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1900, 조선에 살다>를 읽고...

깃또리 2018. 10. 19. 10:29

<1900, 조선에 살다>를 읽고...
제이콥 로버트 무스(Jacob Robert Moose, 한국명:무야곱, 1864~1928, 64)/ 문무홍 옮김
푸른역사
2016.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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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조선'이 들어 있지만 조선시대가 저물고 일본식민지배가 시작되는 시기의 내용이라 부제목은 '구한말 미국 선교사의 시골체험기'이다. 옮긴이 문무홍이 2005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렌드를 방문하여 제프리 폴 제이콥스라는 오하이오 주 하원의원 출신 기업가를 만나 우리나라 구한말시대에 관련한 영어로 된 책 한 권을 받았다. 이 책은 이 기업가의 증조할아버지인 제이콥 로버트 무스가 쓴 <Village Life in Korea, 1911>라는 책으로 외증손자 제이콥 폴 제이콥스와 미국국회도서관에 한 권씩 소장 된 희귀본이라 한다. 이 책의 저자 무스는 1864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투철한 의지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듀크대학교의 전신인 트리니티 대학 신학부를 1892년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었다. 그린스보로 여자대학교를 졸업한 메리 매그놀리아 더함(1867`1952)과 1893년 결혼하고 선교사로 조선에 부임하여 아내와 24년간 살면서 조선에서 낳은 세 자녀를 포함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조선에서 성직자로 봉직하면서 대서양을 한 번, 태평양을 다섯 번이나 항해하며 일생을 선교활동에 바쳤다 한다. 라이트 형제의 인류 최초의 비행기인 Flyer 1호가 1903년 날았기 때문에 아마 당시는 항공기가 아닌 증기선으로 거친 바다를 건너 다녔을 텐데 종교적 사명감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Village Life in Korea> 서문 끝에 "역사나 지리 등의 사실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H.B. Hulbert(1863~1949)교수의 저술과 D. L. Gifford( )목사의 저술에서 많은 것을 빌렸다."라 밝히면서 '1909년 8월 20일, 조선의 춘천에서' 책을 썼다하였다. 지금부터 100년도 더 된 때이다. 이 책에 미국 선교사 H. B. Hulbert는 <History of Korea, 조선의 역사>를 썼으며 D. L. Gifford는 <Everyday Life in Korea, 조선의 풍속과 선교>를 썼다고 하는데 시간이 되면 읽어보고 싶다. 그러나 로버트 무스는 이 책들과 달리 1900년 초 당시의 조선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술하였고 특히 24년이란 긴 기간 동안 주로 시골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일을 썼기 때문에 어느 책보다 사실성이 뛰어나다. 무스 선교사가 자신의 나라인 미국 독자들을 위해 썼기 때문에 책의 첫 부분은 조선이란 나라의 소개이다. 당시 서방세계에 조선은 잘 알려지지 않아 미국에서는 '조선은 섬나라'라든가 편지 주소에도 '일본국, 조선, 서울' 또는 '중국, 조선, 서울'이라 쓰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무스 선교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조선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열대에 있는 아득한 섬도 아니고, 중국이나 일본의 한 지방도 아니다. 조선과 일본 간에 최근 체결된 이른바 '조약'이라는 것 때문에 조선이 일본의 영토가 되었을 뿐이다."라 하였다. 책의 발간이 1009년이기 때문에 여기서 조약이라 함은 1905년 을사조약을 말 할 것이다.  1910년 소위 경술국치,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침탈당했기 때문에 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미국인들은 중국의 조선이나 일본의 조선쯤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또한 국토의 최북단에 압록강과 두만강이 경계를 이루어서 3면이 바다이고 1면이 큰 강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다.


