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고미숙 지음
2004. 2.
연암 박지원(1737.영조 13~ 1805. 69)은 중국 청나라 열하를 다녀온 기행문 "열하일기"와 이 기행문에 실린 "虎叱호질"이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열하일기가 워낙 내용이 방대하여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은데 마침 리라이팅 클래식 Rewriting Classic 이란 기획으로 독문학을 전공하였고 문학비평에도 잠시 활동하다 이 책을 쓴 계기로 이제는 자신을 "고전평론가"라고 불러달라는 탁월한 글솜씨를 자랑하는 고미숙이 쓴 이 책을 읽게 되어 열하일기에 대한 이해를 쉽게하였다.
처음부터 열하일기와 같은 고전기행문을 대하다 보면 기가 질려 시작도 못하고 물러서게 되는데 이렇게 일차로 간단한 상견례를 하게 되면 언젠가 전문을 읽는데도 징검다리 역할이 되어 잘 읽어내리라 생각된다.
저자의 의견에 의하면 연암의 글쓰기는 조선 500년을 통틀어 가장 독특하고 소위 정조시대의 문체반정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는데 나는 이 의견보다 이 책을 쓴 고미숙이란 인물의 글 쓰기 솜씨에 더욱 매혹을 느꼈다.
조선시대 정치적 소용돌이 하나였던 연산군을 폐위 시킨 중종반정, 광해군을 역시 폐위시킨 인조반정은 알고 있었으나 정조시대 정치적 사건이 아닌 단지 글쓰기에 대한 혁신적인 변혁에 해당하는 "문체반정"이라는 말은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 문체반정의 실질적 주인공인 연암의 글에 대한 쉽고 자세한 설명을 손에 잡힐듯하게 설명하여 이해를 도왔다.
첫째 풍부한 동서고전을 넘나드는 박식함, 둘째 적절한 비유 및 묘사, 셋째 인물과 역사 이면에 가려져 있는 보이지 않는 사실에 대한 예리한 상상력등 고미숙씨의 그간의 이력과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실제 열하일기보다 더 재미있게 쓴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박지원은 젊은 시절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였고 당시 양반 출신으로 출세를 위해 꼭 필요한 과거시험을 소홀히 하였다. 어쩔수 없는 경우엔 시험을 보고도 답을 적는 대신 그림을 그린다거나 딴 짓을 하여 일부러 시험통과와 다른 행동을 하였고 현실정치에도 초연하였다 한다.
연암은 신분제도와 장유유서가 엄격했던 당시에 서얼 출신이거나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 사람도 가리지 않고 친구로 사귀었다. 그 시대에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담헌 홍대용, 정철조와 음악에 능한 김용겸, 거문고의 달인 김억, 서얼 출신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무인 백동수 그리고 유언호 같은 친구는 당시 세도가 홍국영으로부터 생명의 위험까지도 피하게 해준 은인이며 박지원의 친교는 그 범위가 다양하고 넓었다.
유언호는 홍국영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역정보를 흘려 위기를 넘기게 하고 황해도 개성에서 가까운 금천군 연암(제비 바위)에 피신처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여기 지명에서 박지원의 호가 탄생하기도 하였고 홍국영의 실각 후 서울로 귀환하였다 한다.
연암은 친구 사이의 우정에 비중을 크게 두었고 중세의 덕목이었던 忠, 孝 보다도 友情을 더 중시하였다고 한다.
연암의 집은 지금의 파고다 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마침 부근에 친구들의 집들이 지근 거리에 있어 자주 모여 담론을 하였고 파고다 공원의 원각사 10층 석탑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다 하여 백탑권연집서 라는 공동 문집도 만들었고 또 가까운 곳에 있는 청계천에 걸린 수표교 다리 위에서 달밤에 자주 모임을 갖기도 했는데 여기를 배경으로 탄생된 글이 "취답운종교기"라고 한다.
박지원이 열하에 가게 된 사연은 삼종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축하사절로 연경(북경)으로 요즘으로 보면 사절단장인 정사의 직무를 띄고 가게 되었는데 벼슬도 없고 직업도 없던 박지원을 안타깝게 여겨 비공식 수행원으로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다.
그래도 양반 출신이라 경마잡이와 하인하나를 데리고 가게 되었는데 열하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데 이들이 장복, 창대 이며 타고 가던 말도 역시 자주 언급 된다 한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돈키오테를 연상하여 이들의 비교론을 장황하게 피력하기도 하는데 퍽 재미있는 부분이다.
