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깃또리 2004. 11. 21. 09:49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파트리트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2004. 11. 20.

 

 파트리트 쥐스킨트는 1949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암바흐에서 성장하였으며 뮌헨대학과 엑 상 프로방스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였다 한다.

 젊은 시절부터 여러 편의 단편을 썼으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34세에 "콘트라베이스"를 발표하여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어서 "좀머씨 이야기""향수""비들기"등이 역시 호평을 받았으나 사람 만나기를 극력 피하고 상조차 받으러 나오지 않아 "은둔의 작가"로 알려지고 있는 좀 기이한 인물이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라는 좀 긴 제목의 작품이 시나리오로 영화화 되어 1996년 독일 시나리오 상을 받기도 했다 한다.

 

 나는 "좀머씨 이야기"와 "비들기"라는 작품을 6년전쯤 읽은 적이 있는데 독특한 주제의 글이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깊이에의 강요"는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장 인상 깊고 나와 관련이 있어 두 번이나 읽었던  마지막 편이 "문학적 건망증" 이었다. 평소에 글을 읽고 한 동안 지나면 언제 읽었느냐는듯 까맣게 잊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 점에 착안한 작가의 글이었다. 그런데 똑 같이 경험하는 사실을 이렇게 재미 있고 유쾌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확실히 재능이 풍부한 작가다운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읽어 나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참기 곤란하였다.

 작가가 서가에서 처음 보는 책을 꺼내 읽으면서 자기가 밑줄을 그을만한 곳에 역시 밑줄이 그어져 있고 글에 마음에 들어 감탄 부호를 붙인 부분도 마찬가지이며 여백에 적어 놓은 짧은 소감도 읽어 보니 자기의 의견과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자기의 필체였으므로 언젠가 자기가 이미 읽었던 글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처음으로 보는 책과 같아서 기억이 나지 않아 화가 난다는 말이며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현상이 되풀이 되며 기억력이 더 부실해질 테니 아예 글 읽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탄식을 한다.

 

 사실 나도 마찬 가지이다. 서가에 꽂힌 책을 펴서 읽어 보노라면 전혀 읽지 않았던 내용이며 그런데도 읽었노라는 서명이 책표지 다음 페이지에 있는 걸 보고 절망감이 들 때가 많았다.

작가는 스스로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하여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ㄴ 것이다."

 

 만일 작가의 말이 맞다면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허둥지둥 글 속에 빠져 들지 말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해서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야하 한다." 참으로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작가는 어느 시를 인용하며 독서에 대한 건망증 단편을 마치고 있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단편의 책 제목이기도 한 "깊이에의 강요"는 내용이 대강 이러하다.

어느 촉망 받던 여성화가가 한 평론가의 무책임하게 써댄 "깊이가 없다"는 비평에 깊은 좌절과 우울증으로 결국 작품 활동도 무기력해지고 고뇌하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폐인이 되어 자살한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한없는 나약함, 타인에 대한 비평의 무자비함, 말과 글의 보이지 않는 폭력성을 그리고 이 세상에는 이면에 숨어 있는 비극성등을 짧은 단편에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_끝.

 

 

다른 사람의 독후감-참고

콘트라베이스(The Double Bass)
그의 작은 활동 공간 내에서 사랑하고 존재를 위해 투쟁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이야기. 역할은 중요하나 아무도 그것을 선뜻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평범한 남자의 절망과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 남성 모노드라마의 시나리오로 먼저 쓰임.

 향수(Perfume)
모든 냄새를 맡으나 그 자신은 아무 체취도 없는 사내. 시체로 발견된 스물 다섯 명의 소녀. 지상 최고의 향기를 자신의 체취로 만들어 간 음울하고 무심한 눈을 가진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로 향기로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기상천외한 소설. 세계 최고의 발명에 버금가는 향수를 만들지만 보존되지 않는 '냄새'라는 특성때문에 잊혀져 버린 어느 천재,그루누이의 최후가 작가만의 독특한 '냄새'를 풍긴다. 부제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비둘기(Die Taube)
세상에 대한 불신과 무감각에 빠진 조나단 노엘은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사건, 비둘기의 등장으로 닫힌 마음을 열고 세상을 향해 맞설 용기를 얻는다. 조나단 노엘은 마치 마음 속의 아집에 갇힌 자아의 모습과 같아서 읽는 동안 내내 가슴졸이고 그를 응원하게 된다.

 좀머씨 이야기
한 소년의 눈에 비친 이웃 사람 좀머씨의 기이한 삶을 담담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간 한 편의 동화같은 이야기.
"그러니 나를 제발 좀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치며 자꾸만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려고만 하는 좀머씨의 모습은 가난한 은둔자로서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기이한 삶의 행로를 떠올리게 한다. 읽고 난 후 곱씹으며 생각할수록 새삼스레 세상에 대해 회의하게 만드는 작품.

 깊이에의 강요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문학의 건망증' 네 편의 단편소설과 '......그리고 하나의 고찰'이라는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소재를 토대로 무거운 주제를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다루는 작가 특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일관된 작가 의식을 보여주며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깊이에의 강요'는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 '깊이'가 무엇인지 구현하려다가 좌절하여 자살한 젊은 여류 화가의 이야기. 강요된 예술적 깊이에의 집착과 생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좀머씨 이야기'와 비슷한 뒷맛을 남긴다. '승부'는 체스게임을 통한 승부의 세계를 통해 작은 세상을 보여준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포석과 공격으로 진부함과 관습에 찌든 승부 세계의 허를 찌르는 젊은 체스 선수.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한 성공한 보석 세공업자의 세상 보기이다. 세상은 조개화(석화)의 과정인가? 이 세상은 결국 꽉 닫힌 조개처럼 문을 열지 않고..... '향수'와 연대와 배경이 비슷하다.
'......그리고 하나의 고찰'은 개인적으로 크게 위로가 되었던 작품이다. 나도 화자처럼 읽고는 잊어버리고 또 읽고는 잊어버리고...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읽든지 그 내용이 뇌리에서 깡그리 사라져 우리의 삶에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삶을 일거에 변화시키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에 남아 삶에 면면히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없는 이 문제를 통해 문학이 갖는 의의를 고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