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을 읽고...

깃또리 2018. 6. 12. 10:49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을 읽고...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우 옮김
마음산책
2017. 07. 19.


 먼저 표지 뒷면에 실린 줌파 리히리의 간단한 소개를 그대로 옮겨본다. "1967년 영국 런던에서 벵골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곧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드 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 뉴욕시내 컬럼비아 대학교의 단과대학인 바너드 대학(Barnard College of Columbia University)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보스턴대학교 문예창작 대학원에 다닐 때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같은 대학에서 '르네상스 문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첫 단편 소설집 <질병의 통역자, Interpreter of Maladies: 축복 받은 집(한글판 제목)>을 출간하여 그해 오 헨리 문학상과 팬/헤밍웨이 문학상을,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002년 구겐하임 재단 장학금을 받았다. 2003년 출간한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 The Namesake>이 '뉴요커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로 뽑혔고 전미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2008년 출간한 단편집 <그저 좋은 사람, Unaccustomed Earth>은 그해 프랑크 오코너 국제 단편 소설상을 수상했고 <뉴욕 타임즈>선정 '2008년 최우수 도서 10'에 들었다. 2013년 두 번째 장편소설 <저지대, The Lowland>를 발표해 '보기 드물게 우아하고 침착한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이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고 재임 초기 '대통령 직속 예술인문 위원회' 6인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작가가 근래 미국 언론에 주목 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부모가 벵골 출신이라 부모와 함께 살 때 집에서 벵골어를 썼으나 영어로 학교교육을 받아서 모국어가 2개라고도 하고 모국어가 없다. 라 할 수 있다 하였다. 이런 경우의 작가가 몇 사람 있으며 줌파 라히리는 학창 시절 라틴어에 관심이 많고 흥미가 있어 열심히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늦은 나이에 이탈리아어 배우기를 시작하고 아예 이탈리아 피렌체로 이사하여 한 동안 살기도 하면서 글과 말을 익혀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사실 유럽어에서 영어와 이탈리아어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관계가 조금 멀다. 왜냐면 내가 어디에서 자세히 밝히기도 했지만 영어는 독일어가 뿌리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어, 라틴어계통의 어휘가 다수 섞이기는 했지만 어순이나 어휘 그리고 문법 체계가 고대 독일어가 근간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어는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스페인어와 함께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어 영어와 다른 언어 계통이다.


 160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 책은 4~6페이지 분량의 23개의 에세이로 이루어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감히 작가와 나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가 평소 영어책을 읽거나 영어회화에서 느끼고 있는 좌절감, 고통, 기쁨 그리고 성취감 등이 작가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 경험한 것과 비슷하여 동지애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가는 이탈리어로 소설을 쓰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이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겨우 책을 읽을 정도이며 글을 쓸 정도까지는 갈 길이 멀고 기약도 없음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사전>이라는 소제목이 두 번째 에세이다. 외국어를 공부하다 보면 사전이 필수인데 줌파 역시 처음 손에 들었던 이탈리아 사전에 대한 애착을 길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긴 나도 사전 이야기라면 줌파 보다 더 할 말이 많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한사전은 모두 5권으로 이 중에 2권만 내 손으로 서점에서 구입하였다. 이 중에 한 권은 1971년 초판, 1978년 26판 민중서관 발행 <엣센스 영한사전>으로 너무 오래되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막내 동생이 한국외국어대학교 다닐 때 보던 사전으로 동생 학교 이름과 동생 이름이 뒷장에 있다. 아마 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그의 짐을 우리 집에 맡겨 두고 오랫동안 가져가지 않아 내가 두 번째 이집트 카이로에 갈 때 들고 간 거 같다. 카이로에서 2년 동안 영어책을 읽으면서 요긴하게 본 다음 국내로 다시 가져와 사무실을 옮겨 다니면서 나와 함께 하여 지금도 내 사무실 책상에 놓여 있다. 오래 전 출판되어 새로 만들어진 어휘도 없고 겉장도 낡아졌으나 내가 시사 관련보다 소위 문학관련 책을 즐겨 읽다 보니 큰 불편은 없다. 내가 이 사전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줄 동생은 모르고 있을 텐데 언제 만나면 이야기하고 돌려 달라 하면 줄 용의도 있지만 아마 동생 성향에 큰 애착을 느낄 것 같지 않다.


 다시 줌파 이야기로 돌아가서, 줌파는 1994년 생애 처음 이탈리아 피렌체에 갈 계획을 세우면서 보스턴의 '리촐리'라는 이탈리아 이름의 서점에서 포켓 사전을 구입했는데 다른 두꺼운 사전은 집에 두고 보지만 아직도 20년도 더 된 이 낡은 사전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한다. "지금도 휴가나 여행을 떠날 때면 늘 지니고 다니며 (중략)  깜박 잊고 사전을 가져 오지 않으면 불안하고 마치 칫솔이나 갈아 신을 양말을 가져 오지 않은 것 같다."라 하였다. "이제 이 작은 사전은 부모라기보다 형제 같다. 여전히 내게 필요하고 아직도 날 이끌어 준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는 문장이 이 에세이의 마지막에 나온다.


