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을 읽고...

깃또리 2018. 8. 2. 09:36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을 읽고...
김훈
푸른 숲
2018. 05. 27.



 외출하려고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면 나도 모르게 탄성과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눈앞에 펼쳐지던 봄꽃의 현란한 향연이 끝나고 이젠 푸르름, 푸르름이 가득한 세상이다. 이글을 쓰는 아파트 7층에서 창밖을 보면 내 눈 높이까지 치솟은 3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고생대 화석에도 나타난다는 은행나무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 가까운 곳의 골프 코스에도 한 그루 있다. 이 우람한 은행나무는 600년이 넘었다하니 나무의 생명력은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간 나는 김훈씨의 문체와 멋진 어휘구사에 끌려 펴낸 책 대부분, 아니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 책을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하고 주저 없이 손에 들었다. 더구나 이 책은 김훈씨가 처음 펴낸 책이라는데 어어 없게 나는 제일 마지막에 읽은 셈이다. 초판 발행이 1989년이고 개정판이 2004년이니 약 20년 전에  세상에 나온 책이다. 표지를 열고 <개정판을 펴내며, 2004>와 <책머리에, 1989>를 읽고 아! 내가 이런 책을 왜 이제야 읽게 되었나? 진작 읽었어야 하는데, 이런 책은 구입하여 서가에 꽂아두고 두고두고 다시 읽을 책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검색했다. 초판은 절판되어 중고도서로 구입할 수 있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도 얼마 후 내 곁을 떠나보내야 할 형편이라 구입할 생각을 거두었다.


 내가 30, 40대 시절에는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랑이고 자부심이었으나 이젠 소유 자체가 짐이 되고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여 소유에서 공유로, 다시 비움으로 생각이 옮겨졌다. 그래서 그 동안 애지중지 했던 물건들이 하나하나 시들해지고 이제 남은 것으로는 그간 수집했던 우표 3천장 정도와 만년필 몇 개 그리고 서가의 책 정도인데 제일 소중한 것이 책 읽고 적어둔 후기 700여개 인 것 같다. 눈에 보이는 물질은 덧없고 오직 기억만이 소중해지는 시기의 나이에 접어 든 것 같아 한편 조금 섭섭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제목은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이지만 실상 내용을 읽어보면 김훈씨가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와 시집을 읽고 쓴 글들이라 책 제목 옆의 '김훈의 시 이야기'라는 부제목이 훨씬 더 어울린다. 김훈씨는 젊은 시절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일하다 40세가 넘어 소설을 쓰고 발표하여 지금은 소설가로 불리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젊은 시절엔 시를 좋아하고 시를 깊이 음미하고 해석을 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일 먼저 <시로 읽는 가을>은 서해, 동해, 섬진강, 을숙도, 김제 만경평야, 무등산, 목포, 경주, 제주를 직접 찾아 자신의 느낌과 감상을 적고 이 지역에 관련된 시인과 시를 소개하였다.


 <섬진강에서>는 시인 고은씨와 김필곤 시인의 시가 나온다. 올 초 ‘Me Too’ 여파로 해외에서 귀국하지도 못하고 교과서에 실린 시도 삭제되는 수모를 당하는 고은씨의 처지가 민망하고 뭐라 말하기 어렵다. 김훈씨 또한 약간 가부장적이고 마초기질이 강한 사람인데 고은시인의 이런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약간 궁금하다.


 <여름과 시>에서도 많은 시인이 등장한다. 첫 번째 글에서 이근배, 박남수, 황지우, 유치환, 이태수, 황지우, 천상병 시인들의 '새'를 주제로 한 시를 소개하면서 본인의 느낌을 적었다. 산, 바다, 섬, 강, 소, 풀과 관련한 시인과 시를 이야기 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말에서 우리 인간과 가장 친근하고 삶에 영향을 크게 주는 자연과 동식물의 이름 즉, 명사는 대부분 한 음절이다. 자주 부르고 어린 아이 조차도 쉽게 기억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쉬운 단음절로 이루어진 것 같다. 이 이외에도 해, 달, 물, 빛, 비, 흙, 땅, 별, 꿈, 돌 등이 모두 단음절이다.


 마지막은 20명의 시인들이 펴낸 시집에 대한 김훈씨의 글이며, 이 <시집기행>을 쓰게 된 연유와 자신의 짧은 소회를 밝혔다. "나는 한 시집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드러내 보이는 일과 그 시집의 마음과 접근하려는 노력을 나란히 하려 한다. 시사적으로 이미 확실한 의미를 차지한 시집들뿐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역사를 향한 절박한 목소리를 담은 시집들을 따라 가려 한다. 아마도 이 글들이 그 전체로써 하나의 정연한 흐름을 그려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한 시집에 대한 가치 있는 부분문서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작은 것들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나는 빌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시들은 난해하다. 그 이유는 대개 상징, 은유, 비약으로 일반인들이 쉽게 의미를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혹 서정시는 이해가 쉽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강렬한 느낌이 부족하여 곧 시들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시집이나 시에 대한 해설, 평론을 읽으면 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20명의 시인과 시집 제목은 대부분 낯익은 편이지만 김훈씨가 시인과 시집에 붙인 짧은 소제목이 퍽 마음에 들어 그대로 옮겨 보았다. 왜냐면 시인과 시집을 이해하기에 가장 쉽고 의미 있기 때문에 언젠가 이런 시집을 읽게 되면 참고 할까 한다.
 
