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뉴욕 3부작>을 읽고...

깃또리 2018. 11. 16. 09:42

<뉴욕 3부작>을 읽고...
폴 오스터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2017.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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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미국 작가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Paul Auster, 폴 오스터(1947년 2월 3일, 71)이다. 사실 미국 작가들이라고 했지만 나름대로 미국 작가도 18세기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를 배출하였고 현재 생존하는 작가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더구나 국적이 미국이고 영어로 작품을 쓰지만 이민자나 이민 2세 작가들도 미국 작가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다양하여 내가 감히 미국 작가를 거론하는 일은 실례가 될듯하다. 아무튼 폴 오스터의 대표작 중 가장 잘 알려진 이 책 <뉴욕 3부작>은 몇 년 전에 손에 들었으나 2부 어디쯤까지 읽다가 책을 덮고 말았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고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터의 다른 소설들은 대부분 끝까지 읽고 앞으로도 더 볼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대표작을 읽다 만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치 않아 지난주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여 이제 마지막 페이지를 닫았다.


 책 제목이 <뉴욕 3부작, New York Trillion>인데 사실은 조금 긴 중편 정도 되는 소설 셋이 한 권으로 묶여 있고 소설 속의 인물들 활동 지역이 뉴욕이라서 '뉴욕 3부작'이라 한 것 같다. 그러나 세 소설의 내용은 직접 연관성이 적다. 특히 첫 번째 <유리의 도시, City of Glass>는 1969년, 두 번째 <유령들, Ghosts>은 1947년, 마지막 세 번째 <잠겨 있는 방, The Locked Room>은 1983년으로 시간대도 다르다. 전체 내용에서 공통점으로는 누가 누구를 감시하고 관찰하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전문 탐정이 등장하거나 엄청난 사건으로 뒤 쫒고 도망 다니고 그리고 해결되는 탐정소설은 아니다.


 <유령의 도시>의 주인공 다니엘 퀸(Quinn)이 실제 이름이고 필명은 윌리엄 윌슨, 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맥스 위크, 그리고 퀸이 어찌하다 탐정 일을 하면서 이름은 '폴 오스터'로 빨간 공책을 들고 다닌다. 세 번째 <잠겨 있는 방>에서는 사설탐정 퀸이 등장하고 <유리의 도시>에서는 White가 빨간 만년필을 사용하여 세 소설에서 몇 가지 작은 연결을 보이고 있으나 앞에서 말한 뉴욕이 배경이라는 점과 사람 찾는 일이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이다.


 먼저 <유리의 도시>는 비교적 내용이 단순하다. 38살로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퀸은 틈틈이 소설을 쓰면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본의 아니게 폴 오스터라는 이름으로 전직 예일대학교 교수 출신인 스틸먼이란 사람을 찾아 감시하고 추적하는 일을 한다. 200 페이지 넘는 소설은 끝까지 읽어도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읽었다. 뉴욕의 복잡한 도로와 지명이 줄줄이 나오기 때문에 뉴욕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흥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유령들>은 모든 등장인물이 색깔로 나타냈다. 주인공은 Blue, 질투심이 많은 남편은 White, 기억 상실 환자이며 엔지니어는 Gray, 술집 바텐더는 Green, Red, 필라델피아 경찰관은 Gold 등이다. 읽은 지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으나 등장인물들이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며 소개하는 거리 이름과 함께 그곳에 관련한 인물들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오렌지 거리는 미국의 자연주의 시인이자 국민시인으로 불리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역시 자연주의이자 계몽 사상가였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 그리고 노예제도를 비판했던 당시의 진보적 목사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1813~1887)가 활동했던 곳이라 한다. 휘트먼은 1855년 자신의 첫 시집 <풀잎, The Leaves>을 이곳에서 자비 출판하였고 비처는 이곳 교회에서 노예제도 철폐를 설교했다 한다. 또한 휘트먼과 데이비드 소로우가 만났던 이야기, 데이비드 소로우와 너세니얼 호손과 친구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월트 휘트먼이 죽은 뒤 그의 뇌가 연구실 실험을 위해 옮겨지다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는 이야기 등이 아주 흥미롭게 나온다.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Walden>을 발행한 사람이 Black이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휘트먼의 <풀잎> 시집이 나오니 전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르윈스키에게 선물했던 책이 휘트먼의 <풀잎>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당시 이 기사를 읽고 나는 서점에 가서 이 시집을 보았는데 꽤 두껍고 책값도 비싸고 비닐로 씌워져 있어 내용도 보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린 경험이 있다.


