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은비령>을 읽고...

깃또리 2018. 10. 22. 09:37

<은비령>을 읽고...
이순원
현대문학
2016.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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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현대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소설이다. 나는 '은비령, 隱秘岺'이란 제목에 끌려 읽었으나 오래 전에 읽어 내용도 기억에 가물가물하여 올 봄에 다시 읽고 지난 추석 한가한 시간에 정독하였다. 내가 오래 전부터 강원도를 좋아하여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진고개, 대관령, 백복령 등 태백산맥에 걸친 고개들을 자주 넘어 다녔다. 지금은 고개 밑에 긴 터널들이 뚫리고 있어 점점 옛 정취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가보고 싶어 하고 이야기 중에 고개 이름이 나오면 그 고개를 넘어가 적이 있다고 눈을 반짝이며 생기를 띠기도 한다. 대개 고개마다 한  두 가지 전설들을 지니고 있으며 고개 이름들이 정겹고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내가 은비령을 처음 읽게 된 동기도 생소한 고개 이름이라 호기심 반으로 읽었다. 그러나 은비령이란 고개는작가가 그럴듯하게 지은 이름이며 사실은 한계령 정상에서 양양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필례약수 가기 전쯤의 지역을 모델로 삼았다 한다.


 30대 중반의 소설 주인공의 고향은 작가와 같은 강릉으로 군대생활도 태백산맥 아래에 있는 부대에서 보냈다. 식물학을 공부했던 부하 사병으로부터 눈 더미 양지바른 곳에 핀 '바람꽃'을 알게 되었고 부하 사병의 면회 온 애인을 보고 바람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부하 사병은 지뢰사고로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군대를 마치고 사법고시 공부를 하러 은비령을 찾아 들어 갔으나 고시 공부보다는 습작에 마음이 더 가고 있던 중 서울에서 이곳으로 공부하러 온 같은 또래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주인공은 고시공부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직업을 얻고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부인과 별거를 한다.


 이 소설에 사랑, 죽음, 갈등, 이별 등이 자주 나오지만 부인과 별거 부분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즉 부인은 친정아버지 사업이 번창하므로 남편에게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글쓰기를 조금 미루거나 함께 하면서 아버지를 도와 일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업이고 그 어느 일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여 자기 성격에 맞지 않는 장인 일을 거들 수 없다고 한다. 아내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제대로 된 일이 아니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하면 되는 하찮은 일이 아니냐고 설득하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는 가치관의 차이가 메울 수 없는 깊은 계곡처럼 자리 한다. 더구나 아내는 주인공이 마음만 바꾸면 아무 때고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혼에 동의하지 않고 버틴다. 그러던 중 은비령에서 함께 사법고시공부를 하던 친구를 우연히 운전면허시험장에서 만나고 그 아내와도 인사하며 부인이  '바람꽃'같다는 생각을 다시 떠올린다. 고시 친구는 사법고시 공부를 그만 두고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지금은 과천 정부청사에서 촉망받는 공무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다음 어느 날 주인공은 친구 사무실에서 고시 친구의 바람꽃 같은 아내를 만났고 고시 친구는 직장 단체 여행하다가 서해 앞 바다에서 조난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생계를 위해 아내 바람꽃은 자신의 친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걸 알게 된다. 바람꽃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자신 때문에 죽은 친구에게 부담을 느껴 친구가 죽은 서해 격포 앞 바다로 향한다. 서울에서 부터 차가 막히고 승용차에서 방송을 듣다 3월 중순인데도 한계령에 눈이 내린다는 기상청 뉴스를 듣고 차를 돌려 은비령을 향해 달린다. 10년 만에 옛 은비령에 사는 노부부 하숙집에 들러 상황버섯과 석이버섯을 손질하는 주인에게 바람꽃 이야기를 한다.  이곳에서  별자리 관측에 취미를 가진 서울에서 온 젊은 사람을 만나 우주와 혜성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 이순원은 <작가는 떳떳하게 격려 받고 싶다>라는 제목의 수상소감에서 어느 아마추어 천문관측자와 <어느 별에서의 들꽃 통신>을 하여 이 소설에 나오는 우주와 별자리, 혜성에 대하여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밝히고 있다.
 
