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읽고...

깃또리 2018. 9. 18. 16:02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읽고...
이어령 대표에세이
문학사상사
2016. 03. 22.




 "이것이 한국이다"라는 부제가 붙었고,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에세이 칼럼을 묶은 책이다. 햇수로 53년 반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이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일본어, 중국어 그리고 영어로도 번역되어 호평을 받은 책이기도 하다. 초판을 읽은 때가 너무 오래 되어 거의 기억에 지워졌으나 1989년도에 재출간된 신판을 다시 읽다보니 평소에 내가 인식하고 있었던 많은 부분들이 바로 이 책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에 50년이라면 아주 긴 기간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가늠키 어려울 정도의 변화를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이 아직도 읽히는 걸 보면 정신적인 부분은 물질적인 부분에 비하여 변화가 적은 편이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이 책은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지금 이 책의 내용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저자 이어령씨가 30세 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감성과 정서를 잘 짚어 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읽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제 1장의 제목은 "이것이 한국인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다. "이지러진 초가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루나무가 서 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 그리고 잔디, 아카시아, 말 풀, 보리 밭......정적하고 단조한 풍경이다. 우리의 피부 빛과 똑 같은 그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1963년이면 6.25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조금 넘은 시기여서 우리나라 산업시설은 대부분 북한에 산재해 있었으며 그나마 남한에 있던 시설조차 전쟁으로 파괴되어 이렇다 할 공업생산품도 없고 농축산물 생산도 빈약하여 소위 봄철 춘궁기 또는 보릿고개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던 때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최고 엘리트에 속하는 저자의 눈에는 우리 한민족의 여러 부정적인 면이 고스란히 들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책 곳곳에 자조적인 내용이 보이고 우리 민족이 하루 빨리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저자의 지적과 주장이 당시 독자들의 분발심을 일으키고 각성하는데 어느 정도 일조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읽어보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건 아닌가 하는 대목도 다수 보인다.


 우선 일부 눈길을 끄는 부분을 요약해 본다. "'사람 살려'와 영어 'Help me'를 ‘구원과 자주성’으로 대비하여 다 같이 구원요청이지만 사람 살려는 100 퍼센트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으나 나는 이제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너무 주관적이고 근거 없다는 생각이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이 명나라 이여송장군을 만나 "우리나라의 운명은 오직 장군들의 손에 달렸으니 적병을 막아 주시오."라 간청하였고 명나라 장군 40여 명은 조선의 임금이 일일이 자기들을 찾아오지 않았다고 불평했다는 글이 나온다 한다. 즉, '살려 달라'고 하는 남의 나라 임금이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 불문가지라 하였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은 한국의 원조를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붓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경제 원조가 아니라 '먹여 살리는 행위'라고 피차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라 하였다. 당시 저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으나 미국의 원조가 밑바탕이 되어 현재 세계 경제력 10~15위 권 정도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세계 여러 빈민국을 원조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저자의 우려가 기우였음이 다행이다. 이 글의 소제목에 "우리는 천 년 동안 눈을 뜨지 않은 채 잠자고 있었다."라 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말 그대로 우리는 유사이래, 천년 이래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위상이 높은 나라라는 자부심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꿈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귀의 문화와 눈의 문화>에서 색체 언어와 청각언어 대목에서 우리말에서 '푸르다'라는 말은 영어의 'Blue, 靑色'와 'Green, 綠色'을 다 함께 지칭하여 하늘도 푸르고 들판도 푸르다로 표현한다고 했다. 즉, 색체언어는 상대적으로 우리말에서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청각 언어는 풍부하여 예를 들면 잠자는 소리를 영어에서는 오직 'ZZZ'로 나타내지만 우리말은 젖먹이는 '색색', 유치원 다니는 아이는 '콜콜', 아버지는 '쿨쿨' 등으로 표현이 다양하다 하였다. 이를 달리 말하면 "눈은 로고스, Logos, 귀는 파토스, Phatos로 눈은 지성적이고 이성적, 논리적, 능동적이지만 그러나 귀의 문화는 정적이고 감성적, 직감적이며 수동적"이라 하였다. 또 달리 말하면 눈은 과학문명을, 귀는 시적문화라고도 했다. 결국 서양은 과학문명을 바탕으로 선진화를 이루었으나 시적문화는 선진화에 늦었다고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세상은 과학문명만이 인간의 삶을 이끄는 것이 아니므로 크게 낙담할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우리말에서 색체 언어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하였는데 사실 푸르다, 푸르스름하다, 푸르뎅뎅하다, 푸릇푸릇하다, 짙푸르다 등 다양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로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있었다 하며, <백의 시비>라는 소제목의 글을 실었다. 우리나라 풍습이 단지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생긴 것이 아니라 주변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고려시대는 강대국인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흰옷을 입었으며 우리나라 두루마기도 원나라에서 유래하였다 하였다. 임금님의 식사인 '수라'라는 말도 원나라 말이라는 내용이 새롭다. 보통 사람의 식사는 '밥', 어른들은 '진지' 임금님은 '수라'로만 알고 있었는데 원나라 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아무튼 오래 된 책이지만 퍽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