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왕의 하루>를 읽고...

깃또리 2018. 11. 2. 12:59

<왕의 하루>를 읽고...
이한우
김영사
2016. 10. 02.


 책의 부제는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이다. 저자 이한우씨는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철학석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처 지금은 편집국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는 57세의 저널리스트이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을 10년에 걸쳐 완독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대한 '통각,統覺'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통각이란 통일적인 감각으로 즉 자신은 조선왕조실록에 대하여 일관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간 펴낸 책으로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군주열전>, <왕비의 하루>,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성종>, <실록으로 읽는 조선역관 이야기> 등을 비롯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책, 논어에 관한 책 등 실로 수십 권이다. 정식 역사학을 전공하거나 연구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실록을 읽고 지식을 쌓아 많은 책을 펴낸 것 같다. 그러나 조선 500년이란 장구한 세월에 이루어진 엄청난 분량의 조선실록을 10년이라고는 하지만 일을 하면서 완독했다는 주장이 믿기자 않는다. 사실 방대한 실록의 국역이 최근 모두 이루어지긴 했으나 원문은 어려운 한자로 쓰여 졌을 텐데 실록을 다 읽었다니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튼 조선실록에 대해서는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책 제목에 나타난 바와 같이 실록을 근거로 조선시대 왕을 주인공으로 하고 왕의 하루생활을 통하여 과거를 되살리는 일을 하였다. 크게 3장으로 나누어 <제 1장, 역사를 바꾼 하루>는 조선 500년 기간 중 최대 사건 다섯을 골라 적었고 <제 2장, 군신이 격돌한 하루>, <제 3장, 하루에 담긴 조선 왕의 모든 것>도 다섯 항목으로 구성하였다.


 우선 <서문> 다음에 나오는 '왕의 하루를 찾아서'라는 소제목의 <프롤로그>가 유익하게 생각되어 먼저 요약해보았다. '왕의 새벽' 항목에 왕의 기상과 취침 등이 나오는데 시계가 없던 서양 중세시대에 교회에서 종을 울려 시각을 알려주었듯이 조선시대에도 종각에 매단 종으로 새벽 4시경인 오경삼점(五更三點)에 33번 종을 쳐서 '파루, 罷漏)를 알려 도성 8개 문을 열어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밤 10시경 28번을 쳐서 인정(人定)을 알려 도성 문을 닫도록 했다 한다. 파루 33번은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 고하여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인정 28번은 우주 일월성신 28수(宿)에 고하여 밤사이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였다 한다. 종을 치는 제도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얼마 후부터 실시했다는데 내 추측으로 독창적인 제도는 아니고 아마 중국 명나라의 예를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종을 매단 종각 근처를 지나는 길을 종로라 하였으며 성곽이 있던 다른 지역에서도 한양을 본떠 종각과 종로가 있는데 그래서 수원과 남한산성에도 종로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나는 매년 12월 31일 보신각 타종, 제야의 종을 왜 33번 치는가 궁금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그러나 보신각 타종행사는 조선시대에 없었고 일제시대 생긴 행사라는 사실을 어느 책에서 보았다. 왕은 모든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므로 파루와 인정에 맞춰 기상, 취침을 했다 한다. 왕과 왕비의 침전은 왕에 따라 달랐으며 경복궁/ 강녕전, 창덕궁/대조전, 창경궁/통명전, 경희궁/융복전, 덕수궁/함녕전 이다. 어느 책에 이 침전들의 명칭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한 내용을 본 적이 있으나 모두 잊었는데 대개 학식이 높은 대신이 심사숙고하여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침전뿐만이 아니라 궁중의 모든 시설물의 이름은 그 용도와 상황에 걸 맞는 이름을 지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대궐에 따라 왕과 왕비의 침전이 함께 있기도 하고 따로 있었다 한다. 하긴 왕들은 대개 정비와 후궁 등 여러 여자들 사이에서 거처했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추측된다. 왕의 주변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항상 궁에서 지낸다는 의미에서 '상궁, 常宮'이었을 것이고 침전 근처에서 가장 가깝게 일하며 숙직을 하며 이부자리를 맡은 '지밀상궁 至密尙宮', 옷을 책임지는 '차비, 差備', 음식 맛을 보는 '기미상궁' 상궁의 우두머리는 '제조상궁 提調尙宮'이라고 불렀다 한다. 왕의 대, 소변을 치우는 일은 하급 상궁들의 몫이었다 한다.