 서울에서 바람꽃 여인도 죽은 남편이 머물렀다는 은비령을 처음 찾아 왔다가 주인공과 만나 동해 바다를 함께 바라본다. 서해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사랑하던 남편 때문에 바람꽃에게는 동해보다 서해가 더 깊어 보인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은비령으로 다시 돌아 온 두 사람은 별 마중 준비를 하는 아마추어 별자리 관찰자와 함께 ‘하쿠다께 혜성’의 움직임을 처음엔 육안으로 다음엔 25배율 망원경으로 찾아본다.   혜성의 공전괘도는 두 축이 있으며 하나는 태양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 공간의 어느 한 지점이라 한다. 모든 혜성의 공전 괘도는 각각 다르고 이에 따라 혜성이 지구에 가까이 오는 기간도 이삼년에 한번 또는 헬리 혜성처럼 주기가 77년인 경우도 있고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혜성도 있다 한다. 혜성이 영어로 'Comet'인데 그리스어로 머리카락같이 작은 별이라는 뜻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시골에서 '살별', '꼬리별'이라고 했다. 북박이 별이 아니라 움직이는 별, 살아 있는 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잘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갑자기 나타나 인기를 모으는 연예인이나 정치인, 작가들을 지칭할 때 '혜성처럼 출현한' '혜성처럼 나타난'이란 표현을 자주 썼는데 멋진 표현이지만 식상해서 그런지 이젠 듣거나 볼 수 없는 표현이 되었다. 언어도 시대, 세대, 계층에 따라 변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긴 세월을 겁(劫)이라고 더욱 긴긴 시간을 영겁(永劫)이라 하는데 겁은 인도 산스크리트, 범어라고 들었고 독수리가 천년에 한 번 날아와 큰 바위에 날개를 스쳐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긴 기간이라고 들었다. 이 책에는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나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 저 북쪽 끝 ‘스비스조드’라는 땅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있답니다. 높이와 너비가 각각 1백 마일에 이를 만큼 엄청나게 큰 바위인데, 이 바위에 인간의 시간으로 천 년에 한 번씩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날카롭게 부리를 다듬고 간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 영원의 하루가 지나간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가 숨 쉬고 사는 게 참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오는 10분의 1 시간도 안 되는... 그런데도 그런 시간이 그 시간의 수만큼 흘러도 한 번 떠난 다음 영원히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별이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 이 세상은 2천 5백만 년을 주기로 모든 일이 되돌아간다고 한다. 불교의 윤회가 더욱 확대된 개념이다. 소설에서 아마추어 관측자는 화성의 위성을 처음 발견한 천문학자 홀의 유머를 인용하며 이런 이야기도 들려준다.  퍽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대략 옮겨본다. 홀의 대학원 조수 시절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중년 부인 주인에게 별 이야기를 해주고 오늘 식사 값은 2천 5백만 년 후에 갚을 테니 외상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주인은 흔쾌히 허락한 다음 사실은 2천 5백만 전에 똑 같이 식사를 외상으로 했으니 이젠 갚아 달라 했다 한다. 이런 일이 사실이라면 식당 주인이 하버드 영재 학생보다 재치와 순발력이 뛰어난 부인이라는 생각이 들고 퍽 재미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주인공과 바람꽃 '선혜'가 한 이불 속에 들어 "이젠 손을 잡아 주세요. 그리고 2천 5백만 년 후 다시 절 처음 봤을 때 그것을 기억해주시고요. 바람꽃 같다고 말할 때......" 라는 문장이 나오며 끝을 맺는다. 이 부분에서 작가가 공들여 썼을 문장을 그대로 옮겨 본다.

 "그러면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하나하나 벗어 윗목으로 놓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두운 하늘빛 속에서도 여자의 몸은 희미하게 빛났다. 등을 보이고 섰다가 돌아설 때 여자의 머리카락까지 내 눈엔 바람에 흐르는 혜성의 꼬리처럼 가늘게 흔들리며 떨렸다. 여자는 이불 속에 발을 넣고 한참 그렇게 앉았다가 처음처럼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눕혔다.
'이제 손을 잡아 주세요. 그리고 2천 5백만 년 후 다시 절 처음 봤을 때 그것을 기억해주시고요 바람꽃 같다고 말할 때......'"

