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부초, 浮草>를 읽고...

깃또리 2018. 10. 4. 09:34

<부초, 浮草>를 읽고...
한수산
민음사
2016.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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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이유였는지 한수산의 장편소설 <부초>를 오래 전에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읽어 볼까 하여 도서관 서가 앞에서 앞 페이지를 열어보고 난 다음 다른 책과 혼동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내가 어디엔가 적어 놓은 일도 있지만 내가 20대 힘든 지방 근무시절 짧은 단편소설조차 읽지 못하다가 서울시내 현장 근무를 시작하면서 책을 읽기로 마음을 정하고 첫 번째 손에 든 책이 박석무씨가 엮은 정약용선생의 글인 <茶山 散文選>과 두 번째가 한수산의 <이별 없는 아침> 장편소설이었다. <다산 산문선>을 읽으면서 가슴 뛰는 흥분과 재미를 느꼈다. 그 동안 교과서에서 배우거나 듣지 못했던 조선시대 왕과 신하 사이의 관계라든가 조선 선비들의 생각 그리고 당시 조선사회의 생활상이 손에 잡힐 듯하였다. 그러나 한수산의 소설은 치기어린 사랑 놀음처럼 느껴져 귀한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즈음 나는 이청준씨의 소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가 1985년쯤이다. 이제 30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고 다시 한수산의 소설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고 그 당시 내가 너무 일찍 속단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수산은 1946년 강원도 인제에서 초등학교 교사 아버지 밑에서 두고 태어났다. 춘천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4월의 끝>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77년 <부초>를 발표하여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1981년 중앙일보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면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가볍게 야유한 것이 문제되어 소위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1988년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다. 일본에서 돌아 와 1997년부터 세종대학교 국문학교수로 재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한수산의 문체는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며 묘사가 치밀하여 한 때 소위 '한수산류'라는 말이 회자 될 정도였다. 내가 읽은 민음사판 <부초>의 책 뒤 조성만씨가 쓴 '작품해설'에 보면 "만약 우리가 문장만을 중심에 놓고 한국소설사를 기술해야 한다면, 스타일리스트 한수산은 당연히 이태준(1904~), 김승옥1941~), 김훈(1948~) 등의 작가와 함께 높은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세 사람 중에서 김훈씨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여서 모든 글을 읽었고 김승옥씨의 작품도 몇 편 읽고 좋아하는데 이태준의 이름은 알고 있으나 아직 작품을 읽은 적은 없어 곧 찾아 읽어 볼까 한다. 아무튼 한수산의 작품 한 두어 편을 읽고 산뜻한 문체는 탁월하지만 내용에 깊이가 없다고 치부해버렸던 예전의 내 생각을 이젠 바꿔야겠다.


 부초는 부평초라고도 하며 원래는 물 위에 떠서 사는 풀인 ‘개구리밥’이 대표적이며 사람에게 쓸 때는 의지 할 데가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를 비유적으로 이른다. 이 소설은 50명 가까운 '일월곡예단' 사람들의 사랑과 애환을 그린 작품이다. 내가 어릴 적 곡마단[曲馬團], 곡예단[曲藝團] 서커스단이라 하는 떠돌이 연예단체의 이름을 자주 들었고 나도 몇 번인가 이들의 연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주로 읍이나 면 소재지의 빈 공터나 어떤 때는 수확이 끝난 밭이나 논에 긴 장대를 세우고 휘장과 천으로 지붕을 덥고 색색의 깃발을 나부끼며 요란한 트럼펫 소리로 관객을 불러 모았다. 곡마단이란 명칭으로 보아 처음엔 말과 함께 묘기를 보이다가 점차 길들인 원숭이, 곰, 사자, 코끼리 등이 사람과 함께 공연하며 그네타기, 접시돌리기, 줄타기, 마술 등이 단골 프로그램으로 발전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곡마단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부분은 이렇다. "곡마단이 부산에 처음 들어온 게 일천구백십년의 일이었으니 그게 바로 일본의 데라우찌란 자가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도록 강압한 때거든. 그때 조선 땅에야 무슨 구경거리가 있었나. 개화풍물로 들어온 곡마단이 그래서 숱한 돈을 벌었던 거고, 나라 빼앗기고 세월 잘못 만나서 맘 잡지 못하고 살던 사람들에겐 한동안 큰 구경거리였지. 서커스가 이 땅에 처음 말뚝을 박은 것은 1911년 5월 1일, 일본의 '고사꾸라' 곡예단이 부산에서 공연을 가지면서였다. 이때까지 흥행의 대종을 이루었던 사당패는 개화의 물결에 밀려 이미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조선의 사당패가 곡예단에 의해 밀려나면서 '이 내 손은 문고린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이 일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빨고 저놈도 빠네.' 몰락해 가던 여성 사당패의 자탄가가 보여주듯 이들은 몸을 팔면서 그 말년을 보냈다. 공연이 한창 무르익을 때 구경꾼이 입에 돈을 물고 서 있으면 여사당은 입술을 갖다 대고 입으로 이 돈을 받았다. 해웃값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사당패와 달리 정재인패는 강도질을 해서 돈을 벌었다. 고려 말 노국대장공주가 시집올 때 데려온 재주꾼이 원도라고도 하는 정재인패는 처음에는 탈을 쓰고 흥행을 했지만 몰락 과정에서는 마술이나 코미디를 주로 보여주었다. 구경꾼이 없으면 강도짓을 주로 했던 정재인패와 사당패가 모여서 ‘재인놀이’라는 흥행유형을 만들어낸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달리 이렇다 할 구경거리가 없던 시대라 만화경에서부터 요술이나 곡예 등 천박한 흥행업자가 판을 치게 된 것도 시대적 변모에 따른 흥행시장의 불모성에 그 뿌리를 박고 있었다. 1901년의 일본 영사관 습격사건도 청계천에서 공연을 하던 요술쟁이에게 조선 돈을 훔쳐간다면서 한국 병정들이 난장판을 부린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 즈음 구경거리의 불모지에 뛰어들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통감정치와 더불어 대규모 흥행집단을 끌고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선을 보인 서커스는 그 새로운 형태면에서도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서커스는 십여 개의 단체가 한반도와 만주까지를 오르내리면서 그 펄럭이는 천막을 올렸다. "진짜 호경기야 만주사변을 지나면서가 아니겠습니까. 만주사변을 일으켜놓자 그쪽에서 구경꾼을 잃어버린 왜놈들이 조선 땅을 찾아들었던 거죠. 그쪽에선 그맘때 벌써 영화가 판을 쳤다지만 우리네야 명절 때 모를까 어디 큰 맘 먹지 않고는 우미관이나 조선극장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준표의 눈이 가늘어진다. 서커스에서 몸담아 지나온 영욕의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가고 있었다. "그랬지. 아리다니 기노시다니 하는 곡마단이 서울에 올 때면 얼마나 화려했는가. 파고다공원 옆은 단골장소였지. 규모도 대단했고, 만주공연을 가면 또 어땠나. 남부여대해서 이불보따리에 바가지 하나 올려놓고 고국산천을 떠난 사람들이 공연 끝나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향소식을 묻지 않던가. 자넨 그때 뒤쪽 포장을 칼로 그어서 개구멍을 만들어놓고 몰래 아이들이 들어오게 했었잖아." "그랬습죠. 조선 애들이 구경은 못하고 천막 밖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 게 싫었더군요. 원 기억력도 좋군요. 난 다 잊어버렸는데......" 점차 서커스가 이 땅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신술(神術)이나 마술 그리고 신파연극이 곁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장비와 인원을 동원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관객을 불러들일 수 없다는 시장의 왜소함 때문에 규모가 차차 축소되면서 서구에서 유입된 흥행 단체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들었다."(중략) P-250~251에서 발췌


