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빈센트의 구두, The Old Shoes of Vincent>를 읽고...

깃또리 2018. 12. 13. 12:59

<빈센트의 구두, The Old Shoes of Vincent>를 읽고...
박정자 지음
기파랑 에크리
2015. 02. 08.


 책의 부제가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의 그림으로 철학읽기"로 술술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사실 그 동안 몇 차례 서가에서 꺼내 읽기를 시작했으나 내용이 어려워 읽기를 그만 두고 다음으로 미루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번에 끝까지 읽기는 했으나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서 다시 책을 펼쳐 훑어보니 단편적인 사실들만 인식의 범주에 들어온다. 이런 책일수록 후기를 적어놓지 않으면 책 읽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내용 요약에 시간을 들이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구두를 그렸는데 깨끗하고 멋진 구두가 아니라 낡고 흐트러진 모습의 노동자나 농부들이 신었을 구두이다. 고흐는 평소 자신의 생각하고 있던 것 처럼 삶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화폭에 그 모습을 옮겼으며 초기 <감자 먹는 사람들>을 시작으로 <씨 뿌리는 사람>에서 농부를, 술집여인인 <지누 마담> 등도 이런 고흐의 생각이 담긴 작품이다. 이 책의 머리말 제목은 '그림과 사유의 직조'이며 철학자들이 '그림으로 철학 말하기'를 첫 문장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보기와 말하기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인식수단인데, 그것을 대표하는 미술과 문학 혹은 철학의 교류가 요즘 매우 활발하다. <다빈치 코드>나 <진주 귀고리 소녀>처럼 회화를 이야기 속에 끌어들인 문학이 인기를 끌고,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자들도 앞을 다투어 회화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어서 미셸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질 들뤼즈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그리고 자크 데리다는 발레리오 아다미와 반 고흐의 그림을 분석하여 책을 펴냈다고 하였다. 회화와 철학이 가까운 이유로는 '그림이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의무감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운 그 자율성 때문'이며 '요즘 회화의 철학과 만남은 영상과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대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였다. 철학자들이 그림을 분석하면서 공동으로 삼는 주제는 '미란 무엇인가'이며 예술의 본질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 미학을 지배해온 ‘Theory of Mimesis, 미메시스 이론’이고 재현의 이론으로 ‘예술의 본질은 모방’이라고 하였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속에 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가장 쉽게 이해되었다. 즉 '현실적인 것은 아름답지 않고, 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비현실 즉 상상의 세계로 들어 갈 때에만 미가 발생 한다' 고 보았다. 상당히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가 실제 도자기 꽃병에 똑 같이 꽂혀 있을 수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실제의 해바라기는  고흐의 그림만큼 열광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전혀 없는 어떤 꽂을 그렸다면 해바라기 그림처럼 인기를 얻을 수 없다. 즉 현실에 바탕을 두고 덧붙이는 모방, 재현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나는 사르트르가 언급한 내용 중에서 완전히 동의 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현실적인 것은 아름답지 않고'라는 문구가 바로 그렇다. 예를 들면 내 개인적인 경험이기는 하지만 중국 '장가계'의 풍경을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가 모방하여 그렸다하여도 실제의 모습을 따라 갈 수 없다는 생각이며 그래서 이 부분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또한 '현실을 발판삼아 비현실의 세계로 들어가 미가 발생'한다는 말에는 수긍하며 특히 문학작품은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문학작품과 관련된 언급이 포함되어 옮겨본다. "언어를 재료로 하는 문학에서 작품의 물질성인 언어는  사물성과 도구성의 이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원래 기호인 언어는 근원적으로 도구이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인데 그 언어는 도구가 아닌 사물로 생각할 때 즉 언어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주목할 때 거기에서 예술작품인 시가 발생한다." 이는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기도 할 것이다.