 
 이 소설 처음부터 바람꽃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래서 바람꽃을 찾아보니 종류가 퍽 많았다. 봄에 일찍 피기 때문에 유명해진 변산 바람꽃, 지역 이름을 따서 설악, 태백, 남방, 만주 바람꽃이 있으며 이름도 특이한 홀아비, 꿩의, 회리, 나도, 너도, 세, 들, 숲 바람꽃 등 줄줄이 나온다. 바람꽃에는 서양에 이런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바람꽃 종류들의 속명(屬名)은 ‘아네모네’(Anemone)인데, 옛날 꽃의 신 '플로라'에게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아네모네'라는 시녀가 있었고 플로라의 남편인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그만 아네모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플로라는 불같은 질투로 아네모네를 멀리 내쫓아보냈다 한다. 하지만 제피로스는 바람을 타고 그녀를 찾아 깊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이를 지켜 본 플로라는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다. 슬픔에 젖은 제피로스는 언제까지나 아네모네를 잊지 못하고 매년 봄이 되면 늘 따뜻한 바람을 일으켜 아네모네를 아름답게 꽃피우게 한다. 그래서 오늘날 바람꽃들은 아네모네(Anemone)라는 속명을 얻게 되었다 한다. 아네모네는 그리스어로 '바람의 딸'이라 한다.
 
<영혼은 호수로 간다>


 이순원은 강릉출신에 걸맞게 대부분의 작품 배경을 태백산맥 동쪽 언저리로 삼았다. 꽤 오래 전 <말을 찾아서>라는 단편을 읽었으나 말이 우리가 소리 내는 말인지, 아니면 동물 말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강원도 배경 묘사가 무척 인상 깊었다는 기억뿐이다. 시간이 되면 다시 찾아 읽고 싶다.  <영혼은 호수로 간다.>의 배경도 역시 강릉이고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살면서 가끔 고향을 찾는 주인공이 강릉 시내에서 좀 떨어진 산골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잠시 한 동네에 살며 먼 길을 함께 통학한 말이 적었던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친구였으나 있는 듯 없는 듯 어느 것 하나 별나지 않아 잊고 지냈으나 그 친구는 강릉에서 대관령을 바라보며 이곳저곳 지명을 짚어 보고 그리고 대관령 쪽에서도 강릉을 내려다보며 너른 바다와 경포호수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여 설명했던 기억을 되살린다. 또 하나 자신이 죽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을 주인공에게 주겠노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영혼은 경포호수에 잠들겠다는 다소 어이없는 이야기도 했었다.


 세월이 흘러 강릉에 들려 한 친구를 만나고 대관령 중턱에 있는 예전부터 할머니와 자주 들렀던 보현사를 찾았다가 이 절에서 먼 산길을 홀로 내려가는 젊은 여성을 만나 차를 태워주며 이야기를 나누고 경포호수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여성은 자기의 남편이 얼마 전 대관령 아래에서 죽음을 맞았고 평소에 자신은 죽어서 대관령에 묻히고 경포호수를 보고 누울 것이며 영혼은 호수에 거닐 것이라고 했다 한다. 얼마 후 동창 친구로부터 그 옛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대관령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자주 다녔던 대관령 아래 보현사에서 내려 올 때 겉 코트 안에 소복을 입었던 여성을 경포호수에 내려 준 일을 생각해보니 동창으로부터 그 옛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픈 몸으로 대관령 아래까지 올라가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주인공은 옛 일들은 떠 올린다.


 그러나 옛 친구가 했던 "야 이수호, 이 다음 내가 죽으면 내가 제일 아끼던 거 있으면 니 주고 갈께."라는 말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정말 그는 빈손으로 그렇게 대관령에 누워 발아래 호수에 얼굴을 씻고 손을 씻고 있는 것일까. 또 그래서 그날 그렇게 여자를 내게 보냈던 것일까. 잘가라, 내 오랜 친구......우리 호수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로 끝을 맺는다.  이 단편이 지금 다시 쓰여 진다면 주인공 이수호와 옛 친구의 아내는 어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과정을 거쳐 서로 몸과 마음을 나누는 결말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야 옛 친구가 제일 아끼던 아내를 이수호에게 보낸 것이 될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긴 이순원 작가도 여러 설정을 하다가 가장 알맞는 스토리로 이끌어 나 같은 불순하고 단순한 독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기 게 하는 고도의 계산이 깔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