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축복 받은 집>을 읽고...

깃또리 2018. 11. 19. 10:16

<축복 받은 집>을 읽고...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동아일보사
2017.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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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줌파 라히리가 쓴 책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책이지만 나는 줌파의 에세이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와 장편 소설 <저지대>를 읽은 다음 손에 들었다. <축복 받은 집>이 미국의 대표적인 문학상들인 퓰리처상과 오 헨리 문학상 그리고 펜/헤밍웨이 문학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을 때는 당연히 장편소설이라 생각했으나 사실은 아홉 개의 짧은 소설을 모은 단편집이고 그 중 하나의 단편인 'The Blessed House'을 우리말 번역본의 책 제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영문판 제목은 '축복 받은 집'이 아니고 <질병의 통역사, Interpreter of Maladies>이다. 국내 출판사에서' 질병의 통역사'란 제목보다 '축복 받은 집'이 더 책 판매에 도움이 된다 생각해서 바꾼 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니면 줌파가 한국어 판 제목은 다르게 바꾸라고 조언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조금 궁금하다.
 
 원래 퓰리처상을 장편 소설에 주는 관례를 벗어나 단편에 상을 준 것도 파격이고 더욱 작가 경력 5년 정도의 33세 신예 소설가에 가까운 사람을 수상자로 선정한 것도 퓰리처상에서 드문 일이라 한다. <역자 후기>에서 소설은 예술성, 사회성, 오락성을 두루 갖춰야 진정 우수한 작품이라 하였는데 소설의 평가기준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나타낸 말이라 생각한다. 또한 어떤 소설에 대한 독자의 평가는 독자 개개인에 따라 현저히 달라진다. 예를 들면 같은 작품이라도 서양인과 동양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읽는 관점이 다르고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이를 모두 갖춰서 불멸의 고전이 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홉 편의 단편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실린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인도 콜카다 출신 <나>가 진술하는 1인칭 소설이다. 시대적 배경은 1969년, 장소는 매사추세츠 보스턴이고 전체 이야기는 1964년부터 시작하여 2000년 초까지 약 36년이란 긴 시간을 아우르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나>는 1940년 즈음 태어났으며 1964년 단돈 10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니고 인도에서 출발하는 가장 싼 이탈리아 화물선의 기관실 옆방에서 잠을 자며 3주 후에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 영국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며 런던 경제대학 청강생으로 공부하다가 미국 MIT 공과대학교 듀이 도서관에 일자리를 얻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단편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미국에 도착하여 주당 8달러를 내고 지낸 103세 크로포드 부인이 운영하는 2층 작은 방에서 생활한 6주간의 이야기이다. 20대 중반을 넘어선 젊은이로 상식과 교양을 지닌 <나>의 눈에 비친 1960년대 미국 사회가 무척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나>가 말한 것처럼 1세기를 넘게 살았으나 여러 가지의 편견을 지닌 크로포드 부인이 예의 바른 인도출신 청년과 그의 인도에서 온 부인 '말라'를 직접 만나 겪어보고 이들에 대한 처음의 인식을 바꾸는 대목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즉 교양과 예의 바름, 친절 등은 결국 인종과 지역을 뛰어 넘어 상대를 감동시키고 나이를 떠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단편이 더욱 빛을 내는 부분은 <나>가 미국생활 30년을 뒤돌아보며 자기의 삶을 성찰하며 담담하게 회상하는 대목이다.
 
 "그 무렵 나 혼자 보낸 여름 여섯 주는 내 과거에서 아스라이 먼 간주곡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망 소식에 접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신문을 무릎 위에 내려놓은 채 아무 말 없이 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크로포드 부인의 죽음은 내가 미국에서 처음 애도하는 죽음이었다. 사실 그녀의 삶은 내가 미국에서 발견한 최초의 멋진 삶이었다." 여섯 주 동안 셋집을 드나들 때 크로포드 부인은 미국 우주선의 달 착륙에 놀라고 감탄하여 <나>에게 "대단하다"라는 말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래서 <나>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주 비행사는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몇 시간밖에 머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신세계에 거의 30년을 머물렀다. 나는 나의 업적이 평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출세하기 위하여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고 또 내가 첫 번째로 진출한 사람도 아니다." 30을 갓 넘긴 젊은 작가가 더구나 여성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런 내용의 글을 쓸 수 있는가! 작가의 인간의 삶을 보는 통찰력에 찬사를 보낸다.
 
