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진술>을 읽고...

깃또리 2018. 10. 8. 10:46

<진술>을 읽고...
하일지
문학과 지성사
2016.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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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하게 1998년 내가 <문학의 이해>라는 책을 읽던 중 '포스트 모던' 문학의 흐름에 대하여 요령부득한 이해를 하다가 소위 당시 포스트 모던 계열이라는 하일지 작가의 <경마장 가는 길>이란 소설을 읽었다. 오래 되기는 하였으나 당시 나는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하고 단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과 새로운 조류의 글쓰기라는 생각만 하였다. 하일지 작가는 <경마장 가는 길>이후 소위 ‘경마장 시리즈’라 할 <경마장 네거리에서>, <경마장을 위하여>, <경마장에서 생긴 일> 등을 발표 한 걸로 알고 있다. 나는 실험적인 소설에 큰 관심이 없어 더 이상 다른 책은 읽을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주 누군가가 도서관 서가에서 뽑았다 그냥 둔 책이 장석주씨가 쓴 <장석주 비주류 본능>이였다. 장석주씨의 문학 비평이 포함 된 산문집으로 앞 페이지 몇 장과 중간쯤 몇 페이지를 읽었는데 독자가 묻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글에서 국내 작가들에 대한 자신의 평을 적었다.


 대표적으로 이문열씨는 ‘초기 빛나는 작품을 썼으나 후반에 들어 정치색에 물들고 작품성도 떨어져 과분한 대접을 받는 사람’이라 평가하였다. 서정인의 <모구실>,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 하일지의 <진술> 같은 책이 왜 독자들이 알아보지 못 하는가 반문하였다. 몇 페이지 뒤에 자신의 안성 시골생활을 소개하면서 서정인, 하일지 등과 같은 작가들과 친하게 지내며 함께 여행도 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와 조금 실망하였다. 왜냐면 장석주씨가 인간적으로 마음에 맞는 작가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문학 비평가가 공개적으로 작가에 대한 친분관계를 밝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 비평가는 친소관계에 따라 객관적이어야 할 비평이 달라져서는 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장석주씨가 앞세운 사람들의 책을 읽기로 하고 세 권을 서가에서 뽑았다. 그러나 장석주의 산문집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진술>은 역시 실험소설까지는 아니지만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놀로그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한 사람의 진술이다. 진술이란 어휘 자체가 법률과 관련된 용어로 이 책의 진술자는 국내 국립대학교 철학교수로 경찰서에서 수갑을 찬 상태에서 자신은 엉뚱한 살인누명으로 붙들려 왔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첫 부인과 잠시 살다가 뜻이 맞지 않아 헤어졌으나 정식 이혼을 못한 상태에서 예술 고등학교 선생으로 일할 때 만난 국악과 여학생 김유리와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끌려 동거를 시작하였다. 진술자는 박사학위를 위해 유럽으로 김유리와 함께 건너가 경제적으로 혹독한 고생을 겪었으나 사랑으로 이겨내고 성지순례를 빌미로 찾아온 전처는 행패를 부린 다음 서울로 떠나기도 한다.


 고생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국립대학교교수가 되었으나 복수심에 불타는 전 부인은 교수를 파멸시키려고 이혼도 거부하며 두 사람을 괴롭혔으나 이를 잘 참고 견디었다.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설에서는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면 김유리는 28살이고 교수는 40세 정도인 시기로 추측된다. 결혼 10년 아니 동거 10년을 뜻 깊게 하기 위해 교수는 임신한 아내 김유리와 해안가 호텔에 예약을 하였다. 그 호텔은 예전에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보냈던 곳으로 전에 묵었던 같은 호실에서 잠든 김유리를 두고 혼자 산책을 나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정신과 개업의사이며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처남을 원장실에서 아령으로 머리를 쳐 살해한 죄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처남을 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고 죽일 이유도 없다고 구구절절 진술한다. 더구나 임신한 부인이 이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라고 경악할까 전전긍긍한다.


 결론을 이야기 한다면 8년 전, 즉 유럽 체류 중에 김유리는 사망하였으나 남편인 교수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김유리가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냈다. 소설에나 있을 법한 말이지만 김유리의 죽음 이후 3년 더 공부하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교수에 임용되고 나서도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인 처남은 교수가 미몽에서 깨어나 현실 인식을 하도록 노력은 하였으나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 처남의 미온적 태도가 오히려 교수의 의식을 깨우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교수는 처남을 이중성을 지닌 사람이라 비난하고 더 나아가 처남의 허상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으로 처남을 살해하였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끝까지 아내 김유리의 죽음을 믿지 않는 주인공은 보이지도 않는 아내를 향해 이렇게 소리친다. "아! 그런데 저게 누구죠?  저건 내 아내가 아닙니까?  어떻게 알고 아내가 여기까지 찾아 온 거죠? 그야 어쨌든, 당신들 이제 똑똑히 보세요. 저기 저 여자가 바로 제 아내입니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런 생각을 하였다. 물질문명은 점점 풍요로워졌지만 인간과 인간의 유대는 약해지고 사회가 고도화, 정밀화 되었지만 인간은 파편화되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같은 인간 군상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변을 둘러보면 부모, 부부, 형제, 자식과 서로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만인은 만인의 적이 되는 세상으로 치닫고 있다. 친족 사이가 이럴진대 동료, 친구 사이는 더욱 그러하고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어두운 소식들이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런 불행한 상황을 바꿀만한 대안은 당분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우울한 마음을 거둘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