 그러나 가장 천한 일을 하던 상궁도 임금과 지척에서 가까이 지내다 보니 왕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여인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벼슬을 하였던 집안 출신이었으나 숙종이 왕위에 있을 때 어려서 궁궐에 들어가 청소와 허드레 일을 하는 여자 종의 신분인 무수리였다. 그러나 왕후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밀려 내쫓겨 있을 때 인현왕후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숙종에 발견되어 사랑을 받고 후일 영조인 영잉군, 후에 영조인 이금을 낳았다 한다. 일단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 숙원 淑媛->숙의 淑儀->귀인 貴人->숙빈 淑嬪(정1품)으로 격상 된다. 최씨도 이 과정을 거쳤으나 장희빈의 분란을 몸소 겪고 폐비에서 다시 복귀한 인현왕후가 후궁이 왕후가 되는 일을 없도록 법을 만들어 왕후는 되지 못하고 41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생전에 인현왕후의 사랑을 받았고 죽어서는 아들이 임금이 되는 호사를 누린 여인이다. 궁궐 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요즘의 비서실장은 '도승지'이다. 왕과 관련한 어휘는 조금 달라 몸/옥체, 얼굴/용안, 옷/용포, 어의, 대변/매화, 소변/용수, 변기/매우틀, 식사/수라, 부엌/소주방, 세수/소세, 이를 헹구는 일/수부수 등이고 이를 닦는 도구로 버드나무 가지를 이쑤시개처럼 썼으며 이를 양치목(養齒木)이라 하여 버드나무(楊枝)에서 양지->양치질이란 오늘날 말이 파생되었다고 하였다.


 드디어 아침 식사를 마친 임금이 살아 있는 어른들, 예를 들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한 다음 왕은 그날의 업무, 즉 정사를 보았는데 실록에 근거하여 자세히 적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여러 왕들은 각자 건강상태, 습관 등이 조금씩 다르고 왕의 권력의 크기와 입지 등이 달라 왕의 하루는 달랐다 한다. 특히 조선시대 500년 간 왕과 신하들 사이의 권력, 소위 군권과 신권의 다툼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한다. 몇몇 왕은 왕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통치력을 마음껏 발휘하였으나 어떤 왕은 신하들에 눌려 제대로 왕 노릇을 하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몇 왕은 신하들에 의해 자리에서 쫒겨나고 심지어 독살 당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조선왕들도 로마시대 황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의 본문 시작은 '조선의 첫날이 열리다. 태조 이성계의 하루'이다. 고려의 무장이었으나 추종 세력과 함께 나라는 세운 인물이기 때문에 이성계에 관한 내용이 가장 흥미롭고 내용도 많다. <어느 변방 무장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이성계를 1인칭으로 4페이지에 걸친 조선 임금이 된 과정과 소회를 기술하였다. 물론 이성계 자신이 쓴 내용이 아니고 저자 이한우가 여러 사실과 기록을 종합하여 이성계를 대변하여 쓴 글로 조선 개국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퍽 도움이 되고 흥미롭다. 그러나 이성계가 자신을 미화하고 자신의 위화도 회군이 불가피했으며 왕까지 되려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좀 지나치다. 아무튼 그간 내가 모르고 지냈던 내용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왕대비는 이성계 휘하 배극렴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능한 공양왕을 원주로 내보내고 이성계를 감록국사에 임명했다 한다. 감록국사 監錄國事란 일종의 임시국왕이었으며 이성계는 왕의 자리에 오르라는 추종자들의 건의를 한사코 사양했다 한다. 그러나 왕대비가 국세까지 내려주고 배극렴, 조준, 정도전, 남온 등이 극구 간청하여 수창궁에 나아가 왕위에 올랐으며 이때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글이 실렸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성계가 어느 정도 양심이 있는 인물이며 왕이 되려고 크게 무리수를 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이성계는 왕위에 올랐으나 후일 태종이 된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1, 2차 난으로 피바람이 일어나 불과 7년 간 왕으로 지내고 둘째 아들 이방과, 정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고향 함흥으로 떠나 후일 '함흥차사咸興差使'이야기가 기원하였다. 또 하나 내가 모르고 지냈던 사실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고 실력자였던 정몽주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자신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셋째 아들 이방원이 성급하게 선죽교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이성계는 불같이 화를 내고 이 일을 계기로 이방원을 멀리하고 경계했다 한다. 이성계 입장에서 보면 학문으로 보나 위계로 보나 또 고려에 대한 충성심으로 보아도 존경의 대상이었던 정몽주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두 번째 글은 <허무가 불러온 파멸, 연산군 이융의 하루>이다. 10대 임금 연산군은 성종과 왕비 윤씨 사이에 태어난 조선시대 궁궐에서 태어난 첫 번째 왕자였으나 연산군의 할머니 즉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연산군의 어머니를 미워하여 폐비한 다음 사약을 내려 죽였다. 어릴 때 총명하였던 연산군은 19살에 왕이 된 다음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원한을 품고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한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제거하다가 중종반정으로 임금 자리에서 쫒겨나 강화도로 유배되어 병을 얻어 죽었다. 그의 나이 31살 때이다. 저자는 연산군 초기 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해 힘을 쏟고 비교적 선정을 베푼 왕으로 평가하였고 어느 조선 연구자는 연산군 초기 몇 년이 정치, 사회적으로나 자연재해가 없었던 조선시대 500년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로 평가하기도 한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을 신권에 굴복한 나약한 사람으로, 태종을 왕권 강화의 표상으로 삼았으며 집권 10년 후에 일으킨 갑자사화는 순전히 어머니의 원한을 풀기 위한 보복 행위였으나 이후 급격하게 폭군의 길로 나갔다 한다. 이때부터 왕으로써 책임이나 인간적인 풍모를 버렸으며 반란의 조짐도 알았으나 적극적 대처도 하지 않은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볼 때 삶 자체를 포기한 인물로 보았다.


