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The Life of Abraham Lincoln" 을 읽고...

깃또리 2004. 10. 24. 16:35

'The Life of Abraham Lincoln 링컨의 일생' 을 읽고...

by Stefen Lorant

 

 

2004. 9.

 

 아브라함 링컨(1809~1865, 56)은 미국인들이 초대 대통령 조지 와싱턴과 함께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맥아더 장군도 야전군 사령관 시절 어디에 자기 집무실을 꾸미던 책상 뒷벽엔 항상 조지 워싱턴과 링컨 사진을 붙여 놓았다 한다.

 

 우리나라에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링컨 이야기가 실린 덕분에 링컨이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켄터키주의 통나무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수십리 길을 걸어 책을 빌려다 보며 혼자 공부하여 결국 변호사가 되고 대통령까지 되었으며 노예해방을 선언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 뒤에 알게 된 일은 길죽하고 볼이 쑥 들어간 볼품 없는 얼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선 구랫나루를 기르는게 좋겠다는 Grace Bedell 이란 11살 소녀의 편지를 받고 미국 최초의 턱수염을 기른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과 아내의 성격이 고약하여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아는 정도였다.

 현재의 대통령 노무현씨도 링컨을 어린시절부터 좋아했다고 하며 전 연세대 교수였던 김동길씨는 링컨을 연구한 링컨전문가로 알고 있다.

 

 1980년이니 벌써 24년 전인데, 읽어 보려고 사 놓았으나 차일피일 미루던 링컨의 일생에 대한 작은 책을 올해 연이어 두번을 읽어보았다. 120여 페이지 되는 작은 책이었지만 링컨의 출생부터 유년시절, 가족관계, 연애이야기, 결혼, 정치인으로 성장, 대통령 당선, 남북전쟁의 승리, 암살로 인한 죽음등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었다.

 

 링컨의 어린 시절 아홉살 때 어머니 Nancy 가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새어머니 Sarah 가 들어왔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새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좋지 않은데 링컨의 경우는 달랐다 한다.

 즉, 새어머니 사라는 성격이 원만했고 헌신적이였다며 물론 링컨이 착하기도 했지만 서로 사이가 아주 좋았다 하며 사라 부인은 후일 링컨을 이렇게 평했다 한다.

 " 링컨은 내가 아는 최고의 소년이었고, 내가 링컨과 지내는 동안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어요. 그의 마음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그의 마음처럼 한마음같이 움직였어요." 

 또한 링컨도 "내 자신 모든 것이나 이루어져야할 바람은 나의 천사같은 우리 어머니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다." 라고 했다니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모자간에 이 어찌 감동스럽지 않은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두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에 부러움과 찬탄을 아낄 수 없었다.

 사라부인은 링컨에게 책읽기를 권하는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를 바탕으로 법률공부도 열심히 하고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대통령까지 되었다고 생각하며 새어머니의 보살핌이 큰 힘이 되었으리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일반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은 링컨의 연애 이야기는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 링컨의 성격은 너무나 신중하고 자의식이 강하여 여자 앞에서 수줍음을 많이 탓으며 남자들과는 쉽게 접근하였으나 여자들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한다.

 링컨이 27세 되던 해 일리노이주의 주의원에 재 당선 되고 같은해 9월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링컨에게 경사스런 한 해였는데 일하고 있던 New Salem의 작은 호텔에서 숙식을 하고 있을 때 주인 딸인 Ann Rutledge를 열렬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링컨은 한동안 괴로워 하였는데 후세의 사가들은 이 사건을 링컨의 첫사랑으로 치고 있으며 어쨌든 모든 미국 사람들이 이 여성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만난 여성은 한살 위의 나이로 피부가 곱고 푸른 눈에 검은 머리를 한 Mary Owens 인데 링컨의 청혼을 두번이나 거절하였다고 한다.

 30년이 지난 후 그녀의 회고에 의하면 링컨은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여 결혼 상대로 곤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퇴짜를 맞아 마음이 상한 링컨은 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시는 결혼을 하려는 마음이 없다고 하며 실망감을 드러냈다고 하니 퍽 기분이 우울했던 것 같다.

 

 세번째 만나 결혼까지 한 여성이 바로 Mary Todd 인데 링컨이 일이노이주 주의원에 4번째 임기 중이었으며 한참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인기가 한창 오르며 활기 있던 시기였다.

Mary는 재력가인 Todd 집안 출신으로 매력적이고 화사한 외모에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상식이 풍부하고 불어도 퍽 유창하게 하였으며 문학과 음악적 소양도 풍부했다고 한다.