1780년 5월 한양을 출발하여 열하기행을 마치고 10월 귀국하여 6개월간의 여정이었고 그 여행경로는 다음과 같다.
한양출발- 황해도 박천- 의주- 압록강 도강- 요양(요동벌판)- 거류하- 산해관- 계주- 연경(북경)- 밀운성- 고북구- 열하
원래 당초 일정은 황제가 있는 연경이 목적지였으나 막상 도착하여보니 황제가 여름 피서지인 연경에서 230 킬로미터 북쪽 온천도시인 열하로 떠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힘들게 도착하였으나 황제가 다른 사신보다 조선 사절단에 관심을 더 기울여 열하까지 꼭 오기를 명령하고 도착 날짜까지 지정하는 바람에 연암을 비롯한 사절단은 사흘동안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열하에 가게 되는 고행을 겪기도 한다.
도착 후에 황제의 깊은 관심으로 좋은 점도 있었지만 당시 지금의 달라이라마와 같은 티벳의 판첸라마가 황제의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어 황제가 인사를 드리라 지시하였으나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불교와는 거리가 있는 유학자들이었기에 판첸라마 면담을 마뜩찮게 생각하고 성의 없이 어쩔 수 없이 하다 보니 결국 황제가 이를 알게 되어 미움을 사기도 하는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정식 사절단이 아닌 연암은 크게 부담도 없고 자유로운 기분으로 고생은 말 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원래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컸던 사람이라 자신의 뜻데로 여러 사람도 만나 필담을 주고 받고 구경도 하고 좋아하는 술도 마시는 등 그야말고 물만난 고기처럼 행동하고 열하일기와 같은 주옥같은 글이 탄생하게 되었다.
연암을 포함하여 조선시대 연경 왕래는 공식적으로 500회 정도이고 연행기만해도 100종 정도 되는데 저자는 다음의 연행기를주목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 연암의 열하일기는 단연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문체와 내용으로 연행기를 떠나서 어떤 문장 보다 뛰어난 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황업 : 연행일기
홍대용 : 연기
이덕무 : 입연기
박제가 : 북학의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은 연경이 목적지였으나 연암의 경우는 목숨을 건 사흘낮밤의 고행이었지만 열하까지 가게 된 사실도 다른 사람과 다를 뿐더러 박식하고 어디에 메이지 않은 조선시대 최고의 자유인 연암의 글이었기에 여느 사람의 기행문과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책 뒷부분 보론에서는 같은 시대로 마음만 먹으면 서로 만날 수 있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과 연암 박지원 선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나이가 25세 위인 연암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서로 의견을 소통하거나 상대에 대하여 평가를 했음직 한데 전혀 그런 기록이 없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는데 퍽 흥미있는 추리라고 생각되었다.
열하일기 목차
도강록-압록강 도강내용, 과제묘기
성경잡기- 십리하~소흑산 여정, 속재필담, 상루필담.
일신수필-장대기
관내정사-산해관~연경 ,호질.
막북행정록- 연경~열하 무박나흘 여정
태학유관록- 열하 체류기
환연도중록- 열하~연경
경계록- 열하 선비 리스트
심세편- 조선선비 폐단기록
망양록- 열하 음율토록기
혹정필담- 열하 혹정과 필담기
찰십륜포- 판첸라마 접견기
반선시말- 티벳불교 원리 역사
황교문답- 티벳불교 취재록
피서록- 열하 피서 산장 기록문
양매시화- 양매서가 시화기록
동란서필- 동란재 수필
옥갑야화- 옥갑에서 비장들과 대화록 , 허생전
행재잡록- 황제 행재소 청취록
금료초고- 의학 취재록, 동의보감 언급
환희기- 열하 장터 요술기록
산장잡기- 열하 산장, 야출고북구기.일야구도하기, 상기.
구외이문- 고북구 청취문
황도기략- 북경황서 기록문 ,황금대기
알성퇴술- 황도기략 후편
양엽기- 황도기략 부록 연경명소 정리
저자는 열하일기 완역본에서 북한판과 우리쪽의 민족문화추진회편을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 아울러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의 글을 다시 한글로 적은 박희병의 "나의 아버지 박지원" 을 읽어 볼 것을 권하였다.-끝