 대부분의 역사기술은 승자들에 의한 기록이므로 연산군의 패악 일부분은 후일 반대 진영에서 과장하였거나 날조하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했던 인물임은 틀림없다. 연산군의 실각 배경에는 장녹수와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을 만들어낸 왕의 기생놀음과 반인륜적 행위들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폭군으로 변해가며 연산군은 기생과 놀기를 좋아했다. 지방의 예쁜 기생들까지 서울로 불러 잔치를 벌였다. 기생도 등급이 있어 서울로 뽑혀온 기생을 운평(運平), 궁중까지 입성한 기생을 흥청(興淸)이라했다. 흥청 중에서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기생들을 지과흥청(地科興靑), 왕과 잠자리를 한 기생을 천과흥청(天科興靑)이라 불렀다 한다. 이들을 관리하는 계방원이라는 관청이 있을 정도였으며 연산군은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오도된 재평가의 덫, 광해군 이혼의 하루>는 역시 15대 광해군의 3페이지 반에 걸친 넋두리로 시작한다. 선조의 아들로 원래 큰 아들 임재군이 왕이 될 자질이 부족하다고 논란이 많아 대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임진왜란에 부왕을 도와 정사에 일찍 관여하였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34살에 임금 자리에 올랐다. 왕위에 올랐으나 세자 책봉 과정부터 적통성에 시달렸으며 선조의 지지도 약한 탓에 신하들로부터 권위도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중국 명나라와 사대관계였기 때문에 조선 궁궐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보고하고 승인받는 처지였다. 예를 들면 세자를 정하거나 왕비를 정하고 폐비시키는 일, 심지어 임금의 묘호를 정한 다음에도 중국에 알렸다. 광해군의 경우 명나라에서 적자인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지 않은 사실을 알고 조사단을 파견했으며 광해군은 이들에게 뇌물을 주어 적절히 조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 후일 청나라의 세력이 커지자 광해군은 명나라 대신 후금에 다가서는 외교정책을 구상하였다. 이는 대신들 간에 명분과 실리 논쟁과 함께 당리당략에 이용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첨 배들과 결탁하여 친형 임해군을 대역 죄인으로 몰아 죽이고 다른 형제들인 진흥군, 영창대군, 능창군, 연흥군 들을 차례로 죽였으며 인목대비도 폐모시켰다. 결국 광해군은 재위 15년에 인조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나 당시로는 천수라 할 수 있는 67세에 세상을 떠났던 게 그나마 개인적으로 다행이었다. 연산군이 장녹수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처럼 광해군은 상궁 '김개시'에 빠졌으나 장녹수는 끝까지 연산군을 따르다가 반정 직후 목숨을 잃은 반면, 김개시는 광해군을 배신하여 인간적으로는 연산군보다 불행한 남자였다고 저자는 지적하였다. 조선의 여러 임금 중에 후세의 사가들의 평가가 가장 갈라지는 임금이고 더구나 최근 더욱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논란이 되고 있다 한다.


