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고...

깃또리 2008. 8. 18. 14:28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As I lay dying>를 읽고...

William Forkner(1897-1962) 지음

김명주 옮김

민음사

2008.08.02.

 

1897년 미국 미시시피주 뉴올버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윌리엄 포크너는 옥스퍼드 고등학교를 다니다 자퇴하고 부기사무실, 서점, 전기발전소, 우체국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30세에 첫 소설 <병사의 월급 Soldiers' Pay>를 출간하였다.

포크너는 실험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여 미국의 제임스 조이스로 불리며 특히 다양한 관점의 서술구조를 즐겨 사용하는 작품 특성으로 조금 난해하고 복잡하여 미국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쉽게 읽혀지지 않고 기피되기도 한다.

그러나 상징과 심오한 내용에 비하여 아름다운 문체와 서정성을 갖춘 그의 소설은 시간이 갈수록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1948년 미국예술원회원에 피선, 1950년 노벨문학상, 1954년 내셔널 북 어워드와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으며 1960년에는 버지니아대학 교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3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였으나 대표작으로는 <음향과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As I Lay Dying ><8월의 빛 Light in August ><한 수녀를 위한 애가 Requiem for a Nun ><우화 A fable ><압살롬 압살롬 Absalom Absalom ><성역 Sancturary >등을 꼽을 수 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15명의 등장인물의 독백을 59개의 장으로 나누어 구성한 특이한 서사구조로 “이 소설은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아니면 나를 거꾸러뜨릴 것이다.” 라고 작가가 스스로 평가한 실험정신이 뚜렸한 야심작이다.

 

작품의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 앤스와 결혼 후에도 휘트필드 목사와 불순한 관계로 아들 셋을 출산하여 죄책감으로 사는 아직 젊은 아내 애디 번드런은 죽음에 가까워지자 40마일 떨어진 어릴 때 살던 제퍼슨에 묻히길 바란다.

남편과 아들 넷 그리고 딸 하나 모두 여섯 명은 도중에 홍수로 인한 강의 범람과 하룻밤 지내던 잠자리의 화재 등 힘든 고난 속에 애디의 관을 실은 마차와 함께 열흘간의 기나긴 여정 끝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녀를 매장한다.

딸 듀이 델은 목화밭에서 같이 일하던 레이프와 성관계를 맺었으나 17살의 순진한 시골 처녀로 당시 금지된 낙태 수술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소설에서 여러 사람 독백에서 주요한 대목은 책의 중간을 지나 애디의 친구인 코라, 애디 그리고 목사 휘트필드 세 사람의 독백이 차례로 나오는 부분이다.

 

먼저 코라는 애디의 부정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에 충실한 그녀는 애디에게 “죄 짓지 않은 백사람보다 한 사람의 죄인이 하느님이 더욱 기뻐하신다.”라고 말하며 속죄를 권하자 애디는 “하루하루 나는 나의 죄악을 깨닫고 속죄한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코라는 “무엇이 죄고 죄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것은 하느님 몫이지 당신 몫이 아니에요. 하느님이 아니라 당신이 죄악과 구원을 결정한다는 것은 오만이에요.”

즉, 코라는 인간의 죄는 신만이 구제할 수 있으며 믿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은 사람이며 이와 다르게 애디는 인간 스스로도 죄악을 속죄하면 구원에 다달을 수 있다는 종교관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애디는 자신의 독백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죄가 단순히 말의 문제인 사람에게는 구원도 단지 말에 불과했다.”

그리고 애디는 죽은 아버지가 하던 이야기를 다시 회상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애디는 남편과 사이에서 딸 듀이 델과 막내아들 바더만을 낳은 후 이제는 자신의 죄를 속죄했다고 판단하여 죽을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목사 휘트필드의 독백이 나온다.

애디가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자책으로 고통 받던 그는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결심으로 떠나지만 애디가 죽기 전에 발설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이중적인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홍수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도중에 애디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안 목사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용서로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오, 하느님. 죄를 범했습니다. 당신은 제가 얼마나 뉘우치고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제 영혼이 속죄하고자 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참으로 자비로우시다. 주님은 속죄하려는 제 마음을 이미 받아들이셨다. 앤스가 그곳에 없었지만 내가 용서를 구한 사람이 앤스였다는 것을 하느님은 알고 계셨다. 그녀를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는 그녀의 입술이 우리의 죄악을 발설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무한한 지혜를 지닌, 바로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의 손길이 나를 지켜주는 가운데, 거센 물살의 위험을 겪음으로써 나의 죄악은 용서된 것이다. 주님 풍성하고 전능하신 사랑이여. 오, 찬양합니다.” 라고 말한다.

즉, 목사 휘트필드는 그 동안 자신의 고통과 역경이 속죄로 이어지고 홍수와 애디가 발설하지 않고 죽은 것조차 하느님의 용서로 돌리는 자기합리화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

 

작가는 여기에서 세 부류의 인간성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셈이다.

즉, 철저한 종교적 믿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코라, 자신이 스스로의 행동이 충분히 죄 값을 치렀다고 믿으며 지금까지의 삶이 죽음을 준비하였던 여정이며 오히려 죽음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애디, 마지막으로 외면적으로는 하느님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으나 기회주의자이고 죽음 앞에서도 나약한 목사 휘트필드.

그 밖에도 등장인물들은 각자 어딘지 모자라고 힘없는 모습을 보이며 소설 속에서 다양한 인간성격을 보여주어 우리자신과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소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