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

깃또리 2018. 11. 26. 12:41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김남주 옮김
열림원
2017.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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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통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다. 그래서 서가에 많은 책이 없다. 책을 읽고 정말 마음에 들면 다시 구입하기도 하는데 이 책은 오래 전에 구입하여 읽은 후 서가에 오래 동안 꽂혀 있어 다시 꺼내 읽었다. 그러고 보니 책을 구입해 두면 보관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겉표지를 열어보면 1996년 발표하여 1997년 우리말 번역본이 나왔으니 꼭 20년 만에 다시 읽은 셈이다. 20년이면 세상이 두 번 바뀐다 하였는데 긴 세월 같은 느낌은 없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다. 제일 앞 단편이 <렉싱턴의 유령>이고 책 제목으로 삼은 걸 보니 이 단편집에서 작가가 제일 아끼는 작품인 듯하다.


 그러나 나는 솔직하게 말한 다면 마지막 편인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가 제일 마음에 들고 대강의 내용은 이러하다. 고향 '코베'를 떠나 도쿄에서 일하는 25살의 청년과 14살 사촌동생이 등장인물이다. 청년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졌으나 사촌동생은 어릴 때 야구공에 머리를 맞아 오른 쪽 귀에 문제가 생겨 청력이 간헐적으로 약해지기도하고 어떤 땐 아예 들리지 않아 상대방 목소리를 들으려고 왼쪽 귀를 목소리 방향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왼쪽 귀를 가만히 내 쪽으로 향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절절해졌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고 더구나 소설 속 이야기 이지만 이 부분을 읽을 때 내 마음까지도 '절절'해진다. 더구나 14살 어린 소년이라니 더욱 애처로운 그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사촌 동생은 존 웨인이 나오는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아파치 요새> 이야기를 한다. 어느 날 요새로 부임하여 온 장군이 고참 대위 존 웨인에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인디언을 몇 명 보았다."라 하자 시침을 떼고 존 웨인이 이렇게 말한다. "괜찮습니다. 각하가 인디언을 보았다는 것은, 즉 인디언이 거기에 없다는 뜻입니다."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촌동생은 "모두의 눈에 보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일까.....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이어서 "나도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일로 누군가 나를 동정할 때마다. 왠지 그 대사가 떠올라.' 인디언을 보았다는 것은, 즉 인디언이 거기에 없다는 뜻이야."라고 말한다.


 얼마 전 나는 이 세상에 너무 '말'이 난무하고 계통 없이 떠돌아 다녀 말이 줄어들고 말이 없어지는 세상을 생각해보았다. 귀에 들리는 일도 이와 비슷하여 적게 들리고 가끔은 들리지 않는 세상이 소란한 세상보다 의미가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단편 속에 청년 친구의 여자 친구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이야기'는 세상의 말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말에 대하여 또 다른 생각을 품게 하는 이야기이다.
 
 <렉싱턴의 유령> 이 단편을 읽어보면 작가가 1992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객원 연구원으로 지냈던 시기에 경험했던 일을 바탕으로 쓴 것 같다. 부모로부터 정원이 딸린 큰 저택과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필요한 돈도 물려받은 어떤 사람의 일상과 풍경을 그린 부분이 나오는데 퍽 흥미롭다.


 <토니 다키타니> 이 단편집에서 두 번째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아버지 다키타니 쇼자부는 재즈 트롬본 연주자였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1920년 쯤 태어난 사람이다. 태평양 전쟁기간에 4년간 상해에서 연주활동을 하다 전쟁이 끝날 즈음 간첩 누명으로 상해의 감옥에서 지내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미군부대를 전전하였다. 여기서 이탈리아계 미군 소위 '토니'를 만나 친구가 되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47년 우연히 길에서 먼 친척 되는 아가씨를 만나 사귀다 결혼하여 아들 ‘토니 다키타니’를 낳았으나 사흘 만에 아내가 죽었다. 상심하여 아들도 돌보지 않고 몸져누운 쇼자부를 미군 토니가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 주었으며 아들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주고 보살펴 주었다 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다키타니가 별로 말이 없었던 아버지 쇼자부로부터 띠엄띠엄 주워들었던 내용이라 한다.


 그러나 읽는 독자들에게 흥미와 의구심을 갖게 하는 내용이 나온다. 소설 첫 부분에 토니 다키타니의 외모는 누구보다도 혼혈 특히 미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얼굴이어서 놀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에는 미군의 숫자가 많아 혼혈도 많았다 한다. 또한 토니 소위가 자기 이름을 덧붙이라하며 어린 다키타니를 챙겼다는 대목을 생각하면 토니 다키타니는 토니 소위의 아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고 아버지 쇼자부씨는 원래 결혼을 한 게 아니고 토니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두고 간 어린 토니를 데려다 키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작가는 더 이상의 내용을 말하지 않고 즉 시침 떼고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즉, 독자들의 상상력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오직 글 쓰는 사람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토니는 미술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친구들과 교우 관계도 별로 없고 오직 사실화에만 몰두하여 주변으로 조롱과 놀림을 받고 졸업했으나 오히려 토니의 희소한 재능이 몇 곳에서 높이 평가 받고 유효하게 작용하여 높은 수입을 얻어 안락하게 지낸다. 39살의 나이에 15살 아래인 22살 처녀에 온 마음을 뺏겨 결혼한다. 나무랄 데 없는 아내는 단 한 가지 문제가 비싼 옷을 사들이는 일이다. 이 부분이 꽤 길게 나온다. 결국 옷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불행하게 삶을 마친다. 수백 벌의 젊은 아내 옷을 거의 헐값에 팔기도 하고 버렸으며 아버지가 남기고 간 귀중한 레코드판도 중고로 처분한다. "레코드 상자를 싹 치우고 나자, 토니 다키타니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외톨이가 되었다."가 이 단편의 마지막 문장이다.


 결국 다키타니에게는 젊은 아내와 비싼 의상 그리고 늙은 아버지가 소중하게 수집했던 귀한 레코드판도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아 모두 떠나보낸다. 귀한 물건보다 작은 수많은 추억과 기억만이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우는 단편이다. 나도 이제 내 방의 오래 된 물건들을 정리할 때가 다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