 후대의 우리들은 왕들을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으로 부른다. 이를 묘호(廟號)라 하는데 임금들은 생존 시에는 없던 호칭이고 사후에 신하들이 의논하여 정하면 새로 등극한 임금이 최종 제가하였다. 임금의 이름은 대부분 글자 하나로 지었다.  태조 이성계, 정종 이방과, 태종 이방원 이 세 사람은 원래 왕족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외이고 4대 세종/이도,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이유, 성종/이혈, 연산군/이융, 광해군/이혼, 영조/이금, 정조/이산, 순종/이척, 고종/이희 등이다. 특이하게 단종은 앞일을 예언하는 사람이 한 글자로 지으면 단명하다 하여 두 글자 '홍위'로 지었으나 그래도 불운을 피 할 수 없었다 한다. 퍽 재미있는 사실이다. 또 흥미 있는 이야기로 임금 이름을 외자로 지을 때 어렵고 잘 사용하지 않는 한문으로 골랐다 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라 한다. 첫째는 임금이 될 사람이니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과, 두 번째로는 일단 임금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는 일반 평민이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 쓰지 않는 글자를 정하여 쓰는 사람들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목적으로 외자에 어려운 글자로 했다 한다. 묘호 다음으로 시호(諡號)가 자주 등장한다. 시호는 임금이나 정승 또는 학덕이 높거나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장군에게 임금이 내리는 이름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 장군은 '충무, 忠武'이며 뒤에 더욱 높여 '공'을 붙여 '충무공'이며 사실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은 사람은 여러 명이다. 그러나 임금의 시호는 일반인과 다르다. 예를 들면 정조 임금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이고 이름은 '산' 호는 '홍재' 자는 '형운'이다. 호는 또한 여러 종류가 있고 복잡하다. 여기에 어릴 때 부르는 '아명'도 있는데 고종 임금의 아명은 '개똥이'라고 들었다. 이름을 험하게 지어야 오래 산다는 속설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한다.


 <사라진 강대국의 꿈, 소현세자의 하루>는 인조의 아들로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러갔다가 돌아 온 후 34살의 나이에 죽은 소현세자 이왕의 이야기이다. 병자호란의 어려움과 타국 심양에서 8년이란 긴 세월 고생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새우려했으나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 당한 것으로 저자는 단정하고 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한 겨울 한 달 넘게 버티다 결국 삼전도로 내려와 1647년 1월 30일 수항단 9층 계단에 올라앉은 청의 홍타이지, 태종에게 3배9고두의 항복의 예를 하고 목숨을 구하였다. 이 당시의 실록과 역사 기록을 참고하여 소설가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을 썼다. 그러나 <왕의 하루> 이 책에선 소설과 달리 세밀하게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눈여겨 볼 부분은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청의 공격 목적을 조선을 점령하여 합병하려는지, 아니면 새로운 강화조약을 위한 것인지조차 몰랐다 한다. 만약 점령이라면 한양 도성에 진을 쳤을 것이나 삼전도에 진을 친 것은 새로운 강화조약이었다 한다. 그 당시의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기록을 정리해보았다.


1636년 12월 1일: 청군 7만 명, 몽골군 3만 명, 한군 2만 명, 총 12만 명 심양에서 발진.
12월 12일: 압록강 도강.
12월 13일: 평양 도착.
12월 14일: 홍제원 도착. 인조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 피신. 이조판서 최명길 청군               장수 마부대와 면담.  
12월 15일: 남한산성에서 강화도로 피난하려다 포기. 
12월 16일: 청 선봉부대 남한산성 아래 도착.
1637년 1월 1일: 청태종 20만 대군 삼전도 도착 포진.
1637년 1월 30일: 항복식 거행.


 청군의 숫자는 20만 명이고 남한산성안의 군사는 1만 2천 명이었다 하니 청군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 이틀이면 점령을 했겠지만 한 달이나 성 밖에서 머물며 위협만 하고 마부대와 용골대와 같은 장수들이 남한산성에 들어와 협상을 벌였다 하니 지금 전쟁 방식과는 퍽 다르다. 항복식도 청나라에서는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첫 번째는 '함벽어츤'이라 하여 패한 군주가 손을 뒤로 묶고 입에는 구슬을 물고 등에는 관을 짊어지고 죽여도 좋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한다. 두 번째가 '삼배구고두'로 세 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한 번 절 할 때 마다 이마를 땅에 세 번 찧는 것이다. 인조는 용골대가 인심 쓰듯 두 번째를 지시했으며 인조는 청나라 병사가 입는 옷으로 바꿔 입고 항복식을 하는 일은 피 할 수 없었다 한다. 내가 읽은 어느 책에선가는 인조가 엄동설한 언 땅에 이마를 아홉 번 찧느라 정수리에서 피가 흘렀다 한다. 목숨을 구걸하여 살아나긴 했어도 부끄럽고 분한 일이었으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대국의 막강한 힘에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사전에 정세를 잘 파악하고 힘을 기르고 외교력을 십분 발휘하였더라면 이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선다. 임금이야 이렇게 해서 목숨을 부지했지만 죄 없는 백성들은 왕을 잘못 만나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피해가 컸을까 생각하면 분기가 오른다.


