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천지간, 天地間>을 읽고...

깃또리 2018. 10. 18. 10:27

<천지간, 天地間>을 읽고...
윤대녕
생각의 나무
2016.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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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라는 윤대녕의 작품집에서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를 다시 읽고 후기를 쓰려고 했으나 이 작품으로는 줄거리가 잡히지 않았다. 불과 이틀 전에 두 번째 다시 읽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작품집에 실린 <천지간, 天地間>을 후기로 쓰기로 했다. <천지간>은 황석영씨의 <삼포 가는 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마 내가 이런 종류의 작품에 취향이 맞는 것 같다. <천지간>은 1996년 지금으로부터 만 20년 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그 해에 읽고 다시 읽었는데 지금 읽어도 역시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주인공은 서울 백병원에서 외숙모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 고향 광주로 시신이 옮겨졌다. 조카인 32살의 주인공은 어머니가 내려갔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그간 여러 번 많은 도움을 받은 일이 있어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광주에 내려간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려고 건널목을 걷다 젊은 여자와 어깨를 부딪치고 뒤돌아보니 여자도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검은 상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어 그런가 하는 생각과 '바라봄의 순간은 너무 길어' 발길을 돌려 여자를 찾아 시내버스터미널로 갔다. 스물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이 여자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는 9개월 전 암 선고를 받은 뒤 외숙모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차디찬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크나큰 당혹감이 천둥처럼 지나가고 나서 그리 길지도 않은 사이에 그녀의 얼굴에 뒤덮이던 적막한 체념의 그림자. 그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았다."


 주인공은 홀린 듯 여자를 따라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구계등 바닷가까지 따라 갔다. 여자는 횟집을 겸한 여관에 방을 잡고 뒤따르던 주인공 남자도 바로 옆방을 차지하였다. 횟집 주인이자 주방 일까지 맡아 일하는 사내 얘기로 여자는 언젠가 이 여관에 어떤 남자와 함께 묵어 안면이 있으며 자신의 눈으로 보아 불상사를 일으킬 여자 같다며 감시를 부탁한다. 주인 입장으로는 사고가 나면 퍽 난감하고 이런 곳에 있다 보면 가끔 겪는 일이라 하였다. 이틀 사이에 소리하는 사람들 중 어느 젊은 여자 소리꾼이 바다에 빠져 자살하고 옆방 여자도 갑자기 몇 시간 사라지는 등 소설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횟집 주인의 목소리를 빌려 작가는 독자들에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여자 혼자 여기까지 오는 것 만해도 흔치 않은 일인데 문상을 가던 사람이 뒤 쫒아 왔으니 예삿일이랄 수 없잖아요? 꼭 이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 친 다음에야 사람이 만나는 건 아닙니다. 인연이란 게 뭐 따로 있나요."


 또 이 단편의 제목 천지간이란 말도 횟집 주인 입에서 나온다. "배운 게 짧아 놔서 천자문 하나도 다 익히지 못했단 뜻이예요. 별별 일을 다 하며 떠돌아다니다 5년 전에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들어왔죠. 천지간 사람이 하나 들고나는데 무슨 자취가 있을까만요." 주인공이 주인에게 어떻게 구계등에 오게 된 이유를 묻자 대답으로 한 말이다.


 옆 방 여자의 밤새 흐느낌을 숨 죽여 듣기도 하고 불쑥 남자의 방으로 들어 온 여자로부터 그간의 일을 듣고 남자는 여자를 품에 안는다. 넉 달 전 좋아하는 남자와 이곳 ‘구계등’에 왔었으며 임신 4개월째인데 남자는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 한다. 그래서 다시 이곳을 찾아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한다. 이 부분에서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문을 열고나서 나는 여자가 들어오게 옆으로 조금 비켜섰고 그런 다음 뒤에서 문을 닫아 걸었다.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젖은 옷을 한 겹씩 한 겹씩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고는 알몸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반듯하게 누웠다. 커튼을 치고 불을 끄자 남은 어둠이 그물처럼 드리워졌다. 그러나 정녕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날 새벽 남은 어둠 속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는 것을. 여자와의 관계가 끝나고 난 다음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내 손바닥 안에 달이 떠 있었다는 것을.”
 
 이어서 “앞뒤 아무 약속도 없이 만난 사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할 수 없이 떨리고 서먹한 가운데 나는 여자 옆에 비스듬히 누워 그녀의 손부터 더듬어 잡았다. 여자는 가만히 있더니 얼마가 지나서야 떨면서, 가까스로 응답해 왔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왼팔로 여자의 목을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내 입술을 그녀의 얼굴에 갖다 댔다. 그때 여자의 숨이 잠깐 멎은 듯했고 몸이 조금 꿈틀했다. 내 손은 어느새 여자의 가슴께로 옮겨가 있었다. 나는 밑으로 내려가 여자의 가슴에 입술을 갖다 댔다. 여자가 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이윽고 나직한 신음을 토해 냈다. 여자의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파고들었다. 여자의 몸은 나이에 비해 약간 부풀어 있었다. 내 입과 손의 움직임에 따라 여자의 아래 깨가 서서히 비틀리며 풀어졌다. 나는 가슴을 쓰다듬고 있던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그리고 배꼽 근처에서 이르렀을 때 갑자기 여자가 굉장한 힘으로 내 손을 덥석 몰아 쥐더니 제 다리 사이로 냉큼 끌어당겼다. 여자의 거웃은 벌써 푹 젖어 있었고 그때부터는 마구 서두르기 시작했다. 몸을 틀어 내 허리를 바싹 욱죄며 입술로 내 가슴을 거칠게 더듬었다. 여자의 머리칼이 내 몸을 슬쩍슬쩍 스치는 통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맥없이 들려 있는 여자의 다리 사이로 허겁지겁 쳐들어갔다. 범피종류. 나는 여자의 몸 위에서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며 마치 물 한가운데로 떠가는 듯하다가 뇌가 하얗게 비어 버릴 찰나 용암 같은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중략) "여자는 자신의 전생을 지우기 위해 나와의 관계를 원했고 그리하여 아이는 살리되 아이의 아비에게는 놓여 날 수 있었다고 중얼거리며 내 팔에서 잠들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이 어느 우연한 만남과 작은 계기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 서는 경우가 있다. 결국 남자는 한 사람을 구원한 셈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남자와 여자가 몸을 주고받는 일은 성스럽고 인간의 삶은 불가해하다는 생각이 든다.


* 범피중류(泛彼中流): 심청가 진양조에 나오는 말로 ‘배가 강 가운데 떠 나아간다.’라는 말로 안전하게 배가 나간다. 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