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바리데기>를 읽고...

깃또리 2009. 1. 11. 18:25

<바리데기>를 읽고...

황석영 장편소설

창비

 2008. 10. 25.

 

소설의 주인공 "바리"는 북한의 청진에서 살았으며 나이를 어림 계산해 보면 1983년 쯤 태어났으며  이 소설은 김일성 사망 전후를 시대 배경으로하여  줄거리가 이어지다 소설은 2003년 쯤 끝을 맺고 있다. 바리의 아버지는 당 간부로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잘하며 공산당 물자교역사업부에 일을 하는 덕분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막내 바리까지 일곱자매까지 꼭 열 식구가 다른 집에 비하여 그런데로 잘 지냈다. 바리집은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로 인해 딸 일곱을 두게 되었는데 바리가 태어나자 마자 실망한 어머니는 숲 속에 핏덩이 바리를 버렸는데 집에서 키우던 풍산개 흰둥이가 어느 틈에 집으로 물고 와 제집 안에 두고 품고 있어서 바리가 죽지 않고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런 구박데기로 태어난 상황이라 백일 동안 이름도 없이 지내다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 속의 바리공주와 숲 속에 버려진 일을 연상하여 "던져라 던지데기 버려라 바리데기"와도 상통하여 바리데기의 바리에서 그녀의 이름을 짓게 되었는데 우리말에서 새침데기, 부엌데기, 소박데기 등과 같이 접미사 데기는 주로 부녀자를 낮춰 부르는 말이기도 하며 바리를 발(發)의 연철음으로 보아 광명, 생산의 뜻으로 광명의 공주, 생명의 공주, 소생의 공주로 개념을 확장하는 시도를 저자가 하고 있다.


아무튼  비교적 평온하던 바리 집안에 큰 변화가 온 것은 김일성이 사망하던 해로 외삼촌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였던 바리가 열한 살 되던 때였다. 당국의 의심과 압박이 가해지고 급기야 재산을 몰수 당하여 할머니와 좀 모자라는 여섯째 현이 언니 그리고 바리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잠입하게 되는데 바리를 구해준 흰둥이가 낳은 막내 강아지 칠성이도 먼 길을 함께 하였으나 어머니와 나머지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어느날 불쑥 나타났던 초췌한 아버지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돌아가 소식이 없고 눈 속에서 현이 언니는 얼어 죽었으며 할머니도 돌아가 바리는 혼자 몸이 된다. 아버지와 친하던 중국에서 생활하던 미꾸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바리가 열 다섯살 되던 해 중국 낙원이란 곳에서 한족 샹 언니와 그의 남편 쩌우를 만나 발 맛사지를 배워 일하다 이 부부들을 따라 새로 차린 따렌의 새로운 업소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업소가 문을 닫게 되어 샹 언니와 바리는 밀항선의 콘테이너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영국 런던에 잠입하여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밀항 대가로 진 빚을 갚기 위해서 2~3년간 힘들게 일해야 되는데 바리는 처음에 중국집 식당에서 식기 세척과 청소 등 허드래 일을 도맡아 하다가 성실하고 부지런함을 인정 받고 눈썰미가 있음을 알아 차린 주인에 의해 통킹이라는 손톱 미용업소에서 발 맛사지 서비스 일을 하게 된다. 남다르게 바리는 고객의 발을 쥐게 되면 그 사람의 지나온 과거를 연상하는 보통 사람과 다른 능력을 가졌고 또한 혈을 잘 짚어 맛사지 하는 재주로 단골 고객도 늘어나 방글라데시 언니인 루나와 합숙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다.


소설은 이 대목에서 바리가 거처하는 런던 변두리 지역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즉 램버스 구역의 연립주택으로 관리인은 파키스탄 출신으로 모슬렘인 압둘 할아버지이며, 주유원과 파출부인 나이지리아 흑인 부부, 중국인 요리사, 핀리핀 청소부, 인도식당을 하는 스리랑카 가족, 집수리업을 하는 폴란드인 가족 등 대부분 비자없이 밀입국하여 불안한 지위로 영국의 최하층을 이루며 생활을 하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다.

바리는 아프리카 출신의 고객 사라 아줌마를 통하여 켄징턴 홀란드 파크 부근 대저택에 살고 있는 에밀리부인을 출장 서비스하면서 그녀의 지나온 일을 알아 맞혀 신통한 영매로 인정을 받기도 하며 수입을 늘리기도 한다. 한편 압둘 할아버지 집에 놀러오는 손자 알리와 바리는 친하게 지내다 서로 사랑하게되고 결혼식을 치른다. 알리는 미니 켑 택시 기사인데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 사건 이후 동생 우스만이 파키스탄으로 간 후에 소식이 없자 알리는 동생을 찾아 파키스탄으로 떠난다.

