 세상을 돌아보는 한 방법이 낮에는 자연 속에 걷고 밤에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이었다.


 고갱과 빈센트 모두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고갱은 가톨릭 신앙이 가지고 있었고 고흐는 네덜란드 인답게 개신교여서 두 사람의 종교관은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으나 두 사람 모두 전통적인 기독교는 그 역할을 다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를 예술이 대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사실 이들뿐만이 아니라 19세기의 다른 예술가들도 종교에 대한 기대를 이미 버리고 문학, 미술, 음악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여 인류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견지하였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는 '시는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물게 하는 것이며, 유일한 영적인 길이다.'라는 말까지 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경스런 말이지만 종교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에게는 환호 받았던 것 같다. 기쁘게 선물로 받은 책, 즐거운 책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