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영혼의 모음>을 읽고...

깃또리 2018. 5. 30. 16:01

<영혼의 모음>을 읽고...
법정
샘터
2017. 11. 30.


 법정스님의 수필 모음집이다. 대부분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쓴 글이지만 2001년 새로낸 개정판이어서 일부 내용엔 최근에 쓰는 어휘로 바꾸었고 손질한 덕분인지 오래 전에 쓴 글 같지 않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40년 전 글이다 보니 지난 시대 이야기로 시내버스 ‘여자 차장’이라든가 '고속버스 안내양‘ 그리고 겨울에 ’연탄가스‘에 많은 사람이 죽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러나 법정스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무소유’라는 짧은 수필이 여기에도 수록되어 기쁜 마음으로 다시 읽었다. 나는 원래 <무소유>라는 책제목으로 발행된 수필집부터 시작하여 다른 책까지 포함하여 대 여섯 번 이상 읽었는데 오늘 다시 읽어도 새롭다. 이 책에 나오는 ‘다래헌’을 나는 어느 깊은 산속의 작은 암자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우리 집에서도 가까운 삼성동 봉은사 경내의 작은 건물이다. 불교 사전편찬인가 불경번역작업을 위해서인가 한 동안 서울에 있는 사찰에서 기거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 그 시기인 듯하다.

 당시 봉은사는 말만 서울일 뿐 아직 강남개발 전이라서 거의 산속이나 다름없었다 한다. 오래 전 지난 이야기로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하던 전 직장 선배의 말에 의하면, 4대문 성곽안의 어느 초등학교에 다닐 때 봉은사로 소풍을 가게 되면 아침에 한참을 걸어서 한강변에 닿아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산길을 걸어서 봉은사에 당도하면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한다.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봉은사하면 내게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썼다고 알려진 현판 글씨 ‘판전, 阪殿’을 빌딩 사이의 둥근 달을 올려다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탁상시계>도 잊혀 지지 않은 수필이다. 탁상시계를 도둑맞고 다시 중고시계를 사러 갔는데 바로 잃었던 시계가 있어 다시 돈을 주고 구입하였다는 내용인데 아마 어느 시골 읍에서 가까운 암자에 계실 때 인듯하며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인간의 소리>에서는 결혼하고 애가지 낳아 기르다 출가하여 입산했다가 마음을 돌려 하산한 도반을 만나러 갔을 때 이야기이다.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곁에서 나를 말끄러미 지켜보던 일곱 살짜리 꼬마가 고사리 손으로 내 귀를 잡더니 이렇게 소곤거렸다. ‘우리 아빠 데려가지 마, 응.’ 이 꼬마의 말이 바로 ‘인간의 소리’였으며 너무도 엄숙한 말이었다.” 간단한 몇 줄의 글이지만 그 정경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며 그 사람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다.


 <나그네  길에서> 근대 불교계의 거봉이라 할 효봉스님을 모시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공부할 때 호손의 <주홍글씨>를 읽다 효봉스님에게 야단을 맞고 아궁이에 넣고 태웠다 한다. 며칠 뒤 책의 한계 같은 걸 터득할 수 있었다 하며 “사실 책이란 한낱 지식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 거기에서 얻은 것은 하나의 분별(分別)이다. 그 분별이 부분별의 지혜로 심화되려면 자기 응시의 여과과정이 있어야 한다.”라 했다.   나는 가끔 왜 내가 책을 읽는가? 책은 나에게 어떤 영향과 도움을 주는가? 자문하기도 한다. 스님의 말처럼 분별을 넘어서, 지식을 넘어서 지혜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직도 분별조차도 끝내지 못한 자괴감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효봉스님의 일대기> 1966년에 쓴 글이며 내용 중에 “필자가 은사인 효봉스님을 모시기는 입산한 뒤부터이므로 올 해로 열 두해 째가 된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법정스님은 효봉스님의 제자였고 출가 직후 모시게 되어 훌륭한 스승을 일찍 만난 행운아인 셈이다. 효봉스님은 1888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살에 평안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고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26살에 와세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여 판사가 되었다. 1923년 36세 때 최초로 사형판결을 내린 후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와 자책으로 세 자녀와 아내를 두었지만 모든 걸 버리고 집을 나와 방랑으로 참회의 길을 걷다가 2년 후인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석두스님의 제자가 되어 ‘학눌’이라는 법명으로 스님이 되었다. 1930년 중이 되고 5년 후 깨달음에 닿지 않자 토굴에 들어가 입구를 진흙으로 막아 달라 부탁한 다음 용맹정진으로 1년 6개월 면벽수도를 마치고 오도송과 함께 진흙 벽을 부수고 세상에 나왔다 한다. 효봉스님에 대한 많은 일화와 에피소드가 전해지는데, 동료판사가 절에 왔다가 알아보게 되어 신분이 노출되기도 하고 장성한 아들이 결혼하여 역시 절에 왔다가 얼굴을 보게 되었으나 몸을 틀어 피했다는 이야기 등이다. 또한 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에도 앞장섰으며 엄격한 계율을 추호도 흩트리지 않았고 참선과 교화중생에도 힘을 다했다 한다. 1966년 세수 78세에 열반하셨는데 마지막 말은 “無라... 無라 였는데 눈을 감으시던 날 아침에 시봉하는 스님께 “나 오늘 갈란다.”라 말하시고 “언제쯤 가시렵니까?”라 묻자 “오전에 가지”라 하신다음 아침 10시에 입적하셨다 한다.


 마지막 소제목이 <영혼의 모음>이며 ‘어린왕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법정스님은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무척 좋아하여 틈이 나면 읽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책 선물을 하셨다 한다. 나도 이 책을 한글판을 먼저 읽고 영문판을 두세 번 읽은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법정스님의 글에 영향으로 이 책을 더욱 가까이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한동안 법정스님의 이야기가 자주 언론에 등장하여 약간 반감도 지니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왜냐면 스님이 너무 언론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떠나시고 한 참이 흘러 최근 이런저런 불교에 관련한 사람들이 책을 펴내고 인기를 얻는 걸 보며 비교해보면, 스님의 글은 읽어보면 볼수록 참으로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책을 다시 읽은 일은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