 

19살이 되던해 바리는 남편 알리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딸을 낳고 압둘 할아버지는 자유라는 의미의 홀리야라는 이름을 손녀에게 붙여준다. 바리는 백두산 자락 야산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꽃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아기 이름을" 홀리야 순"이라고 부른다.

어느날 몸과 마음이 망가질데로 망가진 따렌에서 같이 런던에 밀항했던 샹 언니가 나타나 아기가 함께 지내며 재워 주는데 길 건너 빨래방에 돌아와 보니 옷장 밑까지 뒤져 비상금을 훔쳐 달아나고 계단을 기어 오르던 아기는 밑으로 굴러 떨어져 죽어 있었다. 참담한 심정의 바리는 알라를 돈독하게 믿는 압둘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무런 악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신은 왜 저에게만 고통을 주는 거예요? 믿고 의지한다고 뭐가 달라지죠?"  "신은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는게 그 본성이다. 색도 모양도 웃음도 눈물도 잡도 망각도 시작도 끝도 없지만 어느 곳에 나  있다. 불행과 고통은 모두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거야. 우리에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우여곡절이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 이겨내야 하고 마땅히 생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게 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란다." 계속해서 압둘은 이렇게 말한다. "아내와 딸들이 총살당하고 잠무카슈미르를 떠나면서 나는 너와 똑같이 신을 원망했다. 어째서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그런데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 거란다.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린다."

 

며칠 지나 심리적 안정을 되찾은 바리가 압둘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세상을 구해낼 생명의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요? 그걸 얻을 수만 있다면......" 그러자 압둘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 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얼마 후 샹이 약을 먹고 창문에서 거리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소식을 듣고 바리는 샹이 어려울때 자신의 앞가림에 지쳐서 그녀를 한번도 찾아가본 적도 없고 도울 생각을 하지 않은 일들을 후회한다. 2년의 세월 흐르고 바리가 21살 되던해 쿠바의 관따나모 수용소에서 풀려나온 알리가 돌아 오고 새로 아기도 갖고 이들은 샌드위치와 케밥을 파는 작고 예쁜가게를 차렸다. 한동안 평온하였으나 어느날 부부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은 테러현장을 목격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소설은 끝나고 있다.

 

나는 황석영의 소설<바리데기>를 오래 전부터 읽어 보려하였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를 읽은 후 <바리데기>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이지만 황금물고기와 바리데기는 여러가지로 공통점이 많았다. 첫째, 소설의 주인공인 라일라와 바리데가가 어린 소녀들로 나이도 비슷하였고 둘째,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생활하는 과정도 똑 같았으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도 비슷하였다. 또한 우라나라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인 황석영씨도 아직 노벨 문학상을 타지는 않았지만 매년 후보자로 이름이 거론되기 때문에 노벨상과 인연이 아주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여튼 우리나라의 많은 문학작품들이  외국어로 번역 되어 다른 나라에 널리 소개되어 어느날 노벨상을 받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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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동안 메스컴을 통하여 관따나모를 여러번 들었으나 그저 무관심하다가 바리데기에 나오는 강제 수용소인 쿠바의 관타나모에 대하여 갑자기 의문이 일었다. 왜 하필 미국과 사이가 오래 전부터 좋지 않은 쿠바의 관타나모가 국제 테러범 수용소가 되었는지?

 