 <군신이 격돌한 전쟁의 하루>의 첫 대목은 '혁명동지들의 비극적 결별, 이방원과 정도전'이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이야기 거리를 가장 많이 제공하는 인물이 이성계 다음으로 태종 이방원이다. 젊어서는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하루 빨리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이복형제와 자신을 도운 처가 식구들까지 살육한 사람이다. 태종이 죽인 사람을 대략 열거하면, 이성계가 총애하여 세자로 삼았던 이복동생 이방석을 이성계에게 내보내라고 요청하자 주저하는 방석에게 이성계가 "나가도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냐"고 하였으나 나오는 길로 죽였다 한다.
 또 다른 이복동생 18살의 방번은 이방원의 심복들이 죽였는데 이방원은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나 과잉충성이었다 한다. 이성계의 막내 사위 즉 자신의 여동생의 남편 이제도 자신의 편이 아니라서 죽였고 아버지 이성계는 딸, 경순공주의 머리를 직접 깎아 중이 되게 했다 한다. 친인척 다음으로 혁명동지였던 정도전, 남은, 사촌 누나 남편의 동생 변중량 등을 비롯하여 세자의 친인척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을 저자는 '조선 최고의 천재'로 보았다. 이 책에 나온 정도전에 대한 부분을 일부 옮겨보면, "문무에 두루 최고 혹은 그 다음 직책을 맡은 정도전은 이 분야에서 모두 최고로 꼽을 만큼 높은 학식과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그는 현실 정치에 바쁜 와중에도 이성계 집권 열흘 만에 혁명세력의 비전과 액션플랜을 담은 장문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내놓았고 3개월 후에는 몇 사람과 함께 <고려사 高麗史>편찬 작업을 시작해 1395년(태조4년) 37권을 완성한다.(중략) 정도전의 학문이 책상물림이 아니라 문무를 넘나들고 문학, 음악, 예술과도 어우러지는 경지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소위 요즘 말로 하면 줄은 잘못서서 이성계 밑에서는 더 할 나위없는 영광을 누렸지만 이방원이 내린 사약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왕씨 나라를 무너뜨리고 이씨 왕조를 세우느라 혼란과 불안정한 시기임에도 곧바로 <고려사>를 편찬한 사실이다. 어찌 보면 역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달리 보면 이전왕조 역사기술을 통하여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 확립을 위한 포석이 아니었던 가 한다.
'이방원, 명 황제 주원장의 의심을 끌다' 이 대목을 읽다보면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남감하고 부끄럽다. 즉, 중국은 땅도 넓고 인구도 우리의 수십 배 되어 중국이 어느 정도 통일국가를 이룬 다음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생기면 제일 먼저 한반도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 상황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1377년 주원장이 명나라 황제가 되자 15년 지난 1392년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신생국가 조선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조선은 '일년삼사'라 하여 신년 '하정사', 황제 생일 '성절사', 황태자 생일'천추사' 그리고 그 밖에도 '사은사', '주청사','계품사' 등 사신단을 보냈으나 명나라도 조선에 한두 차례 사신단을 보냈으며 오히려 명나라는 트집을 잡고 3년에 한 번 사신단을 보내겠다 하여 조선에서는 예전대로 해달라고 매달리고 다시 명나라는 왕자 중 장남이나 차남을 명나라로 찾아오도록 했다. 왕자가 중국에 가는 일은 먼 여행길도 그렇고 명나라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요청을 물리칠 수 없어 고심하였으나 이방원은 흔쾌히 중국행을 수락했다 한다. 아들 중에서 가장 학식이 높아 이방원은 주원장의 아들 연왕과도 친분을 쌓고 주원장의 의심도 풀어 요즘 말로 하면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한다. 후일 연왕은 이방원보다 더한 왕권 쟁탈전을 치르고 2대 황제 영락제 성종이 된 인물이다.    