 <센 아주머니> 지리적 배경은 작가가 미국에 정착한 로드아일랜드이다. 줌파 라히리는 소설의 배경을 주로 이곳으로 삼고 있다.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 런던에서 조금 살다 미국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아직은 소설 배경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11살의 엘리엇이란 소년의 어머니는 정황으로 보아 남편과 별거하고 직장에 다니며 어린 아들 엘리엇이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있는 시간에 돌보아 줄 사람이 필요하였다. 린덴 부인과 애비라는 여대생 다음으로 세 번째 베이비시터인 '센'부인과 엘리엇이 한 달 간 지낸 이야기를 3인칭 소설로 썼다. '센'부인은 남편과 둘이서 살며 인도에서 미국에 온 지 오래 되지 않았고 남편도 인도인으로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줌파의 소설에 나오는 어른들은 주로 대학교수이거나 연구원인 것이 특징이다. 역시 줌파가 그간 몸담았던 곳이 대학교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이 단편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센 부인과 남편 사이에 약간 비틀어져 있고, 미묘하게 나타나는 불화를 엿 볼 수 있는데 이는 고국을 잊지 못하고 미국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하고 아직 자식이 없는 점이 그 이유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부부 백 쌍이 있다면 백가지 각각의 전혀 다른 관계구도가 있듯이 부부, 남녀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작가는 이 부분을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그러나 센 부인이 엘리엇에게 기울이는 따뜻하고 정성어린 보살핌은 퍽 감동적이다.
 
 <질병의 통역자> 인도는 다민족, 다 종교 그리고 다 언어 나라이다. 그래서 병원의 의사와 환자사이의 통역도 필요한 것 같다. 학교 교사였지만 의사와 환자 사이를 통역 하는 일이 수입이 더 많아서 전업하고 부족한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카파시씨는 외국 관광객을 위한 안내인의 일도 한다. 어느 날 미국에서 온 가족 일행을 안내하면서 겪는 일을 소재로 하였다. 중학교 과학교사와 일찍 결혼하여 30이 되기도 전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둔 다스 부인의 질병이 이 단편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나 사실 다스 부인 '리나'의 질병은 육체적인 병이 아니고 심리 문제이다. 다스 부인은 첫째 아들을 낳은 직후 남편과 조금 소원하던 시기에 펀잡 출신 남편 친구를 일주일 손님으로 함께 지내던 시기가 있었다. 남편이 외출한 사이 두 사람은 별 다른 감정 없이 단 한 번 몸을 주고받았으나 바로 임신하여 둘째 '보비'가 태어났고 남편은 추호도 친구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낸다.


 소설에는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다스 부인은 항상 마음이 불편하여 신경과민증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누구에게 말하거나 의논할 수 없다가 환자의 통역사인 카파시씨에게 충동적으로 자신의 비밀을 발설한다. "나는 내 아이들을 쳐다보면 끔찍스러워요. '라즈'는 더욱 끔찍스럽고요. 카파시씨 난 이 모든 것을 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어떤 날은 창문을 활짝 열고  텔레비전, 아이들, 그 모든 것을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이게 병적인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다. 그 비밀이 때로는 삶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황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음의 병은 어느 경우 육체적인 병보다 치명적이다. 그래서 카파시씨는 가난한 인도인 환자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심리적으로 안정을 잃은 다스 부인에게 질병통역 또는 상담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갈등을 느낀다. 그래서 부인이 미국에 가서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 위해 자기가 적어 준 주소 쪽지가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순간에도 침묵하며 묵묵히 바라 볼 뿐이다. 또 하나 카파시씨는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는 다스 부인에게 나이를 떠나서 남자와 여자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을 꿈꾸었으나 다스 부인이 자신을 아버지처럼 대하는 순간 백일몽에서 헤어나기도 한다. 남녀의 미묘한 심리를 절묘하게 그린 작품이다.
 
 <축복 받은 집>에 실린 내용이 미국인들에게는 흥미 있는 소재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읽은 느낌은 그저 그렇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은  두 번을 읽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화자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다른 점을 이야기 하면서 “영국에서는 '엘리베이터'라 하지만 미국에서는 '리프트'라 한다.” 라는 문장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나는 오히려 반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이라 믿어진다. 영문판을 구입해서 읽어 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나머지 다섯 편도 훌륭하다. 모처럼 즐거운 소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