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허기의 간주곡, Riturnelle de la faim>을 읽고...

깃또리 2018. 11. 21. 12:35

<허기의 간주곡, Riturnelle de la faim>을 읽고...
J.M.G 르 클레지오/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
2017. 11. 22.

 

 오랜만에 르 클레지오의 소설을 읽었다. 원래는 작가의 소설 <홍수>를 이휘영씨가 번역한 책을 찾아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다 꺼내든 책이다. 작가의 책 중에서 <황금 물고기>가 가장 기억에 남고 이화여자대학 초빙교수로 우리나라에 체류하던 시절에 쓴 <운주사, 가을비>라는 시도 함께 떠오른다. 이 소설 <허기의 간주곡>은 1930년 즈음부터 1940년 중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프랑스 파리, 니스를 지역적 배경으로 쓰였으며 작가가 한국 체류 시기에 썼다 한다. 2007년 이화여자대학 강의, 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 그리고 2001년부터 대산문화재단의 초청으로 꾸준히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고 있으며 올 해 2017년에도 초청 방문으로 서울에 왔다. 요즘 서울을 무대로 한 소설 <빛나 언더 더 스카이, Bitna under the Sky :가제>를 쓰고 있는데 곧 발표 할 예정이라 한다. 그간 국내에서 대접이 소홀하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세계적인 작가가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이 깊어 기쁘다.

 

 소설의 주인공 에텔은 어느 해에 태어났다는 얘기는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1930년에 10살이라는 구절이 보이므로 1920년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프랑스령 모리셔스 출신으로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이런저런 사기꾼, 협잡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점차 재산을 탕진하였으나 파리 시내 코탕탱 가에 살면서 살롱을 열어 소위 부르주아 계층의 사람들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을 이야기 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 어머니 쥐스틴 역시 부잣집 딸로 많은 재산을 상속 받았으나 남편이 재산을 날리기만 하고 ‘모드’라는 여가수와 애인관계를 맺고 있어 불화와 불만의 세월을 보낸다. 에텔의 외할아버지 솔리망씨는 외모가 멋진 나이 든 신사로 에텔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젊은 시절 파리에 체류 중이던 쏘련의 레닌과 체스 친구였으며 주변의 신망이 높은 사람이다. 솔리망씨는 아들인 에텔의 아버지를 믿지 못하여 에텔을 상속자로 지정하고 에텔이 13살이던 1934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에텔의 재산을 자신에게 옮기고 허황된 사업에 투자했다가 역시 실패한다.
 
 독일군의 파리 침공으로 에텔의 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꾸려 가족을 데리고 니스로 피난하였으나 물자 부족으로 고생한다. 에텔은 우연히 아버지의 옛 애인 모드를 만나 만감이 교차하였으나 그렇다고 미워 할 수만 없어 자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은 도움을 주며 자주 모드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일은 그동안 여러 가지로 어머니의 속을 썩이던 아버지가 병이 들어 거동조차 불편하자 어머니 쥐스틴은 그래도 아버지를 보살피고 십대로 나이 어린 에텔도 처지가 어려운 모드를 돌보는 모습이다. 넓게는 전쟁으로 인한 불행, 좁게는 한 가족의 불화 속에서도 상대를 용서하고 연민의 마음을 나타내는 부분은 인간은 원래 선하다는 성선설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주인공 에텔은 러시아 출신으로 파리에 정착하여 어렵게 살아가는 학교 친구 ‘제니아’를 무척 좋아했으며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항상 잊지 않는다. 그러나 제니아는 에텔과 달리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나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또 다른 등장인물로 아버지 살롱에 말없이 앉아 있던 영국인 청년 포링펠트와 서서히 사랑이 싹터 전투에서 돌아 온 그와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은 마치 주인공의 일기처럼 실재 프랑스 파리와 니스의 여러 거리와 역사적인 실재 인물들 그리고 그 당시의 전쟁과 혼란 등 사회상을 세밀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작가 르 클레지오가 니스 출신이고 파리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묘사가 치밀한듯하다. 특히 코탕탱 가 살롱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에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예술분야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케린스키, 미라보, 히틀러, 무솔리니, 처칠, 체임벌린, 레닌, 라벨, 클로드 레비스토로스, 루빈스타인, 드골, 찰스 디킨즈, 레옹 푸코, H. G. 웰즈, 등의 이름은 그나마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외에도 내가 처음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유명 인사뿐만이 아니라 다방면에 예비지식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와 사건들이 나와 폭 넓은 지식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에텔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니스에서 북쪽 산악지대인 작은 마을 로크빌리에르로 다시 피난을 가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마치 샤무아 사냥이라도 나서는 듯”이라는 문구가 나오고 페이지 아래 각주에 ‘샤무아, Chamois’는 산악지대에 사는 야생 영양이라 설명하였다. 내가 1994년 유럽여행 중 오스트리아 샤모니, Chamonix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케이블카를 타고 알프스의 영봉 중 하나인 몽블랑을 올랐었는데 마을 이름 샤모니가 그 지역에 서식하는 유럽 영양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기억이 난다. 로크빌리에르 마을도 아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 인듯하다. 이 동네의 묘사부분에서 “어디서나 강물의 낭랑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10년 전의 유럽 여행이 떠오른다. 오스트리아 짤즈부르크에 저녁 늦게 도착하였으나 마침 국제행사로 시내의 모든 호텔이 예약이 끝나 할 수 없이 30분 정도 떨어진 독일의 바드라이헨할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잠을 잤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책길에 깨끗하고 작은 급류 시냇물소리가 낭랑한 음악소리처럼 들려 이 세상이 아닌 곳에 서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글을 읽는 순간 다시 그곳의 정경이 떠올랐다.