 <이유 없이 억류되는 조선사신들> 왕자의 신분으로 명나라까지 방문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돌아왔으나 현 직책으로 보면 서울 부시장격인 한성부윤 정신의와 대학사 유구가 1395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갔으나 트집을 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명황제 주원장은 원래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황제가 되다 보니 소위 신분이나 문장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하여 조선에서 온 ‘하정표문’의 몇 구절이 자신을 모독했다고 생각했다 한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바치는 글을 표문이라 했는데 신년 축하글이 하정표문이었다. 표문작성자 정도전을 보내면 하정사를 돌려 보내겠다고 조선에 알렸다. 조선에서는 표문작성자를 정탁과 전교시 판사 김약량이라 하여 파견하였고 김약량은 처형되었다 한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이런 정도였고 주원장은 조선의 신년표문뿐만이 아니라 명나라 조정에서도 자신에게 바쳐진 글에도 트집을 잡아 소위 '문자옥'이라는 사건을 일으켰다 한다. 이후에도 표문사건이 발생하여 계품사 하륜이 주원장을 만나 해명하기도 하였으나조선의 사신 몇이 죽임을 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 부분에서 하륜(1347~1416)이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 이방원(1367~1422)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권강화의 기틀을 다지는데 공헌을 한 문신으로 나왔다. 이방원보다 20살이나 위였으나 일찍이 이방원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매번 이방원을 도왔으며 명나라와 외교에도 역량을 발휘한 인물이라 한다. 그런데 강원도 하조대 해주욕장은 근처에 하조대라는 정자에서 이름이 유래 하였고 하조대는 바로 하륜과 조준이 고려 말에 숨어 지내던 곳에서 유래하였다는 안내문이 있으나 또 다른 이야기로는 조씨와 하씨 처녀의 애뜻한 사랑에 얽힌 곳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나는 기회가 닿으면 같이 가는 사람들과 함께 항상 들리는 전망이 수려한 곳이다.   


 윗글을 적기 위해 사실 나는 책을 다시 읽었으며 정말 재미 있는 역사 이야기가 줄줄이 나와 이를 간추리기가 벅찼다. 이제 겨우 책의 반을 정리한 셈이다. 나머지 반은 시간 간격을 두고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즉, 여기까지를 1부로 하고 2부는 다음에 계속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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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신대립의 뿌리를 찾아서, 수양과 김종서와 한명회>에서 수양대군(1417~1468)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된 인물이다. 자신의 반대파인 김종서를 단종 1년인 1453년 10월 10일 살해하였다. 저자는 마치 신문기사를 작성하듯 보고서 형식을 빌려 써서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전한다. 이 대목에서 김종서를 찾아가 죽이는 일에 약간 망설이자 수양의 부인이 말없이 갑옷을 입혀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수양대군보다 더 권력욕이 강했던 여자 인듯하다. 그래서 후일 남편 세조가 죽고 아들 예종도 왕위에 올라 1년을 넘기고 일찍 세상을 떠나자 12살 나이 어린 손자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였던 여걸 정희왕후가 바로 이 여성이다.    세조는 김종서를 제거하고 난 다음 궁궐에 대신들을 입궐하도록 하여 자신의 반대파들을 하나하나 골라 죽였는데 이 때 죽일 자와 살릴 자의 이름을 적은 명부, 즉 살생부를 작성하여 들고 대신들을 학살한 주도 인물이 한명회(1415~1487)라 한다. 당시 단종은 말은 왕이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하였고 언제 삼촌 수양에게 내 쫓길지 전전긍긍하다 결국 3년간 자리를 지키다 영월로 유배된 다음 죽음에 이른다. 이 짧은 3년 동안 수양대군은 자기 친동생들인 양평대군, 금성대군, 성녕대군 등을 포함하여 대신 수십 명을 죽이고 유배 보냈다. 이 과정에서 사육신, 생육신이 등장한다.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은 너무나 가혹한 살육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TV 역사극이나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조는 초기 왕권우위에서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기 시작한 왕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 왕권의 확대에 기여한 중심인물이 수양대군보다 두 살 위였던 한명회이며 수양을 왕위에 오르게 한 업적으로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같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후일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 폐출에 관련한 인물로 지목하여 한명회의 무덤을 파내 시체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하여 죽은 다음에는 어지러운 곤경을 맞은 사람이다.