 마지막 <잠겨 있는 방>은 이야기 전개가 일관성이 있어 나같이 명석하지 않은 사람도 줄거리를 따라 읽기가 편했다. '나'라는 1인칭 화자가 등장하며 1979년부터 1983년, 7년간에 걸쳐 일어나는 내용이다. '나'와 팬쇼는 뉴욕에서 가까운 뉴저지에서 옆집 친구로 자랐으나 대학교 진학으로 차츰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팬쇼는 재주가 많고 소위 Boss기질을 타고 나서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하버드대학교 2년 다니다 집안 경제 사정을 핑계 삼아 자퇴하고 일정한 직업이 없이 글을 썼으나 어디에 발표하지는 않았다. 팬쇼는 '소피'와 결혼하여 아들이 태어났으나 2달 만에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편지 수신자는 '나'였으며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찾을 생각을 하지 말며 자신의 원고를 읽고 알아서 해달라는 간단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나'는 팬쇼의 원고를 읽고 알고 지내는 헨리 다크라는 출판인을 만나 책을 펴내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는 팬쇼의 아내 소피를 자주 만나면서 사랑이 싹터 1년간 함께 살다가 결혼하여 소피의 부모와 팬쇼의 어머니 '제인 팬쇼'를 만나 두 사람의 결혼을 알리기도 한다. 물론 '나'는 팬쇼의 아들 '벤'을 아들처럼 잘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펜쇼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큰돈을 들어왔으나 '나'는 항상 팬쇼의 행방이 궁금하였다.


 6년의 세월이 흐른 1982년 '나'는 팬쇼의 편지를 받았는데 보스턴의 어느 주택가 집으로 오면 전해 줄 게 있으나 서로 만날 수는 없다 하였다. 팬쇼가 시키는 대로 찾아가 대문을 부수고라도 만나려 했으나 허사였고 대문을 사이에 두고 긴 이야기를 나누고 팬쇼는 빨간 공책을 넘겨주면서 단지 이렇게 말한다. "집으로 가져가서 읽어보게." " 그 애가 커서 읽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자네가 읽게. 아무튼 자네를 위해서 쓴 거니까." 너무 긴 입씨름에 지치고 기력을 잃어 '나'는 결국 몽롱한 상태로 기차로 뉴욕 집으로 돌아가려고 공책을 펼쳐보았다. '나'는 공책을 앞뒤로 읽고 난 다음 하는 말이 마지막 페이지이며 다음과 같다.  "내가 거기에서 본 내용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해를 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어들은 모두 눈에 익은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마치 그 단어들의 최종 목표가 서로 상쇄를 하려는 것인 듯, 이상하게 조합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것을 달리 표현할 어떤 말도 생각할 수 없다.


 하나하나의 문장이 그 전의 문장을 지워 버렸고, 하나하나의 문단이  다음 문단을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 공책에서 받은 느낌이 그처럼 뚜렷하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 팬쇼는 자기의 마지막 작품이 내가 거기에 대해서 품고 있던 모든 기대를 뒤엎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싶다. 그 공책에 적힌 내용은 무엇을 조금이라도 후회하는 남자의 글이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짐으로써 질문에 대답을 했고, 따라서 모든 것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다시 시작이 되도록 남아 있었다. 나는 첫 단어 이후로 길을 잃었고, 그 다음부터는 나를 위해 쓰여 진 책에 눈이 멀어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면 더듬더듬 나아갔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혼돈의 와중에서도 나는 그처럼 의지가 강한 무엇인가를, 그처럼 완벽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가 결국에 정말로 원했던 것처럼, 그러나 내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그때 나는 여간해서는 뭔가를 읽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고, 내 판단이 비뚤어졌을 수도 있다. 나는 거기에서 그 글을 내 눈으로 읽었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믿기 어렵다. 나는 기차가 들어오기 몇 분 전에 천천히 선로 쪽으로 걸어 나갔다.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입에서 나온 입김이 내 앞쪽의 대기 중에 허연 김으로 서렸다. 나는 공책에서 종잇장을 하나씩 하나씩 찢어 손으로 박박 구긴 다음 플랫폼 옆에 있는 쓰레기 통 속으로 떨어뜨렸다. 내가 마지막 장까지 다 찢어 냈을 때는 기차가 역에서 막 출발하고 있었다."
 
 지난 주 조선일보 문화면에 퍽 흥미 있는 기사가 실렸다. 폴 오스터(70세)와 핀란드 대통령 사울리 니니스토(69세)의 인터뷰였는데 오스터는 어느 나라든 대통령과 인터뷰는 처음이라 했으며 나는 이 기사를 읽다가 두 번 웃음을 참지 못했다.


 첫 번째는 오스터의 팬인 대통령은 “오스터의 책을 읽느라 젊은 시절 시간을 다 보냈다.”라는 부분으로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그런 대통령을 둔 나라가 부러웠다. 두 번째는 헬싱키의 어느 도서관에서 300여 명의 방청객 앞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서 오스터는 트럼프 대통령은 책을 읽지 않는다 하며 트럼프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다했으며 꼭 부른다면 '45'로 부르겠다고 하였다. 미국 45대 대통령 일뿐이라는 말이다. 그러자 핀란드 대통령은 자기는 '12'라 했다. 또 오스터는 소설에 나오는 책이나 영화를 작가가 다 읽거나 보고 소설을 쓰는 건 아니라고 했다. 하긴 그 많은 책이나 영화를 다 보고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자주 경험 하는 일인데 책을 읽는 동안 별 흥미를 느끼지 않다가 이렇게 후기를 쓰려고 읽었던 책을 다시 뒤적이다보면 읽는 동안 지나쳤던 부분이 새롭게 느껴지고 그 부분을 다시 읽다가 아 이 책이 정말 좋은 책이고 한 번 더 읽어야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역시 이 책도 후기를 쓰면서 같은 생각이 일어나 시간이 되면 다시 읽으려 한다. 후기를 쓰게 되면 얻는 장점 중 하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