 무스는 조선을 1만개의 섬을 지니고 있는 극동에서는 최고의 기후를 가진 나라이며 인구는 800만에서 1500만 명으로 추산되므로 그 중간 1200만 명으로 보았으며 면적은 정확하게 22만 평방킬로미터로 기록하였으며, 미국의 버지니아 주의 곱절 크기에 해당한다 했다. 10년 동안은 시골 곳곳으로 선교활동을 다녀 비교적 정확하게 시골 생활을 기술하였으며 조선은 산이 많은 나라로 북단에 백두산 또는 장백산으로 부르는 가장 높은 산이 있고 경관이 뛰어난 금강산도 있으며 '죽기 전에 금강산을 보라'는 속담까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강원도 이야기를 하며 '감자바위'라는 말도 적었고 주식이 쌀이며 강을 끼고 있는 농지는 비옥하다고 적었다.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고대사 부분에서 기원전 1122년 중국 일부 세력의 중심인물인 기자(箕子)가 평양에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했으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새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대한'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의 건국 등을 간단하지만 우리가 배웠던 역사 교과서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시 무스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발을 디딘 1899년부터 1909년 대한제국 멸망시기의 사실을 기술하면서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하야시 곤스케 특명전권공사와 대한제국 외무대신 박제순이 서명하여 체결한 을사조약 전문을 게재하고, 이렇게 무스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다음은, 굳이 '조약'이라고 부른다면, 그 조약의 내용이다. 대한제국 국왕은 이 조약에 절대 동의한 적이 없음을 항상 분명히 했다." 무스 선교사가 정확히 알고 쓴 것인지 아니면 대강 알고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단지 일본 공사와 조선 외무대신 사이에 맺어졌을 뿐 국왕은 동의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들은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도 부른다. 조약 체결 후 자결한 민영환 선생이 남긴 "이천만 동포에 고함"이라는 글도 덧붙였으며 선생을 민장군이라고 불렀다. 끝으로 이토 후작이 통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하세가와 원수가 한국에 주둔한 사실 그리고 헤이그 밀사사건, 대한제국 육군해산 등을 간단히 적었다. 세계 유래 없이 500년 면면히 이어 왔던 조선의 멸망이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던 제3 국 외국인의 눈에도 허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 4장은 '조선의 영혼, 서울'이다. 서울 Sowl의 발음이 영어의 Soul, 영혼과 비슷하며 삶의 중심, 사회, 정치 나아가 모든 것의 중심이라 하였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서울에 갈 때는 어디서든 '서울로 올라 갑니다'라고 말한다 하였다. 당시 서울 인구를 대략 20만 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100년 동안 우리나라 인구는 약 5배 증가했으나 서울은 50배 늘어난 셈이다. 100년 전에도 서울 말고도 꽤 큰 도시가 있었지만 서울을 빼고 모두 '시골'로 부른다 하였다. 100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한국 사람의 정서에는 서울 이외는 모두 '지방, 시골'이라는 생각이 크게 변하지 않은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서울 중심개념은 뿌리가 깊다.


 그래서 생각나는 게 내가 오래전 부산에서 일할 때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약간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 속셈으로 대부분 부산 출신인 직원들에게 일부러 '부산 시골' ‘부산 지방’을 운운을 하였다. 원래 기질적으로 강한 성격의 사람들이라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우리나라 제1의 항구도시이요,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이 왜 시골이냐"고 항변하였다. 나는 짐짓 실수한 것처럼 아! 시골이 아니라 '지방도시'로 바꾸어 말했더니 그래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얼굴들이라 서울을 제외하면 무두 지방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부아를 돋우었다. 이 말장난에는 차마 어쩌지 못하고 분을 삭이지 못하던 모습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젊은 치기로 했던 농담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하다. 사실 나는 서울에 오래 살기는 했어도 부산보다 한 참 아니 100분의 1도 안 되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부산 대도시 사람을 약 올린 일은 한참 잘못한 일이다.
 
 무스가 서울을 소개하면서 빈약한, 아니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온갖 생활하수와 오물을 개천에 내다 버려 악취가 진동하는 상황을 적었다. 틀림없이 조선이 수도로 정하기 전인 고려시대 쯤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었기에 청계천이라 불렀을 텐데 1900년 대 초엔 하수도 시설이 정비되지 않아 서울의 모든 하수와 오수가 쏟아져 흘러 그야말로 악취의 근원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악취 속에서도 잘 지내는 조선 서울 사람을 보면서 무스는 '냄새는 교육의 산물'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어느 냄새에 익숙하면 그 냄새에 적응하기 때문에 이를 '교육'이라고 달리 표현하였다. 실제로 자기 집에 초대 받은 어느 조선 여성이 스테이크를 먹지 않은 걸 보고 무스는 더욱 냄새를 포함하여 각 민족의 문화의 차별성을 인정했던 사람이다. 만일 무스가 자만심이 가득한 선진국 사람이었다면 조선의 문화와 낙후된 위생 관념을 얕보고 흉을 보았을 텐데 '냄새는 교육의 산물'로 간주하였으니 대단히 관대하고 문화적 품격을 지닌 사람이다.

 다음으로 조선 사람들의 유별난 흰옷사랑, 훌륭한 경관을 지닌 서울 모습, 명성황후의 시해사건, 원각사 10층 석탑 등 당시 조선과 서울의 정황을 소개하였다.


 <06 '이 나라에는 Home이 없다'>에서 Home, Sweet home을 한국어로 번역할 말이 없다 했다. 집이라면 '초가지붕의 흙집'을 의미하고 이는 영어에서 House라 했다. 사실 당시에 '가정,家庭'이란 어휘가 보편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옮긴이는 '가정'을 추가 설명하였다. 조선사회에서 낮은 여성의 지위와 함께 여자종, 대가족제도, 시골의 5일장과 육상수단의 하나였던 당나귀, 쌀과 김치, 남아선호, 교육중시, 큰아들의 우월적 지위, 세시풍속 중 하나인 연날리기, 돌싸움 등을 소개하였다. 옛 기록에도 당나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당나귀를 쉽게 볼 수 없는 가축이다. 무스 선교사가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의 반말, 예삿말, 높임말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 적었다. 하긴 영어와 현격하게 다른 언어습관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11세 젊은 신랑이 47세의 미혼인 머슴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기이하게 보기도 했다.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어 구사가 도움이 되었을 텐데 무스씨는 퍽 불편했으리라 생각된다.