 <번개 맞은 것처럼>에서 줌파가 이탈리아어를 왜 좋아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굳이 이탈리아어를 배울 필요도 없고 이탈리아 친구도 없었으며 이탈리아에 살지도 않았지만 줌파는 "이탈리아어를 갈망할 뿐"이라 했다. 나도 평소 영어책을 보거나 말을 익히면서 결국 외국어는 마지막에 가면 어휘와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가 '어휘와 표현'방식'이라 생각한다. 즉 대강 서로 의사가 통하고 헤어지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더욱 깊고 풍부한 의사 전달이나 문장의 이해는 결국 플로베르가 지적한 '일물일어설'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적확한 어휘 구사가 필수적이다. 줌파도 <사전을 가지고 있기>, <단어 줍기>, <사전> 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탈리아어 어휘를 습득하는 과정의 어려움, 즐거움을 이야기하면서 어휘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다. 줌파는 <일기>, <단편>에서 이탈리아어 습득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여 일기를 쓰고 단편을 썼다고 했다. 우리글이나 영어, 이탈리아어 모든 글쓰기 연습의 한 가지 지름길은 일기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 일기쓰기가  쉽지 않은 일은 초등학교 방학 숙제부터였던 것 같다.


 <불완료 과거>라는 글에서 줌파가 이탈리아어의 어려운 전치사와 관사에 대하여 넋두리를 하고 있다. 사실 나도 영어에서 가장 어려운 네 가지를 관사, 전치사, 단 복수 그리고 시제로 생각하고 있다. 이탈리아어도 그런가보다. 다시 작가는 '근 과거'와 '불완료 과거'의 사용이 혼동을 일으킨다하였다. '대과거'는 알고 있으나 이 두 가지는 처음 듣는다.


<벽>의 첫 문장은 "기쁨에는 고통이 숨어 있다. 뜨거운 열정에는 어둠이 있다."로 시작한다. 줌파가 로마에 거주하였으나 자신의 외모 때문에 어느 가게 점원이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한다.  자신보다 이탈리어어가 훨씬 모자라는 미국인 남편의 외모가 이탈리아 사람과 가깝기 때문에 "남편 분은 이탈리아 출신이신가요. 이탈리아어를 자연스런 악센트로 완벽하게 말씀하시네요."라 했다 한다.  이것이 줌파가 얻을 수 있는 한계였고 벽이었다 하며, "그 건 바로 내 외모였다. 난 눈물이 났다. 소리치고 싶었다. '난 당신들 언어를 미치도록 사랑해요. 남편은 아니에요. 남편은 이곳에 살게 됐기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어를 하는 거라고요. 난 20년도 넘게 당신들 말을 공부하고 있어요. 남편은 2년도 안됐죠. 난 당신들 문학만 읽어요. 이젠 대중 앞에서 이탈리아어로 말 할 수 있고 라디오 방송 인터뷰도 가능해요. 이탈리아어로 일기를 쓰고 소설도 쓰죠."

 화가 나고 창피하고 질투가 나서 가게를 나와 남편에게 이탈리아어로 "Sono sbalordita(정말 황당해)"라고 말하자 남편은 "'Sbalordita'가 무슨 뜻이야?"라 했다 한다. 퍽 재미있는 일화이면서 가슴이 아프다.
 
 작가는 인도에서 태어났으나 콜카타에 가서도 벽을 느끼고 미국인지만 미국에서도 외모 때문에 가끔 외국인 취급을 받으며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하고 이탈리아에 살면서도 무리에 끼워주지 않아 슬펐다고 술회한다. 어릴 적부터 어느 한 집단에 견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소수자의 슬픔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이탈리어를 소유하고자 하는 갈망을 알고 있는 이탈리아 작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가 이런 내용이 포함된 메일을 보내 주었다 한다.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인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문법과 구문이 당신을 바꾸고, 다른 논리와 감정으로 이끌어 줄 겁니다." 이 메시지가 큰 격려가 되었고 작가로서 변신을 꾀하는 자신에게 무한한 힘이 되었으며 인터뷰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에 망설임 없이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라 대답하기 시작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외국 작가들이 대부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시간이 되면 읽어 볼 일이다. 줌파는 자기 스스로 영어로 쓴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 영어권 독자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우려 속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는데 결국 '변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들이지만 작가에게는 진지한 문제였으며 엄청난 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줌파의 글을 읽다보면 문체나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휘'에 무척 관심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페이지 곳곳에 이탈리아어 어휘에 대한 비교와 설명이 나오는데 사실 나도 어휘에 비교적 남보다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퍽 흥미롭지만 영어가 아니고 이탈리아어여서 아쉽기 짝이 없으나 줌파의 이탈리아 글쓰기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끝에서 두 번째가 <공사 가설물>이다. "공사 비계가 침범하고 둘러 열주들, 중요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묵직한 박공" 사실 완공된 말쑥한 건물보다 공사 진행 중인 건물의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가설물, 특히 비계가 거친 재료이면서 일정한 간격과 높이로 서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다. 에세이의 내용은 가설물에 한참 벗어나 있지만 앞부분 가설물 이야기는 평소의 내 생각과 다름이 없어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크게 감명 받지 않았으나 후기를 쓰려고 다시 몇 대목을 다시 읽었더니 새롭게 느껴지고 작가의 깊은 의미가 다시 전해졌다. 이런 책은 구입하여 두고두고 읽어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