 잠시 시선을 돌려 우리들이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을 중시하고 온 백성의 평안을 애써 위대한 성군으로 모시고 있는 세종대왕은 개인적으로 그리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첫째로 몸이 허약하여 각종 질병에 시달리셨는데 특히 안질로 평생 고생하셨으며 집권 후반기는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여서 아들 문종이 4년이다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정비 1명, 빈 8명 모두 9명이나 되었으며 아들도 첫째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그 외에도 군으로 불린 아들 10명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나 되고 공주도 4 명이었다. 그래서 왕위 계승문제도 생전에 세종의 근심거리였다 한다. 즉 세자였던 문종도 몸이 허약하고 다른 아들들이 권력욕심이 많아 세종의 걱정이 컸다 한다. 특히 둘째 수양대군과 셋 째 양평대군이 아버지 세종의 경계 대상이었다 한다. 그래서 세종은 죽기 전에 몇 몇 대신들을 직접 불러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날 경우를 대비하여 세손인 단종의 일까지 부탁할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세종은 우리 생각과 달리 스스로는 퍽 불행한 인물인 셈이다. 결국 세종의 우려가 현실이 되어 둘째 아들은 세종의 여러 아들을 무참히 죽이고 적손인 단종까지 죽였으니 세종의 자식 농사는 성공이라 할 수 없다. 수양대군은 왕위에 앉기 위해 자기 친동생 양평대군을 죽였으나 여섯 째 금성대군은 죽일 마음까지는 아니었으나 수양을 따르던 무리들이 후일을 위해 수양의 허락도 없이 살해하여 수양의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다 한다.  수양의 심복들은 목숨을 걸고 수양을 왕위에 오르도록 했으나 언제 금성대군을 따르던 반대파들이 장차 힘을 길러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에게는 피를 나눈 형제이지만 그들 입장에서 보면 장차 불씨였을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정치세계는 지극히 비정하다는 속성은 변함이 없다.


 <영원한 제국의 붕괴, 중종과 조광조> 조선시대 통 틀어 초기 정도전과 중기의 조광조, 중기 이후 정약용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 만큼 이들의 활약이나 후세에 미친 영향이 크다 하겠다. 특히 조광조는 개혁 사상가로 그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당쟁으로 이른 나이에 귀양을 갔다가 사약을 받고 38세의 젊은 나이게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이런 출중한 인물을 한 두 페이지로 정리하기로는 역 부족이겠으나 간단히 적어본다. 조광조는 1482년(성종13년)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낮은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운명을 바꾼 유학자 김굉필(1454~1504)을 그의 유배지 평안도 희천에서 만나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인품을 흠모하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한양으로 돌아와 학식이 출중함이 인정되어 중종의 눈에 들고 1515년 조금 늦은 나이인 34살에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하여 정 6품 정언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자신이 그동안 갈고 닦은 성리학적 도덕관과 세계관을 확산시켜 유교의 이상적 농촌사회 건설을 꿈꾸고 주변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도학정치를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너무 앞서간 조광조 사림파는 훈구파의 반격으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기묘사화의 광풍에 차례차례 목숨을 잃고 정치세력에서 퇴장하였다.


 <하루에 담긴 조선 왕의모든 것> 왕의 첫날 즉위식은 대부분 흉례라 한다. 왜냐면 대부분 선왕, 즉 아버지 왕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이루어지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위식은 거의 눈물바다를 이뤘다 한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즉위식이 길례인 경우는 단 한 번 태조 이성계의 즉위식뿐이라 하였다. 그러나 길례나 흉례로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인조의 즉위식으로 폭군 연산군이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임금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 외 이도저도 아닌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 하는데 왕위에 오른 사람의 적통성이 문제가 된 경우라 한다.


<왕의 최고 임무, 제왕학 수련> 왕의 제왕학 수련과 관련하여 영의정까지 지냈던 이준경이 74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상소로 남긴 문장이 그 본보기라하였다. 이준경은 중종부터 시작하여 인종, 명종을 보필하고 자신이 즉위시키다 한 21살의 어린 왕 선조가 걱정이 되어 아들에게 유언을 전하는 형식으로 상소를 올렸다 한다.

이 유언장 상소가 제왕의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이라 생각하여 저자는 소개하였다. 간단히 정리해보면, 첫 째로 제왕이 해야 할 일은 학문정진, 둘째는 신하를 대할 때 위의(威儀)를 지켜야 한다. 신하가 말씀을 올릴 때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성을 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셋째는 소인과 대인을 구별하라는 말인데 다시 말하면 인재를 잘 가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넷째는 붕당의 사론(私論)을 없애도록 당부하였다.


 <학문으로 신하들의 힘을 제압한 왕들>에서는 태조 이성계는 학문을 좋아했으나 전형적인 무사였기에 학문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아 대신 다섯 째 아들 이방원에게 글공부를 많이 시켰다 한다. 이리하여 이방원은 조선 국왕 중에서 유일한 고려 문과 출신 임금이지만 문무를 고루 갖춘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어느 임금보다 학문을 좋아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한다. 심지어 너무 책에 빠져 있어 어른들이 걱정이 되어 책을 감추고 주지 않을 정도였다 한다. 세종 다음의 문종도 책은 좋아했고 후일 세조인 수양대군도 역시 학문의 경지가 높은 임금에 속한다고 했다. 조선 초기 왕들이 본 책의 순서를 보면 대략 <소학>, <대학>, <논어>, <대학연의>, <자치통감>이고 마지막이 <주역>이고 주역의 해설서인 <회통>으로 나와 있다.