링컨의 나이 30 이던 해로 일리노이주의 주도가 Vandalia 에서 한참 인구가 늘어나며 발전하던 Springfield로 이전하게 된 것을 축하 하는 무도회장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탓이었는지 링컨이 용기를 내서 먼저 Mary 에게 다가가 잘못 추는 춤이지만 함께 하자고 하여 어색한 춤을 추고 나서 같이 책을 읽고 시를 읽으면서 정치 이야기를 했다 한다.

 

 대부분 Mary가 이야기 하고 링컨은 듣는 입장이었지만 링컨의 눈은 그녀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고 후일 그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회상하였는데 아무튼 링컨이 퍽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교제가 알려지자 Mary 집안에서는 링컨의 학력과 재산을 보고 반대하였는데 링컨도 주변의 반대와 앞날의 결혼 생활에 어느정도 불안을 느껴 마음이 흔들리면서 두 사람 사이에 다툼과 일시적인 교제 중단 기간이 있었다.

 그러나 링컨의 마음은 심히 괴로워 결국 자살까지도 생각하였고 이러한 사연을 친구에게 하소연 했다 한다.

헤어진 후 일년 지나 우연히 다시 만난 다음 1841년 11월 어느날 밤 친한 친구에게만 조용히 알린 후 결혼식을 올렸다 한다.

링컨이 암살 당하기 전까지 26년간이란 짧지 않은 결혼 생활은 가끔 부부싸움도 하여 누구는 링컨의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고 단정짓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여느 부부와 다름없었다 한다.

 

 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링컨은  특히 막내 Thomas를 귀여워하였다.

또한 이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두 가지인데 첫째,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링컨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Whig 당 소속이었으며 반대당은 진보주의인 Democrats 민주당으로 당시 양당체제였으나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이 양당에 다 있다 보니 자연히 Whig 당에서 노예제도 반대파들이 중심이 되어 결집하고 민주당 반대파까지 가세하여 새로운 당인 Republican 공화당이 나타났는데 지금도 그 양당 구도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시점에 정치가 링컨이 그 중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또 하나는 주로 노예제도와 과세제도등의 견해 차이로 남부와 북부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여 남부 여러주와 준주들이 연방에 반기를 들고 분리 활동을 하여 결국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노예제도에 관하여 찬성파와 반대파(폐지론자 Abolitionist)와 그리고 중도파가 있었다.

 중도파는 기왕 노예제도를 주법으로 인정하는 주나 준주는 그대로 노예제도를 존속시키고 아직 실시하지 않거나 새로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가입하는 주들에선 노예제도를 확대 시키지 말자는 주장을 펴는 집단이며 링컨도 바로 이 중도파에 속하였고 극단적인 대립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 내란사태로 발전하여 수만명이 죽거나 다치는 전투가 여기저기서 벌어졌으며 워싱턴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게티스버그전투에서만 양측을 합하여 2만명 이상의 전사자가 죽는 혈전이 있었다.

사실 남북전쟁 동안 숫자적으로는 북군이 우세하였으나 전투 초기부터 잘 훈련되고 정신력에 앞선 남군에게 번번이 패배하였고 남군의 총사령관도 여러명이 바뀌었는데 Meade 장군이 지휘한 바로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남군이 제대로 된 승리를 하였으며 다음에 이어진 Grant 장군이 지휘한 빅스버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이를 계기로 남군이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북군이  승리하는 결과가 되었다.

 초기의 고전을 빠져나와 계속된 전투에서 남군이 계속 승리하면서 차츰 노예제도 폐지론자의 세력도 확대가 되어 링컨도 정책을 바꿔 결국 1862년 9월 22일 노예해방포고령(Emancipation Proclamation)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으며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실질적으로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1863년 11월 19일 게티스버그에서 국립묘지 헌정식이 열렸으며 참석했던 링컨이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하게 된다.

 사실 게티스버그 연설은 아직 남군이 완전히 전쟁 항복을 하기 이전에 이루어졌으며 2페이지도 안되는 아주 짧은 연설문이지만 세계연설문 중에서 명문으로 치고 있다.

 남북전쟁이 남군의 항복으로 끝나고 1964년 링컨이 대통령에 재선에 성공하여 1865년 3월에 취임 연설을 한 후 얼마 안되는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아내와 함께 < Our American Cousin > 이란 작품을 관람하던 중 극단주의자인 26세의 John Wilkes Booth 란 청년이 쏜 총알을 머리에 맞고 그 다음날 사망하여 이 위대한 인물은 역사 속에 묻히게 되었다.

"Now, he belongs to the ages."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