 제 1장에서 ‘푸코와 데리다에 있어서의 회화의 은유성’ 이란 소부제목으로 미셸 푸코가 스페인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그리고 데리다가 <디뷰타드 혹은 그림의 기원>으로 가시성을 다루었다. 가시성(visiblity)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이며 비가시성(invisiblity)이 가시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언표(statement)라 하였다. 그렇다면 언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였다. 언표는 명제, 문장, 담화행위와 다르다 하였으며 예를 들면 컴퓨터의 문자배열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알파벳 나열이지만 타자 연습용으로 인쇄된 문자판의 알파벳은 언표라 하였다. 왜 언표가 작품에서 다루어져하는 이유는 푸코에 따르면 인간의 '앎'은 가시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의 조합, 교직이고 언표가 가시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해외여행의 경우 사전에 충분한 지식을 얻으면 실제 그 장소에 가서 얻는 것보다 미리  획득한 지식의 확인으로 더 풍부한 사실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점에 약간 다른 견해를 말하고 싶다. 사전에 얻은 지식이 물론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지식의 울타리에 갇혀 즉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하여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사전 지식의 획득이 바람직한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제2장은 제목 자체가 <사르트르>이다. 사르트르는 젊은 시절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으며 플로베르를 문학의 이상으로 삼았다가 이후 시간이 흘러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쓸 시점에서는 추악한 부르주아 작가로 격렬히 비판하였다 한다. 참여문학의 교황으로 장년기를 보낸 다음 말년에는 플로베르 연구서 <집안의 백치>를 써서 그는 다시 청년시절 문학관으로 회기 한 것은 아닌가 저자는 되묻고 있다. 사르트르는 마티스가 그린 여러 점의 그림에서 붉은 양탄자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한다. 즉 마티스의 빨간 양탄자의 그림이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막상 페인트 통에 든 빨간색이 아름답다거나 집에 있는 빨간 양탄자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마티스의 양탄자는 비현실의 물체라는 말이다. 그러나 철학자의 눈으로 보면 화폭은 손으로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사물에 속한다 하였다. 데리다 역시 예술작품은 작품이기 이전에 하나의 실재적인 사물이며 식기와 다름없으나 미적 관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예술작품에는 일반 사물이 지니지 못한 그 무엇이 있다고 하였다. 철학자들은 사물의 이원론을 내세워 사르트르는 사물 속에서, 하이데거는 사물 밖에서 이를 추구하였으며 표면의 물질적 오브제와 내면의 상상적 오브제가 두 겹으로 밀착되어 미학적 오브제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 중요한 주장은 미학적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찰자도 비현실화 하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며 이를 '상상적 태도'라 하였다. 예술의 속성을 간단히 표현하는 것으로 '미의 실체는 무'  또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림, 소설, 영화는 현실에 출발하여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 상상의 세계이며 현실의 부정 혹은 무화이며 그런 의미에서 플로베르는 '현실이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도약판'이다 라고까지 주장했다 한다.


 몇 몇 철학자와  문학가들의 주장을 언급하며 문학, 음악, 미술에 걸쳐 예술은 무엇인가를 논고한 주장들을 실었는데 비교적 쉽고 간단하게 기술하여 미의 세계를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제3장은 <하이데거>가 제목이다. 글의 시작 전 페이지는 고흐가 아를을 떠나 죽기 전에 두 달 정도 체류하였던 오베르 시청사를 그린 그림이 나왔다. 고흐는 농민들의 일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을 따로 그린 그림도 여럿 있는데 나막신을 포함하여 신발만 그린 7점, 다른 정물과 함께 그린 것이 2점으로 모두 9점이라 한다. 하이데거의 글은 어려운 문장이지만 예술작품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반 고흐의 구두 그림들을 예로 삼았으며 구두 그림들은 단순히 제품의 성격을 뛰어넘어 존재의 진실을 나타냈다고 하며 다른 정물에 비하여 구두는 그 어떤 물건보다 인간의 모습을 닮은 인간화된 사물이며 인간 삶의 은유 또는 환유라 하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일반사람들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빌려 쓰거나 주고받기도 하지만 구두는 조금 다르다. 물론 발의 크기와 형태가 제 각각이어서 남의 신발을 신을 수 없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소지품보다 신발은 그 주인과 일체성이 강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살하려는 사람 대부분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기 전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자살을 했다는 신문 기사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흔적으로 신발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술과 구두의 관계를 떠나 프로이트는 '구두의 성적 상징성'을 제시하였으며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반 아이크가 그린 <아르놀피아의 혼약>이란 그림 속에 오른 쪽 구석에 따로 떨어져 있는 나막신에 대하여 그 해석이 보는 사람마다 구구하다고 하였다. 사실 이 그림은 요즘의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져서 당시의 사회, 문화, 의상, 풍속, 종교를 이해하는 열쇠라 한다.


 나는 <테라와 예술>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부분을 특히 흥미 있게 읽었다. "예술 작품역시 인간의 노동의 산물이며 작품(불: oeuvre, 영: work)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노동의 흔적이 들어 있다. 작품의 노동적 성격은 그것이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부분에서 라틴어인 0pus까지 넣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같은 작품이라도 음악작품에 한정하여 쓰는 말일지도 모른다. 고대 희랍인들은 공예와 예술을 테크네, techne로 공예가와 예술가를 technites로 불렀다고 알고 있으나 하이데거는 이를 반박하여 고대 그리스의 개념들이 체험과 유리된 채 라틴어로 번역되어 심한 왜곡이 일어났으며 따라서 테그네는 공예도 예술도 아닌 더구나 기술도 전혀 의미하지 않았으며 '앎의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한다. "즉 현전하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보았다는 것이며 그리스인들은 앎의 정수를 알레테이아(aletheia) 즉 존재폭로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좀 어려운 말이다. 나는 꽤 오래 전 어느 대학교 영문학과의 스터디 그룹에 잠시 참여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스터디 그룹 이름이 ‘알레테이아’여서 궁금하여 알아보았더니 그리스어로 '진리, 眞理'라고 하여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 단어로 부를 수 없는 어려운 말인듯 하다. 다시 이 책에서 이 어휘를 만나게 되어 검색해보았더니 다음과 같다. A + lethe에서 A 는 부정의 의미이고 lethe는 망각의 강 '레테'로 원래 사람은 천상의 이데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태어나면서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다 잊어버리고 따라서 진리를 발견하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받거나 현실 속의 불완전성을 보고 이데아의 개념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데자뷰 현상 때문이며 따라서 알레테이아는 비은폐성 혹은 진리를 의미한다고 했다. 결국 인간이 진리를 다시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말인데 조금 복잡하고 난해하다. 레테의 강을 다시 만나니 이문열 작가의 <레테의 강>이란 소설이 떠오른다.