 책 마지막 부분은 왕들의 결혼이야기이다. 조선시대 왕의 결혼은 다분히 정치적 또는 정략적이었다 한다. 사실 왕뿐만이 아니라 일반 양반이나 서민들도 남녀 간의 사랑이 배제된 신분에 어울리는 결혼을 했으므로 신분상 최고 윗자리인 왕이 될 세자나 세손의 결혼은 더욱 정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근대 이전 서양도 마찬가지 일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재력과 권력의 정도에 따라 끼리끼리 이루어지는 결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 27명의 왕들 중에서 특히 11대 중종 임금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 하고 있다. 중종은 선왕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진성대군 시절에 신씨와 결혼하였으나 반정으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왕위에 올랐다. 장인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으며 당시 좌의정이었다. 반정세력 박원종이 장차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옹립하는 계획을 넌지시 타진하자 신수근은 불같이 화를 내며 연산군 편에 서겠다했다 한다. 다시 말하면 딸 편이 아닌 누님편을 든 셈이다. 물론 신수근은 누나, 딸을 떠나 당시의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결국 반정이 성공하자 신수근은 즉시 처단되고 중종의 처는 불과 왕비로 7일을 지내고 폐비가 되는 운명에 다 달았다. 요즘 말로 하면 왕이 신하들에 의해 이혼을 당한 셈이다. 이후 중종은 경회루에 올라 신씨가 인왕산 아래 살고 있다하여 그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한다. 이 소문을 듣고 신씨는 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덮어 '치마바위'이야기기 전해지고 있다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중종의 마음도 변하였고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였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신씨는 당시로는 장수라 할 71세까지 천수를 누리고 살았으며 영조 연간에 왕후로 복위되어 단경왕후란 시호를 받았으며 경기도 장흥에 묻혔다 한다. 묘호는 온릉이라는데 내가 언젠가 온릉을 지나친 듯하다.


 조선시대 왕릉에 나도 한 동안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당시 일단 왕릉 답사부터 시작하여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선정릉 그리고 여주 세종대왕릉인 영릉까지 둘러보았다. 사실 처음엔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능, 서쪽에 다섯 개의 능이라하여 그런 이름이 지어진 일조차 몰랐었다. 능 앞에 안내문도 있고 석물의 종류, 봉분의 크기 등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워낙 숫자도 많고 다양하였으며 더구나 왕릉 주변에 왕비 무덤도 함께 있어서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또 기억하기 어려운 점으로 시호, 묘호, 능호가 제 각각이어서 더욱 어려웠다. 예를 들면 중종의 경우 세상을 떠나자 임금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신하들이 새 임금, 인조에게 승낙을 받아 '중종'이란 묘호를 짓고 중종의 무덤은 '정릉'으로 하였다 한다. 이곳에 중종보다 일찍 묻힌 두기의 무덤이 9대 임금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 '선릉'과 성종의 무덤이 있다. 후일 11대 중종이 묻혀 지금은 세 무덤을 통상 선정릉이라 하지만 경내는 그냥 선릉능공원이라 하고 근처 지하철 역명은 선릉역이다. 그러나 분당선이 왕십리까지 연장되면서 지나치는 역 이름은 선정릉으로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성종의 첫째 아들이 연산군이고 중종은 연산군 이복동생이니 역시 성종의 아들로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묻힌 임금이다. 사실 중종은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처음 묻혔던 고양군 원당에서 이곳으로 천장되었고 문정왕후도 자신이  죽으면 중종 옆에 묻히길 원했으나 한강이 범람하여 중종 묘 앞까지 물이 들어오자 할 수 없이 자신은 노원구 공릉동에 묻혀 소원은 이루지 못하고 '태릉'이란 능호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태릉선수촌, 태릉역 등으로 어느 왕비보다 낯익은 능호가 되었다. 후일 임진왜란으로 성종, 정현왕후 그리고 중종의 묘는 일본사람에 의해 훼손되어 시신이 없는 묘들이라 한다. 조선왕조 역대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조선왕조 500년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한 씨족이 면면히 왕조를 이어 온 희귀한 사례여서 흥미롭고 자랑할 만한 이야기이다. 책 한 권을 읽고 이 만큼 상식을 늘이게 되어 저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책은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