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간양록, 看羊錄>을 읽고...

깃또리 2018. 10. 12. 15:44

<간양록, 看羊錄>을 읽고...
강항, 姜沆씀/ 김찬순 옮김
보리
2016. 09. 14.


 이 책 제목 <간양록>에 보충하여 붙인 제목이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이다. 책은 기행문으로 분류하였으나 내용은 일종의 견문록에 가깝고 원문은 순한문으로 북한의 고전문 학자들이 우리글로 바꾸었고 이를 다시 일부 우리말 맞춤법과 어법에 맞게 고쳐 출판하였다고 앞글에서 밝혔다. 먼저 원문을 쓴 강항에 대하여 연보를 참고하여 소개해보면 1567년 전라도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유학자 강희맹의 5대 손이었고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 27세에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30세에 공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하니 지금의 6급 공무원 신분정도가 아닌가 한다. 참고로 판서가 정2품, 참판 종2품, 참의 정3품, 응교 정사품, 정랑 정5품, 좌랑 정6품 등이었다. 휴가로 고향에 내려가 있던 1597년 정유재란을 맞아 피난 겸 통제사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려고 배를 타고 가던 중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왜적의 손에서 구차한 삶을 사느니 죽으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끌려 가 3년을 지내고 1600년 풀려나 가족과 함께 귀국하였다. 36세, 42세에 대구교수와 순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여 부임하지 않고 독서와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1618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264년이 지나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이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운제록, 강감회요, 좌씨정화, 간양록, 문선한주, 수은집을 남겼다.

견문록이라 했지만 강항선생이 포로가 되었던 과정과 포로생활을 하면서 보고 느낀 점은 비교적 내용이 많지 않고 일본에서 임금, 선조에게 보낸 상소와 일본에 대한 보고서 형식의 글이 많고 조선에 돌아와 임금께 올린 글도 포함되었다. 즉 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涉亂事述 섭란사술: 내가 겪은 정유재란
敵中封疏 적중봉소: 적국에서 올린 상소
敵中見聞錄 적중견문록: 내가 듣고 본 적국 일본
諧承政院啓辭 승정원계사: 고국에 돌아와 임금께 올린 글
 
跋文 발문 (윤순거 씀)
*윤순거는 강항의 제자이다.


  지금부터 419년 전 조선시대 학식 있는 선비가 적국의 포로가 되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생활방식도 현저히 다른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느낀 고뇌와 나라를 위한 충정이 잘 나타난 글이다. 또한 당시 일본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 퍽 흥미롭다. 강항은 피난 겸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싸움에 참여하려고 부모와 장인 등 처가 식솔 그리고 하인 하녀까지 데리고 배를 타고 남쪽을 향해 내려가다가 왜군에 잡혔다 한다. 왜군은 강항 일행이 의복을 갖춰 입은 상황 등으로 판단하여 양반이나 관료 등 지식층은 비교적 대접을 다르게 하여 포로로 삼아 일본으로 데리고 갔으며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죽이기도 하고 대우를 소홀히 했던 것 같다.


 당시 일본은 군사력은 조선에 비하여 강했으나 문화수준이 낮아 학식 있는 사람들을 잘 포섭하여 문화갈증을 채우려 했던 것 같으나 이 부분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이 없어 궁금하다. 강항의 마지막 글을 보면 "식솔 열 명과 우리나라 선비들과 사공과 나의 처와 딸 등 서른여덟 사람을 태우고 1600년 4월 2일 왜경을 떠났으나 배꾼이 서투르고 바람씨 또한 불리하여 5월 19일에야 비로소 부산에 도착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3년이란 비교적 긴 세월 동안 잘 버티기도 했지만 일본의 대우도 크게 나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탈출 과정도 강항을 비롯한 선비들이 주로 승려였던 일본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어 조선 선비들이 우위를 보이던 학문을 전수하여 이의 보답으로 은을 받아 보관하였다가 배를 구입하고 한 달 이상 약 47일 간 항해를 할 수 있었던 보급품 준비도 했던 것 같다. 항해 내용은 일체 언급이 없는데 퍽 궁금한 대목이다. 이 부분만 자세히 기록했어도 책 한 권은 되지 않을까 한다.