관따나모는 쿠바에 있는 미군기지.
현재의 쿠바와 미국과의 관계를 보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관타나모는 역사적으로 100년이란 긴 세월을 가진 곳이다.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미군의 해외기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지로 쿠바 섬 남동해안에 위치해 미 해병대가 관할하고 있다. 1백60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미군과 군속, 가족 3천여명이 살고있는 쿠바속의 미국이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중 이 땅을 차지했으며 1903년 매년 금화 2천개(당시 가치 약 4천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이곳을 쿠바로부터 빌렸다. 지금도 미국은 매년 임차료(rent) 명목으로 약 4천달러를 쿠바정부에 지급하고 있는데 쿠바정부의 기본입장인 '기지철수'는 확고하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기지를 유지하겠다고 밝혀 카스트로의 반발을 샀고 1962년 쿠바미사일위기 때에는 병력이 증파되기도 했다. 현재는 철조망, 선인장으로 둘러싸인 27km 접경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아이티와 쿠바 난민 수천명이 수용된 적이 있는 이 기지의 존폐여부는 미국의 대쿠바 경제제재 조치와 함께 미국과 쿠바 사이 관계개선 조짐이 있을 때마다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떠오르곤 했다. 한편 카스트로 정부는 미국의 포로수용소 건설과 이용에 대해 현재까지 묵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도 관타나모는 아주 낯선 지명은 아니다. 그 이유는 학생 때 누구나 한 번은 배우고 불러보게 되는 노래 <관타나메라>가 바로 '관타나모의 여인'이란 뜻을 지닌 노래였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쿠바의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가 전래 민요에 시를 붙인 것이다. 관타나모가 서양인들에게 최초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494년 4월 30일 콜럼버스가 관타나모만에 상륙하면서였다. 그는 이곳을 중국의 일부로 여기고 황금을 얻고자 했지만 포기하고 이곳을 떠났으나 관타나모는 카리브해의 악명높은 허리케인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로서 신대륙을 찾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관타나모가 군사적인 요충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741년 멕시코의 산티아고 장군과의 전쟁을 위해 영국의 웬트워스 장군이 이끄는 3,000여명의 영국군인들이 이곳에 상륙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이곳이 다시 스페인에서 미국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1895년 무렵 쿠바에서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독립 혁명의 열기가 분출되기 시작하자 그 전부터 쿠바의 가치에 눈독을 들여온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미국의 언론은 쿠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열기를 지지하는 논조의 기사와 더불어 스페인의 압제를 보도했으며 1840년대 자신들이 주장했던 '명백한 운명'에 대해서도 다시금 언급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쿠바에 있는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함 메인호를 쿠바 아바나항에 정박시켰다. 그런데 이 메인호가 의문의 사건으로 격침되고 만다. 훗날 이 사건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미국이 스스로 벌인 일임이 밝혀진다. 1898년 4월 11일 미국의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은 하바나항에서 일어난 원인 미상의 미 군함 폭발사건을 빌미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고 같은 해 6월 10일 미 해군 1개 대대가 관따나모에 상륙해 기지를 건설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운 '미·서 전쟁'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미국은 쿠바와 필리핀을 사실상 식민지화 할 수 있었고, 일본과는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승인해주었다.

1903년 2월 23일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관타나모 기지 임대에 관한 계약을 쿠바와 체결했고, 이 기지는 현존하는 미군의 해외 기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때부터 20세기 전반기 동안 관타나모는 미국이 중남미 전략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이 기지의 중요성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이 기지를 방문하고 장병들을 격려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18일 관타나모 기지는 '미합중국 해군기지(United States Naval Base, Guantanamo Bay, Cuba)'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매우 순조로왔다. 그러나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들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미국과 쿠바의 관계엔 결정적인 금이 가고 만다. 혁명이 성공한 뒤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쿠바군 사이에는 긴장이 흘렀고, 기지 주변엔 28마일 철책이 둘러쳐졌다. 이전까지는 자유롭게 출입하던 쿠바인들의 미군 기지 출입이 통제되었고 서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미국과 쿠바 사이의 국교 단절된 이후에도 관타나모 기지는 계속 유지되었다. 관타나모 기지에 최고의 긴장감이 흘렀던 것은 1962년 10월에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다. 미국은 즉시 관타나모 기지에 해병 2개 사단을 증파했고, 1964년엔 쿠바측이 기지에 물공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미국은 매년 금화 2,000개(약 4,085달러)의 기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미국이 원할 때까지 기지를 이용한다는 계약을 맺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달도 아닌 일년 사용료가 불과 4,000달러라니 어지간히 불평등 계약이다. 영화 <어퓨굿맨>에서 미군과 쿠바군 사이의 긴장은 이런 배경을 두고 있다. 이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관타나모 기지의 중요성도 많이 떨어져 한때 500명 정도의 군인이 주둔하는 사격훈련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로잡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포로들이 이곳에 억류되면서 세인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들을 경비하기 위해 다시 1,000여명의 미군이 증파되었고, 특히 1월 중순 이들 150여명이 수용된 ‘캠프 엑스레이(X-Ray)’에서 전쟁포로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비인도적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서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인권단체들과 유럽 각국의 인권 비판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미군이 포로로 잡은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가혹행위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관타나모 수용소는 강대국 미국의 인권사각지대로 남아 민주국가의 수치스러운 장소로 불리워져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는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를 결정하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