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을 읽고...

깃또리 2018. 5. 30. 16:05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을 읽고...
법정

샘터
2017. 12. 06



 ‘70년대 후반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홀로 20년을 지낸 뒤 지금은 강원도 산골 작은 오두막에서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계신다.’라는 소개 글이 책날개에 보인다. 서울 봉은사 ‘다래헌’, 송광사 ‘불일암’ 그런데 강원도의 암자 이름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인터넷 시사상식사전을 열어보았다. ‘수류화개실’이다.


‘1932년 전남해남 출생, 본명 박재철, 목포상고졸업,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3년 수료, 20세에 6.25전쟁을 겪고 22세인 1954년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1959년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다. 2010년 3월 11이 서울 길상사에서 75세로 입적하다.’

 효봉스님을 통도사에서 12년 모셨다는 글이 있으나 효봉스님을 처음 만난 곳은 통영 미래사였던 것 같다. 해남이 고향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학력관계는 처음 알았으며 50년 초에 대학교 3학년까지 다니셨다니 당시로는 전도가 유망했던 청년이 출가하여 중이 된 셈인데 그 배경이 퍽 궁금하지만 어느 글에도 명쾌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사실 고등학교 정도를 마치고 출가하여 꾸준한 독서와 경전공부 그리고 글쓰기로 수필가라 할 정도의 글 솜씨를 갖추었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정규교육의 길을 밟았으며 여기에 더하여 불경과 함께 다른 문학 텍스트를 섭렵하여 글쓰기의 바탕을 이룬 것 같다. 아무튼 법정스님은 글 솜씨와 함께 깊은 사유와 성찰로 삶의 지혜와 경전 내용을 일반사람들에게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하신 분이다.


책 중간부분에 <파멸의 문>이란 장이 나오는데 그대로 옮겨 보았다.

“석가모니께서 슈라바스티의 제타 숲에 계실 때 아름다운 한 신이 한밤중에 나타나 예배를 드린 후 시로써 질문했다 한다.

파멸의 문은 어떤 것인지?


13가지 파멸에 이르는 길을 대답하셨다 한다.

1.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망한다.
2. 나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착한사람을 멀리하며,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을 좋아하면
   이것이 파멸이다. 
3. (아무때나) 잠자는 버릇이 있고, 사교의 버릇이 있고 분발하여 정진하지 않고 게으르며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은 파멸한다.
4. 자기는 충족하게 살고 있으며 늙어 쇠약한 부모를 돌보지 않으면 파멸한다.
5. 바라문이나 사문 또는 다른 걸식하는 이를 거짓말로 속인다면 이것이 파멸이다.
6. 엄청나게 많은 재산과 귀금속과 먹을 것이 풍족한 사람이 자시 혼자서만 독차지 한다면
   이것이 파멸이다.
7. 혈통을 뽐내고 재산과 문벌을 자랑하면서 자시의 친척을 멀리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파멸이다.
8. 여자에게 미치고 술과 도박에 빠져 버는 족족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이다.
9. 한창 때를 지난 남자가 틴발 열매처럼 불룩한 젖가슴을 가진 젊은 여인을 유혹하고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파멸이다.
10.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에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이다.
11. 술과 고기 맛에 빠져 재물을 헤프게 쓰는 여자나 남자에게 집안일의 실권을 맡긴다면
    이것이 파멸이다.
12. 크샤트리아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권세는 작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이것이 파멸이다.


 석가모니의 말씀은 시대와 장소 즉, 고대 인도와 현대 한국이라는 상황이 달라서 ‘파멸의 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적절하지 않지만 대부분 현재 진행형으로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뜨끔하다. 더구나 대부분의 내용이 여성보다 남성에 관한 파멸이라 원초적으로 인간은 남성이 여성보다 파멸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이 책에서도 어휘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유익하게 생각되어 적어 둔다.


1. 사문(沙門)이란 산스크리트어 슈라마나 Sramana의 속어형인 사마나 Samana를 음역 즉 소리를 따라 적은 것으로 온갖 악을 끊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착한 일에 힘쓰고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가르키는 말이다. 원래는 인도에서 출가자를 총칭하는 말로 썼는데 불교경전에서는 바라문 이외의 출가 수행자를 사문으로 부른다 한다.


2. 야차(野叉)는 산스크리트어 약사 Kyaksa를 음역한 말로 본래는 신적인 존재를 의미했으나 후기에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포악한 귀신의 한 종류로 변했다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이 드신 할머니나 어른들이 마을의 버릇없고 못된 놈을 뒤에서 욕할 때 “야차 같은 놈”이라 하였다. 정확한 의미를 몰랐으나 전후 상황으로 포악하고 나쁜 남자인 줄은 알았다. 이제 보니 그 어른들이 제대로 알고 쓰신 것이라 생각된다. 다양하고 미묘한 차이를 지닌 어휘가 풍부하게 사용되는 것이 모국어의 자랑이라  요즘은 이런 말들을 좀처럼 들어 볼 수 없어 섭섭하다. 이 책의 <익히는 대로 풀린다>에 ‘칠악야차’와 ‘설산야차’라는 두 야차의 대화가 나오고 그 외에도 수많은 야차가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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