 강항 선생이 일본에서 가장 절친하게 지낸 일본 사람은 묘수원(妙壽院)의 승려 순수좌(舜首座,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한다. 일본의 승려는 주로 신분이 높은 집안사람이 될 수 있으며 아내와 함께 번화한 곳에 사는데 예를 들면 천황의 아들이나 숙부 또는 쇼군의 형이나 동생 등도 중이 되었다 한다. 그래서 중은 대부분 학식이 있고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한다. 순수좌에 대하여 이런 글이 나온다. "일찍이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그의 재주 있고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倭京(일본수도)에 집을 짓고 일 년에 쌀 2천 석씩 주기로 했으나 순수좌는 집도 쌀도 받지 않고 다만 약주 소장 승준과 적송광통(赤松広通, 아까마쓰 히로미치)과 상종 할 뿐이다. 순수좌라는 중이 특출한 인물이었으며 당시 최고의 실력자의 호의까지 무시할 정도의 승려였으며, 이런 사람이 강항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다. "일본 백성들이 지금처럼 심하게 들볶인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조선이 만일 중국 군대와 함께 일본 백성을 위로하고 전범자를 정벌하려면 우선 투항한 일본 사람과 통역에게 일본 글로 방을 걸어 사정을 알려 일본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져 줄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털끝만치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비록 백하관(白河關)까지 이르더라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조선 사람한테 살륙 약탈을 저지른 것처럼 여기 와서 똑같이 한다면 대마도 하나도 복종시키지 못합니다."


 또한 강항으로부터 조선의 과거제도와 춘추 석전과 경연 절차를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애달퍼라 중국에 나지 못함이여! 또 왜 조선에 나지 못하고 일본에. 그것이 바로 이런 때 났을까요. 내가 신묘년(1591) 삼월에 살마도로 내려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려 했더니 병에 걸려 도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병이 좀 낫거든 조선으로 건너가려 하였더니 또 연이어 전쟁이 벌어져 나 같은 사람을 받아 줄까 싶어 감히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였구려! 귀국을 구경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운명인가 봅니다."  


 이런저런 내용을 종합해보면 비록 강항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지만 아직 나이가 30대 초반이고 당시 조선시대에는 강항 선생보다 학문이 높은 인물이 수두룩했었는데 일본 최고의 실력자 순수좌가 강항의 가르침에 머리 숙인 걸 보면 그 시기의 조선과 일본의 학문 수준차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순주좌는 강항의 영향으로 정주학에 본격적 관심을 가져 성리학자이자 유학자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여 일본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아무튼 순수좌를 포함하여 강항선생을 존경하는 주변 인물들의 적극적 주선으로 강항 일행이 귀국할 수 있었는데 <간양록>에는 내용이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순수좌는 강항 일행이 대마도 통과에 어려움이 없도록 글을 써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고 순수좌와 그 주변 인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강항의 귀국은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내가 그 동안 알고 있던 대마도의 인식이 퍽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국토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이라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는 의미보다 일본 본토에서는 조공을 받고 협력과 상호 도움을 주는 자치령쯤이었던 것 같다. 특히 쇼군(장군)들이 군웅할거하던 시기여서 척박한 대마도에 큰 관심이 없었고 대마도주 종의지는 조선과 일본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입지 보전에 능했던 사람이었다 한다. 임진왜란의 시작도 일본 본토의 쇼군들의 이해관계와 대마도주의 간계에 따라 일어났다고 강항 선생은 파악하였다. 강항선생이 선조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 중에 <대마도주와 소서행장이 일으킨 참화>라는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신이 들으니 평상시 영남 조세의 태반은 동래. 부산에서 왜국 사신이 오가는 데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포로가 되어 왜국에 와 있으면서 왜중 한테 자세히 들어 보니 이른바 왜국 사신이란 자는 다 대마도주가 보낸 사삿사람이고 이른바 왜의 국서란 것도 다 대마도주가 지어낸 것으로 이는 일반 왜인들만 모를 뿐 아니라 일기주와 비전주의 여러 장수들도 듣지 못한 일이라 합니다.