 
질마재 신화-서정주/원초적 신화와 형이상 세계의 접목
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버림받은 자들의 통곡을 성찰
장자시-박제천/무형의 관념을 유형의 언어로
매장시편-임동환/‘폭력의 상처’ 언어의 힘으로 표출
안개와 불-하재봉/신 없는 사제의 춤
정거장에서의 충고-기형도/오도 가도 못 하는 정거장
화천-김명인/생애화 되는 한 줄의 공백
‘추억’이란 제목의 시가 70편-시인 박재삼
시는 살아가는 이야기일 뿐-시인 김용택
고통보단 사랑을 노래-시인 곽재구
비상을 꿈꾸며 이승을 노래-시인 황지우
시를 ‘일’로 삼는 직업정신- 시인 고정희
미친 거지의 자유- 한산시집
버려진 사람들-김신용/버려짐, 그 구원의 자리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허수경/사나움보다 힘센 아름다움
빈산 뒤에 두고-이성부/적소의 노래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이문재/억압/자유 사이의 삶
김종삼 전집/순수시의 절정
황학주의 시세계/길 없는 세상의 노래
 
 책 뒤편 <발문>은 시인 이문재씨가 썼다. 이문재 시인은 김훈씨와 첫 만남부터 20년 넘는 기간 친근하게 지냈으며 나이로 치면 선배와 후배로 배움으로 보면 거의 사제간의 관계로 함께 지내온 이야기들을 적었다. 김훈씨는 선배들과는 비교적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후배들과는 퍽 친했다 하며 후배들을 사랑하고 또 후배들로부터 존경받았다 한다. 이문재씨는 김훈씨를 좋아하다가 그의 말투나 문체(리듬), 어떤 표현까지 따라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러 후일 이를 극복하느라 힘들었다 한다. 김훈씨의 직업적 철저한 정신을 이야기하면서 김훈씨가 예전 기자시절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에 대하여 몇 줄의 기사를 썼는데 기사 작성 전에 이 시를 백번 정도 읽었노라 했다 한다. <태백산맥> 소설의 관련한 기사를 위해 또 이 소설을 세 번 정독했다 하니 김훈씨는 간단히 말해서 작가 이전에 글 쓰는 사람으로 매우 성실하고 철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훈씨는 어느 직장에서 사표를 내고 집에서 쉴 때를 표현하며, '시간이 달다'라 했다 하는데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그동안 나도 직장을 옮기면서 사이사이 쉬었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왜냐면 이 기간에 해외여행도 하고 마음에 드는 산에도 오르고, 책 읽고 후기쓰기, 산책 등 평소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했으니 말이다.
 
김훈씨가 백번 정도 읽었다는 이성복의 <남해금산>을 옮겨본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 성 복
 
 김훈씨는 기자로 오랜 기간을 보냈고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름 뒤에 독서가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한다. 역시 글이란 저절로 쓰여지는 게 아니라 많이 읽고 생각해야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김훈씨는 후배들에게 "글쓰기는 연주와 같아서 주제에 따라 적합한 박자를 골라야 한다." 라 했으며 <칼의 노래>는 중중모리, 반면 풍경을 모사하거나 관능을 이끌어 갈 때는 진양조에 가깝게 쓰락 했다 한다. 우리들이 김훈씨의 글을 읽고 뭔가 깊게 이끌리는 일은 이 게 다 작가의 치밀한 글쓰기에 따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한 세상을 살면서 주변 후배들로부터 이런 찬사를 듣고 사는 선배라면 가슴 흐뭇할 텐데 실제 김훈씨는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하다.

 끝으로 이 책의 첫 페이지 <서해에서>의 첫 문장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는 한동안 40대 남성들에게 널리 회자되던 인기 높았던 문장이었다 한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첫 페이지를 옮겨본다.
 
 <서해에서>


 “내일이 새로운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거둘 것 없는 자들의 가을은 지난여름의 무자비한 증발작용이 흰 소금의 앙금을 벌판 가득 깔아놓은 서해 남양만의 염전에서 오히려 편안하리라. 소금밭의 가을은 바래고바래서 더 이상은 증발될 것이 없는, 하염없는 말라비틀어짐의 가을이다. 세계가 세계사에 의하여, 또는 문명이나 논리에 의하여 가득 채워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썰물의 서해는 감당할 수 없이 막막한 빈 공간을 안겨준다.”


* 이 책을 다 읽고 어쩐지 오래 전에 읽었던 느낌이 들어서 후기 목록을 들여다보았더니, 2004년에 이미 읽었던 책이다. 아! 14년의 세월이 지나면 한 권의 책을 읽은 기억이 거의 다 지워져 아쉽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망각은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이기도 하여 슬퍼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