 마지막 4장은 <영화읽기>이다. 1절의 제목은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의 신화, 역사 그리고 기호학적 해석"으로 원래 이 영화의 제목은 <The draughtsman's Contract>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으로 상영되었고 1982년 작품이라 한다. 이 제목은 프랑스에서 영화를 상연할 때 만든 제목을 우리나라에서 따라 했으며 제대로 하려면 <화가의 계약>정도지만 채색화가는 painter이고 draught man은 드로잉화가이므로 <화가의 계약>도 완전한 번역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화가는 채색화가로 하였다 한다. 이 영화는 신화와 상징을 이해하여야 감상을 할 수 있는 조금 난해한 영화인 것 같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요한 상징체계는 여자=과일=생식=죽음으로 그리스 신화의 이해 없이는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없을 것 같으며 이 영화의 해설을 읽는 것조차 힘겹다.


 제2절은 프레임과 파레르곤:<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을 통한 데리다 읽기이다. 내가 이 절에서 어려움 속에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정원 이야기를 하면서 파라다이스라 말이 고대 페르시아에서 정원을 의미했다는 말과 언어학에서 수 없이 언급되는 시니피앙(signifian)과 시니피에(signifie)를 여기서 설명하기를 시니피앙은 한 단어의 청각적 이미지이고, 시니피에는 그 단어의 의미 혹은 개념이라고 설명하여 이해하는데 쉽게 와 닿는다. 예를 들면 '꽃'이라는 말의 발음 혹은 문자적 측면이 시니피앙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꽃'이라는 물건의 개념이 시니피에'라는 설명이 아주 쉽게 이해된다. 또 다른 예로 '책'의 시니피앙은 종이로 만든 물건이고 책의 시니피에는 책이 의미하는 지식 또는 교양일 것이다.


 책 마지막 부분에서 <드로잉에서의 가시성과 눈멂>이란 작은 제목아래 글이 눈길을 끈다. 데리다는 그림의 기원을 '눈 멂'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한다. 예를 들어 드로잉은 지각보다 기억에 의한다는 것이다. 화가가 모델이나 풍경을 앞에 두고 그릴 때 모델이나 풍경을 보고 있는 순간은 지각이고 캔버스나 종이에 눈을 돌리고 그리는 순간은 이미 대상에서 눈을 떼어 기억으로 그리는 것으로 모델이나 풍경에 눈이 멀어 있다는 주장이다. 화가가 다시 모델이나 풍경을 바라보면 이는 캔버스나 종이에 대하여 눈이 멀어있어 데리다는 이러한 눈멂이 모든 그림의 기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앞에서도 말한 예술의 모방설은 Mimesis라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서의 문학의 본질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 널리 알려져 있다. 흔히 재현(representative) 모방(imitation)으로 대응되며 문학을 넘어 모든 예술 전반에 통용되기도 한다. 미메시스란 어휘가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건물이 파주출판단지의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운영하는 <Mimesis Art Museum,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퍽 좋아하는 건물이며 포루투갈의 생존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건물이다. 1층 입구에 들어서면 넒은 로비에서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책들을 가져와 읽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2층으로 올라가 전시물도 볼 수 있어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건물이다. 이 책을 쓴 박정자씨(1943~  )는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문 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언론사에서 일하다 상명대학교 불어문학과교수로 재임하였다. 1979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제1권 앎의 의지를 <성은 억압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국내에 푸코를 처음 알렸다 한다. 여러 책을 번역하거나 해설서를 쓰기도 하여 <로빈슨 크로스의 사회>와 <시선은 권력이다>는 교양추천도서이고 <마이클잭슨에서 데리다까지> 또한 우수교양도서이며 <마그리트와 시물라크르>, <이것은 Apple이 아니다>는 우수학술도서로 추천되었다 한다. 욕심 같아선 이런 고급교양도서를 자주 읽고 싶지만 밑천이 부족하여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에 이끌려 읽게 되어 고흐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으며 다소 어려웠지만 즐거운 책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