 <09 자유롭지 않은 굴레, 양반>이란 제목으로 조선시대 덕목인 예와 인, 그리고 과거의 속박에 묶인 양반을 관찰하고 특히 양반들이 첩을 거느리는 관습에 큰 관심을 보였다. 원래 기독교 교리는 1부 1처를 기본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므로 무스 선교사의 시각으로 당연히 악습으로 보았을 것이다. 또한 남녀평등이 이미 정착된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1900년대 초 현저하게 낮은 조선 여성의 지위에 비판적 시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실 당시 서양의 남녀평등 개념은 동양보다 앞 선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 가 보면 동, 서양이 크게 다를 바 없다. 예를 들면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1775~1817, 42)이 활동하던 시기인 불과 250년 전만해도 딸 다섯을 둔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재산이 부인이나 딸들에게 조금도 돌아가지 않고 먼 친척 중 남자에게 상속되는 게 영국의 당시 관습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들의 장래를 위해 좋은 사위감을 고르는 일이 가장 중요하였고 그래서 소설은 온통 결혼에 관련한 이야기들이다. 서양에서 여성의 참정권만 해도 최초로 뉴질랜드에서 1893년 실시되었고 미국은 1920년, 민주주의 성지라는 영국조차 1928년으로 불과 100년 전이다. 동양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기는 했어도 언어체계에서 男과 女는 대등한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영어는 Man과 Woman으로 여자는 man 앞에 '작다'는 의미의 wo-가 덧붙여 결국 남자의 종속 개념이다. 모름지기 언어는 인간의 의식을 반영하므로 언어로만 보면 오래 전에는 동양의 여성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던 셈이다.


 이야기가 약간 샛길로 벗어났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오면, 교육기관인 서당에서 여성은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 그리고 젊은 여성은 남성을 똑바로 처다 보면 안 되는 관습 등을 기록하였다. 벼농사 이야기와 함께 볏짚의 다양한 용도를 자세히 밝혔다. 즉 지붕을 덮고, 곡식을 담는 용기재료, 신발인 짚신, 다양한 용도를 지닌 새끼줄, 소와 말의 먹이가 되는 여물, 달걀의 포장 꾸러미, 땔감으로 쓰이는 등 실로 폭 넓을 걸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고 조선생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요긴한 재료라 하였다. 이 책에는 빠졌지만 내가 어릴 적 벽지에 사는 어느 초등학교 친구 집에 갔더니 재를 모아 둔 잿간의 한 구석이 변소였으며 대변을 마치고 사용하는 것이 짚의 부드러운 거풀이었다. 불관 50년 전의 일이다. 조선시대 임금님은 명주 천을 썼다는데 평민들은 대부분 지푸라기를 썼으리라. 아마 무스 선교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글을 읽다보니 사실 짚의 용도가 무궁무진함을 알 수 있다. 지게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였고 조선의 농부들이 대체로 게으르다는 평가는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 무스 선교사는 조선에 대해서 모든 상황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보았음을 반증한다. 지게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이야기로 6.25 전쟁 중에 높은 고지에 군사용품을 나를 때 지게가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이를 지켜 본 미군들은 신기해하며 유익한 발명품이라 찬탄했다는 내용을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미군들은 지게의 형태에 착한하여 'A frame'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왔었다.


 다음 이야기로 무스는 당시 한의사에 대해서는 '없는 편이 낫다'라고 단호한 평가를 내렸다. 서양사람 시각으로 침이나 부황을 뜨는 일 그리고 한약재에 대한 효능을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며 특히 시골의 돌팔이 한의사들의 횡포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조혼풍습, 중매장이, 신부의 과도한 화장, 장례의식, 무당, 토속신앙 등을 기술하면서 조상숭배는 악습의 뿌리로 보았다. 유일신을 기본으로 하는 기독교인으로는 조상숭배가 이교적이고 어이없는 행위로 보았을 것이다. 책의 후반부는 조선의 가톨릭 전파 그리고 급속히 교세를 확장하는 개신교의 영향으로 늘어나는 교회의 건립, 신자들의 증가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록하였다. 특히 윤치호(1865~1945)선생을 선각자로 부르며 간단히 소개하였다. 윤치호는 젊은 시절 부친과 함께 갑신정변에 가담하였고 일본, 중국, 미국에 유학하고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의정부참의, 외무협판 등 공직에 몸을 담았다가 지금의 개성인 송도에서 한영서원의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의 초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일들이 무색하게 후기에 일제에 협력한 친일 인물로 낙인이 찍힌 인물이다.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중립적인 시각과 평가에 자유로워 100년 전 우리나라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기록한 퍽 재미있고 흥미로운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