 대마도에는 밭이라고는 한 뙈기도 없으니 대마도주가 우리나라를 속이고 쌀을 받아다가 그들의 공사 비용에 충당하여 왔습니다. 일찍이 통신사 김성일 등이 일본에 왔을 때 왜중이 우리나라 통역한테서 이 사실을 듣고 대마도주의 허위를 말하려는데 대마도 통역이 진상이 밝혀질까 두려워 얼른 막았다고 합니다. 왜란의 단서를 열어 놓은 것도 모두 대마도주 종의지라는 자의 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섭진주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은 종의지의 장인인데 종의지는 직접 적의 괴수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테 통할 수 없어 처음에는 소서행장을 통하여 우리나라 실정을 세밀히 고하였습니다. 소서행장은 또 자신이 이 일을 맡겠다고 풍신수길에게 청하여 드디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오래 끌게 되어 죽은 자들이 많아지니 왜인들도 원망이 뼈에 사무쳐 "이 참화는 사리로 섭진주가 빚어 낸 것."이라 하며, 포악무도한 왜장 가등청전(加藤淸正, 가토기요마사)도 조선과의 불집을 일으켜 놓은 자는 섭진주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소서행장도 급기야 우리나라의 전투 역량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전쟁이 유리한 결말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종의지를 성토할 것이고 또 무역 통로를 열지 않을 것이므로 힘을 다해 강화를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종의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통분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한 도 백성들의 피땀 어린 곡식을 온통 실어다가 보잘것없는 한낱 오랑캐 놈의 탐욕을 채워 주고 마침내 그놈의 배신과 모략으로 이렇듯 참화를 입었으니 이 어찌 조세를 삭감하여 장수에게 돌려줌만 하겠습니까."


 강항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조선 조정의 실정에 울화가 치민다. 바로 코앞에 있는 대마도 종의지란 놈의 간계로 국토가 유린되고 죄 없는 수만의 백성이 목숨을 잃고 초주검이 되었으니 어찌 분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과 같은 용장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하여 그나마 전세를 뒤집고 왜적을 물리 친 일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떠 오른 생각으로 우리나라 임금이나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이 만일 대마도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우리나라로 편입시켰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조금만 생각이 깊었다면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50Km 정도이고 지도를 보면 일본 본토는 부산보다 훨씬 멀다. 지리적으로는 우리나라 땅으로 하기 쉬운 곳이다.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오래 전부터 가까운 우리나라로부터 곡식을 받아 살았고 오래 전부터 우리 해안에 출몰하여 분탕질도 하여 한 때는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마도주에게 벼슬을 내리고 교역을 허락하는 등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강항선생이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선조 임금에게 올린 글을 보면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적국이지만 우리도 본받고 따를 만한 내용을 명쾌하게 밝혔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귀 기울일만한 의견들이어서 선생의 혜안과 충절에 머리가 숙여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선학자들의 선비정신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한다. 선생은 귀국 후 자신의 포로경험을 글로 써 <건차록, 巾車錄>이라 하였다. 그러나 건차는 원래 죄인을 태운 수레로 자신이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하여 죄인이라는 뜻이었으나 선생의 후학 윤순거(1596~1668)은 건차록을 간양록으로 바꿔 펴면서 발문을 지었다. 이런 책을 한 번 읽고 지나칠 책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짧은 시간에 400년 아득한 지난 시절로 돌아가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사상과 가치관을 엿 볼 있는 소중한 기록을 담은 책을 만난 것에 행복을 느낀다. 책이란 이래서 어디에 비할 수 없는 정신적 양식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