 

 다시 앞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인물 중에 “응엔아이쿠욱이 인도차이나 자유를 요구했을 때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란 문장이 나온다. 베트남의 호치민이 젊은 시절 프랑스에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그의 이름이 ‘응엔아이쿠욱’인줄은 몰랐고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응엔아이흑’이란 사람은 1930년 엔바이 봉기를 주도 한 죄목으로 동료 12명과 함께 공개리에 사형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들은 일제 36년을 잊지 못하고 있으나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과 같은 강대국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호치민은 무기형을 받았으나 출옥 한 다음 귀국하여 프랑스에 항전하여 몰아내고 미국과 싸워 역시 이겨 베트남을 다시 독립국가로 세운 인물이다. 이 책의 각주만 읽어도 많은 상식을 얻을 수 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어머니 쥐스틴이 특히 좋아했던 라벨의 <볼레로>에 대한 각주를 그대로 옮겨보았다.

 

*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무용가이자 배우이며 공연예술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이다 루빈슈타인의 의뢰로 <볼레로>를 작곡하였다. 1928년 10월 파리 오페라극장 초연 당시 니진스키가 안무하고 루빈슈타인이 직접 춤을 췄다.


 나도 좋아하여 가끔 듣는 ‘볼레로’에 이런 사연이 있는지는 몰랐다. 다음 페이지의 각주는 이렇다.

 

 * 문화의 구조적 분석을 위한 가장 유망한 두 영역은 음악과 신화라고 주장한 레비 스트로스(Levi Strauss 1908~2008)는 방대한 규모의 저서 <신화학, Mythologiques> 중 한 권인 <벌거벗은 인간, L' Homme nu 1971>에서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분석했다. 퍽 궁금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를 오래 전 읽고 감명 깊었다. “문화는 다름이 있을 뿐 우열은 없다.”라는 말로 문화인류학의 큰 별로 추앙받는 이 사람의 책을 다시 읽으려고 구입하였으나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조만간 꼭 꺼내 읽어야겠다. 마지막으로 에텔이 독일 장교로부터 파리에서 니스까지 허용하는 파란 글씨의 독일어로 쓴 ‘통행허가증’의 내용이 흥미로워 옮겨 보았다.

 

<증명서>

프라우 에텔 마리 브륑
허가 차량번호 : 145 DU2
허용지역 : 파리에서 니스까지
인원 : 부인과 가족
주둔군 사령관
파리 12구, 1942년
서명 : 중위 에른스트 브롤

좌측 하단에 감탄 부호가 달린 단어 하나를 덧붙였다.

플뤼흐틀링에!

* 에텔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독일어 사전을 펴 궁금했던 마지막 단어를 찾아보았다. 피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