  위 글에서와 같이 세월이 조금 지나 곡마단은 곡예단, 서커스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5년 해방 이후 큰 대도시를 제외하고 읍이나 극장이 없고 빈번한 오락시설도 없어 이런 단체들의 인기가 높아 여러 단체들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극장이 늘어나고 TV의 보급으로 이런 오락단체는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수년전 어느 신문기사에 우리나라 마지막으로 남은 유랑극단인 '동춘서커스 단'을 살려야 한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지금도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나 하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다. 작가는 일부러 물 위에 떠 있는 개구리밥처럼 등장인물들이 한데 어울려 떠도는 군상으로 보고 모두에게 골고루 시선을 보내 시각적 이미지도 부초에 어울린다.


 그래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단원들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37살의 총무 백명수와 20대 중반 쯤이며 단원들의 리더 격인 줄타기 김하명이다. 김하명과 함께 줄타기 하는 하명의 연인 지혜, 곡예단 주인으로 단장인 김준표는 59세로 비교적 양심적이고 단원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으로 그려지며 소설 후반부 시작쯤에서 중풍으로 몸을 쓰지 못하고 대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요양하지만 끝내 다시 서커스단에 돌아오지 못한다. 단장 다음으로 나이가 많으며 단원들에게 아버지 같은 마술사 오윤재, 해방 이전 만주에서 태어나 마술을 배우고 유량극단을 따라다니기 시작하여 한 때는 좋은 시절도 보내기도 했으나 떠돌이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곡예단에 몸을 담고 있다가 병을 얻어 천막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곡예단 사람들의 손에 차가운 땅에 묻힌다.


 줄타기 김하명은 고아 출신으로 같이 줄타기 하는 20살의 지혜와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지혜가 곡예단 숙소에서 규오에게 겁탈을 당하고 곡예단을 떠나 헤어지게 된다. 그 외에도 삐에로 역할을 하는 난쟁이 칠용이, 통 굴리기 하는 정신아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정신아는 풍기 공연에서 만난 이동일과 하룻밤 사랑으로 아들 석이를 낳았지만 이동일은 유부남으로 함께 지낼 수 없다. 석이는 곡예단에서 자라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어 할 수 없이 아버지 동일과 살게 되고 아들을 못 잊어 석이 엄마는 술로 지내다 어느 비오는 날 촛불을 넘어뜨려 불을 일으켜 곡예단 휘장, 천막 그리고 무대까지 모두 잿더미로 변한다. 사실 불이 나기 전에 단장 김준표의 사촌동생 광표가 단장을 맡아 곡예단은 전과 다르게 갈등이 싹트고 광표를 반대하는 무리와 광표 편을 드는 무리로 나뉘어 곡예단은 불이 나지 않았어도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소설의 전체 내용은 유랑 곡예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하명과 지혜의 남녀사랑, 삐에로 난쟁이 칠용이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 마술사 오윤재의 후배사랑, 통 굴리기 석이네의 자식 사랑 그리고 모두가 부평초와 같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떠돌이 군상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서로서로 의지하고 함께 즐거움과 슬픔을 나누는 동료애를 넘어선 인간애 등이 소설 전편에 흐르고 있어 4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인의 정서와 보편성을 잘 그려낸  작품으로 세월이 지났어도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더욱 한수산의 섬세하고 감성어린 문체가 돋보이는 탁월한 작품이어서 아무 때 다시 읽어도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